2023_60
2023.5.2. (화) 12:55~13:45, 50분 탐방 2.7km 이동
오전에 청주의 상당산성 탐방을 끝내고 식사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나왔다.
정북동 토성으로 가는 버스는 충북도청 앞에서 환승해야 하는 데, 워낙 뜸한 버스라 제때 탈지 모르겠다.
카카오버스 앱에 미리 찍어놓은 정북동행 버스를 보니 환승지점과 점점 가까워진다.
정류장이 가까워오자 환승할 버스가 즐풍이 탄 버스 바로 앞에 가고 있다.
그 차가 바로 앞에서 정차함과 동시에 즐풍이 탄 버스도 정차했다.
부리나케 뛰어가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몸을 실으면서 논스톱으로 달리는 쾌거를 얻어냈다.
버스를 한 순간도 기다리지 않고 잘 탔다 싶었는데, 정북동 종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하동 종점이란다.
정북동 종점까지 가는 버스인 줄 알았는데, 정하동 종점이라니 여기서 내리면 한참 걸어야 할 텐데....
사람들은 다 내리고 즐풍만 남았는데, 버스 기사분이 내리는 말을 안 하고 또 운전하며 달린다.
알고 보니 정하동종점은 예전에 민가가 별로 없을 때 버스 종점이었고, 지금은 정북동이 종점이다.
정하동 종점이 마지막 정거장이었다면 1.6km 더 걸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종점에서 내려 정북동 토성을 보니 평택 농성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의 아담한 토성이다.
평택농성이 궁금하면...
ㅁ 정북동토성 井北洞土城
충북 정주시상당구 정북동 |사적 제415호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정북동토성은 청주시의 북쪽 외곽에 미호천美湖川을 따라 넓게 형성된 충적평야에 자리하고 있다.
청주시내를 남동에서 북서로 가로지른 무심천이 토성 주변의 까치내라고도 불리는 미호천에 합류한다.
토성에서는 동쪽의 상당산성, 남서쪽의 부모산성을 비롯하여 사방 외곽에 배치된 산성과 관방시설들이 잘 조망된다
정북동토성은 해발고도 35m 정도의 저지대에 축조된 방형의 평지성으로, 성의 둘레는 675~680m이다.
별도의 기단 시설 없이 판축版築에 의해 성벽을 쌓아 올렸다.
사방에 설치한 성문과 토성의 모서리 사이에는 곡성曲城을 하나씩 배치한 것이 특정이다.
성벽의 바깥 면을 따라 넓게 판 해자 시설은 일정 기간 시용되다가 매몰된 뒤 상부에 건물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그 외 제철 유구, 부석주거지 등과 함께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도 확인되었다.
타날문打捺文이 시문 된 고식의 연질토기 편이 제철 유구에서 수습되었고,
부석敷石이 설치된 주거지에서는 회청색 경질의 짧은 목헝아리, 시루, 소반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해자가 매몰된 이후에 조성된 건물지에서는 주로 파상문波狀文 대옹, 주름무늬병과 통일신라후기의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후백제 견훤의 축성기록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정북동토성의 존속시기를 가늠케 해주고 있다.
(출처_중원의 산성)
우물
정북동 토성의 성벽 밖 해자가 돌아간 구역의 남쪽 성문과 동쪽 성문 사이에서 우물 4곳이 발견되었다.
1·3호 우물은 해자 안에서, 2·4호 우물은 바깥쪽 해자의 밖에서 확인되었다.
우물은 모두 둥근 강자갈을 이용하여 조성되었는데, 1호 우물은 안쪽 해자의 바닥보다 깊은 곳에
폭이 좁은 사각형으로 만든 것이고, 2~4호 우물은 둥근 형태이다.
1호 우물은 깊은 곳이라 위험해 노출시키지 않았다.
복원된 우물은 원형을 그대로 두고 윗부분을 보강한 후 안전을 위해 뚜껑을 설치했다. (안내문)
사진은 3호 우물이다.
사실 읍성이나 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물이다.
물이 있어야 음식을 만들 수 있기에 장기전에 돌입할 수 있다.
우물이 없으면 산성이나 읍성은 쓸모가 없다.
정북동토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해자부터 만난다.
이곳은 여느 곳과 달리 해자가 두 개씩 설치된 특별한 곳이다.
