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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철옹성인 단양 온달산성은 아름답기까지...

by 즐풍 2023. 5. 28.

2023-68

 

 

 

2023.5.25. (목)  08:43~10:48, 2시간 5분 탐방, 3.7km 이동, 시작 고도 268m, 최고 고도 452m

 

 

노무현 정부 때 문화재청장을 하셨던 유홍준 교수님이 극찬한 온달산성에 도착했다.

그분의 저서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편을 다 읽으며, 소개한 모든 곳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즐풍은 전문 여행가나 역사학도가 아닌 데다 소개한 곳을 가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사실 책은 읽을 때뿐이고, 뒤돌아서면 기억도 나지 않으니 오히려 이런 건망증이 고맙다.

 

최근에 산성이나 읍성 등에 관심을 가지며, 특정 지역을 찾을 때는 그곳의 산성이나 읍성도 찾는다.

금년에는 유난히 단양의 소백산 철쭉꽃이 멋지다기에 산행을 끝내고 단양 적성비와 산성을 찾았다.

단양에서 하루를 묵고 도담삼봉을 먼저 본 후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들어섰다.

탐방 내내 아무도 찾지 않는 온달산성을 천천히 둘러보며 산성과 풍경의 아름다운 조화에 매료된다.

 

 

 

단양 온달산성 탐방 코스

 

 

ㅁ 단양 온달산성(丹陽 溫達山城)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 사적 제264호 |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온달산성은 소백산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려 남한강에 접하는 '성산城山'이라 불리는 봉우리(해발 454.5m)의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베틀재, 관적령串赤嶺 등 소백산을 가로지르는 고갯길과 남한강의 수운을 동시에 통제하기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둘레는 682m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산성이나, 납작한 석재를 이용하여 내외 협축夾築의 방식으로

높이 7~8m의 성벽을 웅장하게 쌓았다.

성문은 모두 3개로 현문식懸門式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과 남쪽 성벽에 각각 치성雉城을 축조하였다.

또한 사다리꼴 형태의 작은 출수구出水口를 지대가 가장 낮은 북쪽 성벽에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의 온달溫達장군이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끌형鑿頭形 화살촉 등 고구려 계통의 유물 일부가 확인된 점 외에는 고구려의 축성 근거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락문 형태의 출입구, 성벽을 통과하는 수구, 성벽의 기단 보축시설 등에서 신라의 축성방식이 엿보인다.

또한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굽다리 접시高杯를 비롯한 신라 토기 편이 격자문 암키와, 철제 솥 등과 함께

주로 수습되어 산성의 축성 주체 및 경영 시기를 짐작케 하고 있다.  (안내문)

 

 

온달산성을 가려면 온달관광지의 넓은 주차장을 무료로 이용하면 된다.

온달관광지를 이용하려면 입장료를 부담해야 하고,

온달산성은 입장료를 부담하지 않고 관광지 왼쪽에 조성한 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온달산성으로 오르며 보는 온달관광지 내부 건물의 모습

 

 

 

온달관광지에서 온달산성까지의 거리 중 2/5 지점에 위치한 정자다.

제법 많은 구간에 나무 데크 계단이 설치되었다.

산에 오를 때마다 같은 높이의 계단을 밟을 때 지루한 느낌을 받는다.

누적고도 277m를 올려야 하는 만큼 산행 초보자는 힘들단 느낌을 받고도 남는다.

 

온달산성을 만나면 오른쪽으로 동문이 먼저 눈에 띄지만, 왼쪽 남문으로 이동한다.

처음 보게 되는 온달산성의 육중한 성벽 높이에 압도된다.

 

 

ㅁ 단양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해발 427m의 성산(城山) 정상부에 삼국시대 테뫼식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축성)으로 쌓은 신라의 협축성곽이다.

성벽은 남고북저의 지형을 따라 쌓았는데, 남쪽 봉우리 정상부와 북쪽 벽의 안쪽에는 평탄한 땅이 자리한다.

서북 쪽은 남한강에 접한 가파른 절벽이며, 동쪽과 남쪽 성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쌓아 올렸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이 신라가 쳐들어오자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이름 불렸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석축산성의 축성 방법이 확인되었고, 신라 토기 등도 출토되어 신라시대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온달산성의 축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 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523척, 높이 11척의 석축성으로 우물이 1개소 있다.’고 하였다.

