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61
2023.5.2. (화) 오후에 잠시 탐방
산성과 읍성을 택하라면 양쪽 다 중요성에 비추어 어느 쪽을 택할지 망설여진다.
산성은 보통 산 위에 있으나 세월이 흘러 붕괴되었다고 해도 얼마간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러나 읍성은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이 고의로 도로나 철로를 놓으며 대부분 무너뜨렸다.
온전히 남아 있거나 복원된 것으로 고창읍성, 해미읍성, 낙안읍성, 무장현읍성 등은 상태가 좋다.
오늘 청주의 상당산성과 정북동 토성을 먼저 탐방했다.
상당산성은 조선시대에 충북병마절도사영으로 있으면서 비교적 상태가 좋고 복원도 잘 되어 있다.
정북동 토성은 평지에 있는 데도 이후 석성으로 개축하지 않은 상태라 이 또한 상태가 좋다.
청주읍성에도 한때 조선의 충북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이라 일제의 강제 철거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망선루
ㅁ 망선루 (도 유형문화재 1982.12.17. 지정)
망선루는 본래 취경루(娶景樓)라 하였으며 고려 시대에 관아의 부속 누정(회의 및 연회 장소)으로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다.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1361) 홍건족의 침입 때 왕이 안동으로 파천하였다가
그해 11월 청주에서 수개월 피신하고,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기뻐하여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를 행하고
합격자의 방을 이곳에 붙였다고 하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이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가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1922년 일제의 무덕전 신축으로 망선루가 헐리자 청주청년회 회장이던 김태희를 중심으로 망선루 보존운동을
전개하여 1923년 제일교회(당시 청주읍교회)에 이건 하였다.
이는 청주 최초의 시민운동이었다.
이전된 망선루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청남학교, 상당 유치원 등 민족교육 운동과 한글 강습,
각종 집회 및 강연장으로 활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세광중고 교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망선루의 노후로 붕괴위험이 날로 높아가자 청주시에서는 1999년 10월에 건물을 해체하여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와 2000년 12월 원형을 고증하여 복원하였다.
(출처_청주시청)
측면에서 보는 망선루
압각수(鴨脚樹) (도 기념물, 1976.12.21 지정)
중앙공원 내에 있는 은행나무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이초(李初)와 윤이(尹彛)가 명(明) 나라 태조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하여 이를 반대한 이색(李穡) 등을 살해하고 이현보(李賢輔) 등은 유배하였다.
그 후 무고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이색 등 10여 명이 옥에 갇히는 소위 ‘이초의 난’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는데, 마침 큰 홍수를 만나 이색 등은 이 압각수(鴨脚樹)에 올라 화를 면하였다.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이는 이색 등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고 하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류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주장과
나무뿌리가 오리 발의 갈퀴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 약 900년, 높이 30m, 밑 둘레 8m이다.
(출처_충주시청)
위 내용은 좀 더 보완될 것으로 보인다.
양촌 권근이 지은 압각수란 시다.
셋째 줄을 해석하길 "고려 공양왕이 청주에 큰 물이 넘쳤다는 말을 듣고..."로 해석했다.
원문에는 聞道라 썼으니 시의 운율과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긴 주어인 고려 공양왕 대신 道라 표현했다.
900여 년이나 되었다는 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았다.
충북도 기념물로 지정되며 위안을 갖는다.
대한민국독립 기념비
충청도 병마절도사영문
충청도병마절도사영 건물에는 정곡루(正鵠樓)란 편액이 걸렸다.
정곡[正鵠]은 사물의 가장 중요한 요점 또는 핵심이란 뜻이니 업무 처리를 불편부당하게 처리하지 않고,
중요하게 잘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으로 해석된다.
청주읍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마침 독서 중인 어느 어르신께 위치를 물었다.
알려주신 대로 찾아가다 보니 이곳에선 윷놀이가 한창이다.
한 분은 그늘에서 마음의 양식을 닦기에 바쁘고, 이 분들은 세시풍속을 즐기기에 흥겹다.
모두 마음대로 가는 게 좋다.
이 분들 뒤로 성벽이 일부 드러난 게 보인다.
청주읍성이 사라지자 지금은 중앙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 <청주읍성 성돌 모으기 운동>으로 되찾은 성돌과 신재를 이용하여
35m 길이의 성벽을 우선 복원하였다. 고 안내하고 있다.
시민들 성금이야 그리 많지 않을 테니 예산을 세우던가 문화재청에서 자금을 받아
복원하는 편이 좋겠다.