사적 제415호 정북동토성은 그동안 발굴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 주거지, 백제시대 집터, 우물터 유구,
해자 등이 발견됐으며,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 초기인 2~3세기 경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북동토성은 미호천 옆 충적평야에 자리 잡아 확연하게 눈에 띈다.
동성벽에 자라는 소나무 한 그루, 서성벽에 네 그루 등 다섯 그루가
자칫 밋밋했을 정북동토성에 활력을 준다.
토성 안쪽에서 보는 풍경
동문터는 양쪽 성벽이 중간에 잘라낸 듯 직선으로 연결되었다.
토성은 높이가 약 4m가 채 안 되는 낮은 성벽이다.
정북동토성이 우리나라 토성 중 가장 완전하게 남은 토성이라는 데, 평택 농성도 그렇다.
사실상 정북동 토성은 발굴 조사한다고 전부 뒤집어졌다.
그 결과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나 대부분은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다.
청주 정북동 토성 (淸州 井北洞 土城)
미호천변 평야의 중심에 있는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전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과 성의 위치, 주변 여건이 초기 성곽시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의 길이는 675m이고 높이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안에서는 주거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확인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를 확인했다.
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들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토성이다.
(출처_문화재청)
정북동토성(淸州 井北洞土城)
사적인 정북동 토성이 위치한 곳은 금강의 최대 지류인 미호천의 남안에 인접하고,
청주시 중심부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홀러 미호천에 합류하는 무심천(無心川)이 합류하는 까치내[韻川]
동쪽 연안의 넓은 평야지대 가운데에 있다.
주변은 넓은 들판이고, 이 들판의 남쪽 주변은 배후습지로서 더욱 넓은 범위에 구릉이 발달하였고,
다시 구릉의 외곽 주변은 산지로 되어 있다.
정북동 토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상당산, 동남쪽의 우암산이 바라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동북쪽으로는 증평의 이성산과 두타산이, 북쪽에는 목령산이 보이며, 이들 산에는 산성이 위치한다.
남쪽 3km 지점에 사적인 신봉동 백제고분군이 위치하고, 남서쪽 3km 떨어진 지점에는
청주시 봉명동과 송절동의 대규모 청동기시대 유적지와 삼국시대 초기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서남쪽은 부모산이 있어 이 산 위에는 산성과 보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산줄기 언저리에 비하동 청동기유적과 향정동·내곡동의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북쪽과 북서쪽은 미호천을 사이에 두고 오창과학산업단지가 들어서 있는 곳으로,
이곳 역시 송대리 고분군·상평리 고분군·주성리 고분군 둥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고분군들이 조사되었다.
정북동 토성은 청동기시대 이후에 형성된 문화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의 중심 위치에 존재하는 셈이다.
이 토성은 현존하는 토성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으며, 고대 중국식 방형토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토성은 평면 형태는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한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성벽의 둘레는 약 675m이다(동벽 185m, 서벽 165m, 남벽 155m, 북벽 170m).
성문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있는데, 남문지와 북문지는 좌우의 성벽이 어긋나게 만든 것이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반원을 이루며 밖으로 약간 돌출되어 곡성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이 네모서리와 문지 사이마다 밖으로 돌출된 곡성의 모양이 있어서 모두 12개의 곡성 모양
치성을 두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토성의 입지와 구조는 우리나라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축조된 방형토성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토성에 대한 옛 문헌상의 기록은 근래에 발견된 승려 영휴(靈休)가 지은『상당산성 고금사적기
(上黨山城古今事讀記)』가 유일하다.
이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영조 때까지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어서, 대체로 후삼국시대 궁예가 거처하던
상당산성을 후백제의 견훤이 빼앗고, 이 토성을 축조하여 곡식을 저장하여 상당산성으로 수납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후삼국시대에도 이 토성이 곡식을 임시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유구는 1999년도 발굴조사 당시 남벽 바깥쪽에서 해자가 매워진 후 통일신라말~고려초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정북동토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6년 11월~1997년 6월까지 1차 조사가, 1999년도에 2차 조사가 실시되었다.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정북동 토성의 성벽 축조 방법과 문지의 구조, 성 내외의 시설 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벽구조는 첫째로 별도의 기단부 조성 없이 축조되었다는 점이다.