《여지도서》 에는 “온달이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기 위해 축조하였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을아조’는 단양군 영춘(永春)의 옛 지명인 ‘을아단(乙阿旦)’으로, 《삼국사기》에서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유시(流矢)에 맞아 사 망하였다.’고 한 내용과도 관련된다.

하지만 아단성을 서울특별시 아차산성 (阿且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의 〈고성기(古城記)〉에 온달산성 축조 관련 일화는 다음과 같다.

굴 밖 산에 올라 서남쪽으로 가다가  5리가 되지 않은 거리에 고성 하나가 있다.

고성은 모두 석축이며 그 서남쪽은 무너져있었고, 동북쪽은 아직도 어렴풋이 새로 쌓은 듯 정밀하고 견고하다.

마치 갈고닦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성안에 옛 우물 하나 있는데, 오늘날 거의 무너졌다.

둘레는 1,333척이며, 높이는 11척이다.

성 안 작은 땅 하나도 모두 사람들의 경작지로 편입되어 호밀과 보리가 넘실거리고 있다.

나는 이 성이 어느 대에 처음 쌓였는지는 알 수 없다.

호서지방은 삼국시기에 고구려 땅이다.

남쪽으로는 신라에 변경하여 싸움이 그치지 않을 때 큰 고개를 한계로 하여 도처에 성곽을 쌓아 방비하였으니,

어찌 보면 그 당시에 창건한 것이 아닐까?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바보온달이 고구려 사위가 되어 스스로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겠다고 청하여

지키다가 전사하였다고 하니 온달이 축조한 것일까?

이 두 가지 설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 당시의 모든 일은 연기와 구름처럼 사라지고 그 엇비슷하게나마 알고자 하여도 알 수 없다.

홀로 한 터럭만 한 옛 성곽,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산 정상은 오가는 행인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이 고성을 가리키며 우러러 탄식하게 하니 천고 흥망에 대한 감개가 이를 뒤 잇는다.

이를 기록하여 영춘고사로 부치는 바이다.

 

다음은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서하집》, 3권의  '영춘현감 정치에게 주다'란 오언율시다.

 

(贈永春使君鄭治) 영춘현감 정치에게 주다

 

縣郭鳴山鳥  고을 성곽에 산새 우는데 

官廚飽野肴  관청 부엌에서 들 안주로 배부르구나

提封大小白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지역으로 

僻介濟羅交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에 외지게 끼어 있네 

福地宜深討  복된 땅은 깊이 찾아야 하니 

幽期莫浪拋  그윽한 기약 헛되이 저버리지 말게나 

臨分無限意  이별할 즈음 애틋한 마음 한이 없는데  

春色在梅梢  봄빛이 매화 가지에 깃들었구나 

 

                                          (출처_(사)자연유산보존협회 작성, 큰 강 유역 자연유산 명승자원조사(한강) )

 

 

 

 

 

 

ㅁ 온달산성(丹陽 溫達山城) 사적 제264호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下里) 산 67번지 일원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일명 성산성(城山城), 아단성(阿旦城)이라고도 불린다.

산성이 위치한 곳은 남쪽의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상류의 남안에 이르는 지점으로 소백산맥에서 분기한

산줄기가 북쪽으로 뻗어내려 한강에 드리운 마지막 봉우리에 해당하는 데,

북쪽의 남한강과 동쪽의 남천(南川)이 자연적인 해자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소백산맥 북쪽의 남한강 남안에 자리 잡은 점에서는 단양적성(丹陽 赤城, 사적 제265 호)과

입지양상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유적에서는 북쪽으로부터 남향하여 흐르는 남한강과 주변의 영춘면일대 조망이 매우 양호하다.

산성의 명칭은 고구려 평원왕대(平原王代)의 온달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오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축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찍이『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523척, 높이 11척의 석축성으로 우물이 1개소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언전(諺傳)’ 또는 ‘고노상전(古老相傳)’ 등의 전거를 통해 온달이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기 위해 축조한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을아조는 단양 영춘(永春)의 옛 지명인 ‘을아단(己阿旦)’을 뜻하는 것으로 『삼국사기』에서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유시(流矢)에 맞아 도중에 사망하였다는 내용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산성은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城山, 427m)의 정산 부근을 둘러싸며 약 682m에 걸쳐 축성된 반월형이다.

성내 시설물로는 동·남·북의 문지와 남·북 치성(雄城), 아물지, 수구 등의 시설이 남아있고,

이밖에 3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된다.