겨우 복원된 35m 성벽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ㅁ 청주읍성(淸州邑城)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 남문로 일대에 있었던 청주읍성은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성종 18년(1487) 2월에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현재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대홍수로 무심천이 홀러 넘쳐 청주읍성의 남문이 파괴되고
곧 북문에 다다라 성안의 물깊이가 한 길이 넘었다는 「고려사 <高麗史)」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말 이전에 축성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685)에 청주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고,
689년에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청주읍성은 남북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석성으로서 둘레약 1.7km, 높이 4m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청주읍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1,084보인데 성안에 우물이
13개가 있어 사철 마르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둘레가 3,648척
높이가 8척, 『세종실록(世宗實緣)』에는 둘레 5,443척 높이 13척,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둘레가 1,427 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각종 지리지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성문이 4개소, 옹성이 2개소, 우물이 13개소, 성가퀴가 566개소이고,
포루가 8개소, 치성이 2개소 있었으며, 서·남·북의 3문은 홍예문에 문루를 갖추었지만
동문은 홍예와 문루가 없다고 되어 있다.
전남 구례의 운조루에 소장된 『여지도(與地圖)』 속에 포함되어 있는「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에는
청주읍성 내외의 각종 시설과 건물 이름이 자세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여지도서(興地圖書)』나 『청주읍지(淸州邑誌)』 등에도 관아의 위치와 규모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을 종합해 보면 지금의 청주시청 자리에 청주목 관아가 있었고,
청주읍성의 중앙에 해당되는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에는 충청병영이 있었다.
관아와 병영의 사이인 지금의 청주우체국 자리에는 사창(司倉)이 있었으며, 동문 남쪽에는 뇌옥(年獄)이 있었다.
남문 밖의 동편에는 병마절도사의 외형에 해당하는 진영(鎭營)이 있고, 성 내외 곳곳에는 13개소의 우물이
있어 관민이 음용수로 이용하였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배치하여 동문을 벽인문(闢寅門), 서문을 청추문(淸秋門), 남문은 청남문(淸南門),
북문은 현무문(玄武門)이라 하였다.
이들 가운데 남문은 4문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커서 옹성과 함께 청주읍성의 정문 역할을 하였다.
1910년대에 찍은 사진자료를 통하여 추정하면 성문은 홍예문으로서 홍예종석의 좌우로 4개의 홍예석으로
상부를 구성하고 그 하부에 5매 정도의 선단석(扇單石)을 놓아 홍예 부분을 받게 한 일반 형태이다.
홍예의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석[缶形武砂石】을 놓고 성문 좌우에 10~11단의 무사석을 놓아 견고하게
하였으며, 좌우측 상부에 누조석(漏槽石)을 각 1개씩 설치하였다.
북문은 지금의 성안길 북쪽 끝에 있었는데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에 홍예문과 그 위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의 문루가 그려져 있다.
서문은 지금의 서문동 오거리에 있었는데, 역시 홍예문과 팔작지붕형의 문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헌 등이 이끄는 의병이 이 서문을 뚫고 청주성을 탈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중봉조헌전장기적비’가 서문 밖에 세워져 있다.
동문은「청주읍성도」에 다른 3문과는 달리 홍예문이 아닌 사각문으로 그려 지리지의 기록과 일치한다.
문루는 지리지에 없다고 되어 있으나「청주읍성도」에는 팔작지붕 목조기와집 형태로 그려져 있어
본래는 당연히 문루를 갖추었다가 퇴락하여 없어진 후에 복원되지 않은 듯하다.
이밖에 청주읍성에는 2개소의 옹성이 있었던 것으로 문헌에 보일 뿐만 아니라「청주읍성도」에도
남문과 북문 밖에 옹성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청주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빼앗겼다가 조헌·박춘무·영규대사 등이 이끄는 의병에 의해 탈환하였던
기록이 있으며, 이인좌의 난 때는 반란군에게 점령당했던 기록이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에서 발췌)
최근에 복원한 35m의 작은 읍성을 위해 제법 긴 자료를 찾았다.
이 작은 시작이 큰 성과를 내면 좋겠다.
다음 여정인 부모산성으로 이동하며 보는 주변 풍경이다.
읍성의 대부분은 여진족이나 왜놈들과 싸우기 위해 만든 것이다.
우리가 쇄국정책으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세상과 담을 쌓았을 때,
일본은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조선은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며 나라를 빼앗기고, 사람은 죽고, 문화유산은 난도질당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본을 상전처럼 여기는 무리가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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