별도의 기단부는 성벽이 축조되는 너비의 안쪽과 바깥쪽에 할석을 열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러한 시설이 없이 축조된 예는 비교적 연대가 올라가는 초기의 양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한반도에 최초로 축성된 토축 성곽의 형식은 별도의 기단이 없으며,
삼국시기에 축조된 판축 성벽의 경우에는 점차 기초 부분의 외연에 기단부를 구성하는 예가 보이고,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거의 예외 없이 기초 부분의 외연에 석렬을 기초로 하는 수법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 있어서 정북동 토성은 일단 성벽 구조상으로는 초기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정북동 토성의 성벽은 체성 부분과 외피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체성 부분은 대략 횡단면에서 나타난 기둥 사이의 간격 2.1m의 3 배수가 되는 6.3m의 너비를 가지며,
안팎의 기둥과 중간에 두 개의 기둥을 두고 있다.
이 4개의 기둥은 등간격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성벽의 안팎 면이 종단면에 있어서는 기둥열의 간격은 1.1~1.7m의 간격으로 일정하지 못하다.
셋째, 정북동 토성에서는 36~38m마다에 곡성이 축조되었다.
곡성들은 곧게 뻗은 성벽의 모서리와 문지 사이마다 하나씩 있으며, 각 문지의 외향으로 나간 끝 부분에 있다.
곡성은 체성의 너비보다 4.2m의 너비가 더 넓으며, 축조 방법은 체성에 비교하여 황갈색 찰흙을 위주로 하여
거의 단일한 흙이 이용되었다.
넷째, 문지는 동·서·남·북성벽의 중간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문지와 북문지는 좌우의 성벽이 어긋나 있어
성 내외로의 출입은 ‘S’ 자상으로 돌아 출입하게 되어 있어 침입하는 적을 쉽게 공제할 수 있는 구조이다.
2007년도에 이루어진 서문지의 조사에서 확인된 구조는 성벽의 횡렬기둥 간격의 2배 간격인 4.2m의 너비로
개구부를 두고, 여기서 좁혀 문구부를 만들었다.
문은 성벽의 너비에서 내측으로 약간 들여서 만든 적심이 서문지의 북측에 2개의 혼적이 남아 있다.
그 간격은 6.3m로 체성벽의 너비와 동일하다.
토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는 민가가 들어선 일부지역에 대하여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확인된 유구로는 토성 축조 이전인 청동기시대 장방형 주거지와 목주용 구덩이열,
토성축조 및 경영시기와 관련된 야철 혹은 제철과 관련된 유구·부석(敷石)을 포함한 주거지·
굴림주건물지·동벽 안쪽을 따라 분포한 자갈돌무지 유구, 조선시대의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해자는 현존하는 성벽의 외향 붕괴경사면 아래에 성벽 외측의 외피 축조부 바깥에 존재하였으며,
성벽의 외연을 따라 너비 17~22m, 최대 깊이 1.6m 이상의 규모로 돌아가고 있다.
이 해자의 바깥쪽으로 일정하지 않은 간격을 두고 너비 3.5~5m정 도의 해자가 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성벽 가까이에 비교적 규모가 큰 해자가 존재하고, 다시 외곽으로 작은 해자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해자는 남문 앞쪽에서 보다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두 해자 사이에서 서쪽으로 시작되는 너비 3m 정도의 좁은 해자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및 홍도편, 원삼국시대의 토기편, 삼국시대의 호·평저옹·적갈색
연질 및 회청색 경질의 타날문 토기편 등 토기류, 8~10세기(통일신라~후삼국) 경의 주름무늬 병,
목에 파상문 혹은 돌대가 돌려진 희청색 경질의 대형옹, 굽이 달린 황갈색 혹은 암갈색 연질의 완 조각들,
경작토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이후의 도기편과 조선시대의 자기편들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정북동 토성의 기능과 위상이 점차 약화되면서 토성 밖의 해자가 매몰되고,
통일신라 후기에 들어서 성 안팎에 건물지가 조성되면서 일정기간 동안 생활면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에서 발췌)
이곳은 북문이다.
두 성벽은 어긋나게 연결해 옹성이란 느낌을 준다
옹성은 성문의 출입구를 반원처럼 돌려 수비를 좋게 하는 시설이다.