 

모든 문지는 입면이 凹형을 이루며 성안과 바깥의 높이 차이가 있어 현문(懸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문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처음 현문식으로 개설되어 암문(暗門)으로 사용되다 메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북치성은 성벽에서 직교하여 외부로 돌출시킨 벽체가 확인되며, 바깥쪽 하단에도 역시 보축이 남아 있다.

보축의 너비를 포 함하면 치성의 너비는 10.4m, 길이는 7.5m가 된다.

치성의 단면 또한 체성벽과 마찬가지로 80~85°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보축 높이까지 높이 8m에 이른다.

 

가장 바닥 층에서는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기와나 토기조각이 출토되었고,

그 위로는 경질토기와 대옹 편 등 9 세기 이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내에서는 기와·토기편들이 다량 수습되고 있다.

선조문, 격자문, 복합문, 무문 등 다양한 기와가 확인되는 데, 대부분 굵은 선조문이 찍힌 것이 주류를 이룬다.

비교적 이른 시기로 편년 될 수 있는 잔잔한 격자문이 시문 된 황갈색의 암키와편도 확인된다.

 

영춘면 오사리와 인접한 영월 태화산성(太華山城)은 온달산성에서 패한 온달을 위하여 누이동생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이 일대는 적성(赤城) 일대로 진출하고자 했던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또한 성벽의 축조 수법으로 보아도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기단 보축이나 수구의 형태로 보아 신라에 의해 수축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점을 감안하면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영월이나 정선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재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온달산성이 남한강변에 위치하여 수운을 통제할 수 있고, 육로로는 영월, 단양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므로 고구려나 신라 양측이 모두 남진과 북진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지역이기 때문이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편집) 

 

 

이곳에 사용된 대부분의 석회암 석재는 비바람에 약해 이렇게 침식된 모습이 보인다.

단면의 틈이 녹아내리며 종잇조각처럼 얇게 바스러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석회석은 얇게 쪼개지는 성질이 있어 단단한 화강암보다 다루기가 쉬웠나 보다.

비교적 얇게 다듬은 돌로 쌓은 석축이라 조밀한 느낌이다.

 

앞서 설명한 凹형 남문의 현문(懸門) 방식이다.

들어가는 입구엔 현대식 나무 데크가 놓였지만,

전시에는 밧줄로 묶은 사다리를 필요에 따라 설치하거나 치웠을 것이다.

 

안에 들어와서 보는 남문

 

남문 안쪽에서 바라보는 서성벽

 

성 안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보인다.

성벽을 쌓고, 안쪽에는 이곳의 흙은 메꾸며 이런 평탄지가 생겼을 것이다.

 

 

ㅁ 석환 (石丸, 돌 폭탄)  단양 온달산성(사적 264호)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진행된 학술발굴조사 과정에서 성벽 안쪽을 따라 무더기 출토되었다.
지름이 10~20cm와 30~50cm 정도 크기의 둥근 강돌로 성 밖에서 옮겨 온 것으로 보이며, 

성을 방어하기 위해 투석전(돌을 던지며 다투는 싸움)을 벌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

 

 

성벽 어느 곳이든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지만,

이렇게 오를 수 있는 나무 사다리가 놓인 걸 보면 비공식으로 올라가도 된다는 의미다.

 

서성벽에 올라가 바라보는 남문 방향

 

서성벽은 이내 북성벽과 연결되며 고도를 높인다.

밖의 성벽은 대개 8m 이상으로 성벽이 높다.

 

서성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이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성벽을 기어오르는 모습과 닮았다.

사방에서 소리치는 치열한 전투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왼쪽 동문과 오른쪽 남문 사이는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짧은 거리다.

남문과 가까운 동벽의 회절부는 치성의 역할도 함께하듯 밖으로 돌출되었다.

 

 

 

소나무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온달산성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렇게 멋진 산성에서 창칼로 서로를 찌르며 피 튀기는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전쟁은 외교로 해결할 수 없는 걸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뺏는 과정이다.

 

 

 

그날의 처절한 외침과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희생이 노란 씀바귀 꽃으로 승화한 듯 성벽을 쓸쓸하게 물들인다.

 

서문 안쪽에 쉴 수 있는 누각이 설치되었다.

예전엔 온달관광지 입장료를 내야 온달산성으로 오를 수 있다는 안내문을 봤다.

이제 온달산성은 입장료와 상관없이 누구나 오를 수 있다.

그때 이 누각을 지었겠단 생각이 든다.

 

 

 

서성벽 안쪽엔 최근에 주변에서 파낸 석환을 제법 많이 배치했다.

단양은 남한강의 수량이 제법 많이 흐르는 곳으로 이렇게 큰 돌도 물결이 깎이고 

다듬어져 둥글둥글한 공 모양으로 변했다.

돌 폭탄으로 쓰기 좋은 모양이다.

 

서문 방향에서 바라보는 동문

 

 

 

서문과 북문 사이의 성벽 일부가 무너진 곳이다.

남아 있는 성벽의 돌은 얇고 거친 원형을 보여준다.

 

무너진 성벽 옆으로 잘 복원된 성벽이 서로 연결 짓지 못하고 이렇게 계단식으로 끝났다.

언젠가 복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곳을 통해 성밖으로 나가 서문의 출구의 현문은 어떤 식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서문 밖에서 보는 현문이다.

앞서 남문으로 들어올 때 보던 현문보다 더 높아 가장 낮은 우측은 250cm 정도이고,

왼쪽의 높이는 거의 350~400cm에 육박하는 높이다.

적은 병사로도 이곳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견고하고 험준한 산성이다.

 

 

 

성벽 색상의 차이로 복원 구간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북문은 소백산자락길과 연결되어 있다.

 

밖에서 보는 북문의 치성?이다.

일부만 남은 성벽도 곧 무너질 듯 여러 갈래로 균열이 생긴 걸 볼 수 있다.

남은 이 성벽만이라도 무너지지 않게 복원되면 좋겠다.

 

동문으로 이어지는 북문도 이렇게 미완성인 채로 복원되었다.

 

건너편 산 구릉 

 

 

 

온달산성을 한 바퀴 돈다고 해 봐야 겨우 680여 m에 불과하다.

아름다움에 비해 규모가 너무 작은 데 놀라지만, 삼국시대에 물고 물리는 치열한 접전지역이었다.

 

소나무 그늘 아래 고정된 의자가 이제 이곳은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닌 휴식 공간임을 알려준다.

 

돌출되어 보이던 동문과 남문을 잇던 모서리도 이곳에서 부드럽게 보인다.

 

 

 

동문에도 치성을 설치해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 밖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동문은 성밖과 그대로 노출된 취약지구다.

이곳에 누각을 짓고 견고한 문을 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야 비교적 방어에 유리한 이점을 얻을 수 있다.

 

 

 

 

 

동문에 설치된 치성이 도드라지게 밖으로 돌출됐다.

저 치성은 북쪽과 남쪽 성벽으로 오르려는 적군에게 화살을 쏘며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

치성의 효과가 엄중한 곳이다.

 

 

 

 

 

남문과 연결되어 돌아가는 자연적인 성벽 위에서 찍은 풍경이다.

이 산성을 지키는 부대가 이곳을 자신들을 위한 전쟁터로 만들고 적군과 싸우던 곳이다.

우물이 있었다고 하니 음식을 만들며 얼마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워낙 작은 성이라 단기전으로 승리를 이끌지 못하면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산성에서 보는 온달관광지

 

 

 

 

 

동문으로 빠져나오며 온달산성 탐방을 마무리한다.

 

 

 

남성벽에 마련된 출수구

 

최근 복원된 것으로 보이는 치성은 서양의 요새화된 성벽을 보는 느낌이다.

너무 작위적이란 생각이 든다.

 

 

 

온달산성 탐방을 마치고 온달관광지로 내려왔다.

담장에는 용무늬 동판을 군데군데 설치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온달 장군인지 신라 장군인지 모른다.

남한강을 배경으로 산 위 산성에서 호령하는 장군의 기상을 담아냈다.

 

 

작지만 지역 형세에 어울리는 험준한 온달산성을 탐방했다.

온달 장군과 관련이 있다면 1,400여 년 전의 역사와 함께한 것이다.

자연부락에서 씨족, 부족 국가로 넘어오고 끝내 나라가 세워지며 여러 국가가 명멸했다.

이후 통일된 나라로 유지하다가 후삼국으로 갈라지고 다시 합치는 과정을 밟았다.

우리끼리 또 외세와 싸우면서 단단해졌지만, 지금은 또 둘이 되었으니 언제 통일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