벽을 우측에 두고 들어오는 적을 공격하기 좋은 위치를 만든 것이다.
성벽 우측엔 작은 농수로가 흐르고, 제방둑 너머는 미호천이 흐른다.
서문은 동문과 마찬가지로 일직선 상의 성벽을 절단하듯 통로를 만들었다.
성 안에서 보는 서문 정북동 토성에 만든 4개의 문 중 남문이다.
동성벽과 남성벽이 만나는 교차지점
남성문도 좀 전에 본 북성벽과 마찬가지로 성벽이 엇갈리게 지나가며 문을 냈다.
이곳 역시 옹성의 일종으로 본다.
남문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소나무가 성벽에 올라가 지키고 있다.
북문은 물론 동서남북 문 모두에 늘 푸른 소나무를 심으면 몇십 년 보기 좋은 수호신이 되겠다.
청주시청에 건의해야 되나...
소나무 그늘아래 두 여인이 캠핑용 의자에서 쉬고 있다.
그늘이 있기에 쉼터가 되는 것이다.
돔성벽을 지키는 쓸쓸한 소나무 한 그루
성 밖에 두 개의 해자가 설치되었다.
해자는 성 주변을 둘러 파서 만든 도랑으로 방어와 배수 등의 기능을 겸한다.
정북동 토성의 해자는 두 차례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첫 번째 해자는 성벽의 바깥을 따라 돌아가면서 설치했다.
이 첫 번째 해자를 수리하고 만든 두 번째 해자는 안쪽과 바깥에 이중으로 만들었다.
정북동 토성 해자의 특징은 바닥면이 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돌아가면서 천천히 낮아진다.
이런 구조는 해자가 물을 채우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호천의 물을 일부 끌어들여 돌아가도록 배수시키는 기능을 겸할 수 있도록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두 번째 해자는 토성이 방어의 기능을 잃게 되면서 폐기되어 메워졌다.
그 메워 다져진 위쪽에 통일신라의 수레가 다니던 도로와 그 이후의 집터를 비롯한 생황유구들이
자리하게 되었음이 발굴을 통해 알려졌다. (안내문)
정북동 토성을 한 바퀴 돌아 동문에 섰다.
이제부터 성 밖으로 한 바퀴 더 돌며 바깥 풍경을 볼 생각이다.
밖에서 보는 해자는 이제 역할을 잃은 지 오래되어 흔적만 보인다.
배수구를 마련했는지 모르지만 장마가 오면 물이 빠질 때까지 이곳에 물이 가득하겠다.
미호천 북방에 심은 나무가 크고 작은 게 보기 좋다.
정북동 토성에도 바깥쪽으로 저렇게 나무를 심으면 언젠가 주민들의 훌륭한 쉼터가 되겠다.
싱그러운 5월의 둘째 날이다.
이 봄은 얼마간 머물다 곧 무더위를 선물하며 떠날 것이다.
올여름 덥겠다는 예보가 벌써부터 들린다.
남성벽 밖엔 마른 억새가 포복하든 해자에 들어앉았다.
언젠가 짙푸른 억새가 성할 때면 찌는 듯 한 더위가 이곳에 머물 것이다.
50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에 두 바퀴를 돌며 비교적 자세히 탐방한 정북동 토성이다.
삼국시대에 만든 이후 큰 변화가 없어 발굴조사 이후 연구논문을 쓰기 좋았나 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작은 토성에 대해 「한국고고학전문사전」에서는 내용이 풍부하다.
그동안 세 번이나 탐방한 평택 농성에 꼭 두 배인 이곳 토성의 후기를 마친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양 신라 적성비와 단양 적성 탐방 (7) | 2023.05.26 |
---|---|
어버이달에 찾은 청주 부모산성 (0) | 2023.05.20 |
일제의 파괴로 흔적만 남은 청주읍성 (4) | 2023.05.20 |
청주 상당산성의 봄 풍경 (5) | 2023.05.19 |
세종시 금성산의 금이성(금이산성) 탐방 (0) | 2023.05.04 |
세종시 운주산의 운주산성 환종주 (0) | 2023.04.30 |
경주읍성은 야간 탐방이 더 멋져 (0) | 2023.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