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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밀양읍성도 밀양 아리랑만큼 유명해

by 즐풍 2023. 6. 3.

2023_79

 

 

 

2023.5.9. (화) 영남알프스 가지산 운문산 등산 후 오후에 탐방

 

 

영남알프스 이틀째 산행은 가지산과 운문산을 각각 별도로 등산했다.

두 산을 연계하기 위해 운문사에서 시작하면 너무 멀어 운문사를 기점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반대편인 상양마을에서 시작하면 능선 전체를 왕복해야 해 무척이나 지루하고 운동량도 많다.

하여 석남터널에서 가지산을, 상양마을에서 운문산을 각각 정상만 왕복하는 것으로 부담을 줄였다.

 

이렇게 두 산을 어렵지 않게 산행을 끝내고 밀양으로 들어왔다.

지역 명산을 탐방할 때 최근 새삼스럽게 관심을 갖는 산성이나 읍성이 있으면 함께 탐방하려 한다.

밀양에는 밀양읍성과 영남루, 월연정을 탐방할 생각에 들어섰다. 

산성 주차장에 들어서는 데 도로 위로 복원한 동문이 막 포장지를 벗겨낸 신상품처럼 보인다.

 

복원된 동문은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높고 크게 지었다.

석재를 기계로 갈아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이 잘 쌓았는데,

그냥 옛날 성루처럼 망치로 돌을 다듬고 지었으면 더 고풍스러웠을 텐데...

조선시대에 동문에 걸었을 편액의 글자를 확인해 다시 걸어야 한다.

 

 

 

ㅁ 밀양읍성(密陽邑城)

경남기념물 제167호


밀양읍성은 성종 10년(1479)에 주민과 행정기관을 보호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고을 주위에 쌓은 성이다. 

밀양읍성은 산성으로 관아 동쪽의 아동산과 북쪽의 아북산, 남쪽과 서쪽의 낮은 평지를 이어 쌓은 산성이다. 

밀양읍성을 휘감아 흐르는 밀양강을 해자垓子 삼아 성의 방어력을 크게 높였다. 

동북쪽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하고 서남쪽의 평지에 성벽을 쌓은 밀양읍성의 규모는 길이 2.1km,

높이 2.7m였다고 하며,

성안에는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많은 관아와 연못 1개, 우물 4개가 있었다고 한다.

16세기 중엽 이경홍이 그린 「밀양십이경도密陽十二景圖에는 밀양읍성의 전체 형태와 성벽은 물론 관아와

영남루, 민가의 초가까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성벽이 무너졌으나 그 후 고쳐 쌓았다.
조선 후기 밀양읍성의 동서남북 네 곳에는 성문이 있었으며, 성문은 청도, 서울, 경주, 창녕, 경주, 동래 등지로

통하는 주요 길을 향해 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성문인 남문 위에는 앞면이 3칸인 중층의 웅장한 공해루가 있었고, 서문에도 앞면이 3칸인

중층의 문루門樓*를 지어 위엄이 있었다.

이에 비해 동문과 북문은 규모도 작고 소박했다.


밀양읍성은 근대 이후 일제의 침략과 전란을 겪으면서 파괴되었다. 

1902년의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와 1934년의 교량 건설 공사 때 읍성의 성벽을 헐고 그 돌을 공사에 이용했다.

1937년에 아북산 북쪽에 묻힌 납석蠟石*을 캐내면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성벽을 헐었으며,

1950년 6 • 25 때는 아동산 등에 방어 진지를 만들면서 성벽을 파괴했다.

지금은 아동산의 산등성이와 동문 주변에 복원한 성벽이 남아 있고,

성 안에는 영남루와 복원한 밀양 관아가 자리 잡고 있다.
밀양읍성은 조상들의 호국 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조선 시대의 성 쌓는 제도와 기술을 잘 보여 준다. 

2000년 이후 밀양시가 밀양읍성 복원 정비 공사를 추진하여 성벽 일부와 사라진 동문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해자(垓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문루(門樓) : 대궐이나 성 따위의 문 위에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지은 집
*납석(蠟石) : 촉감이 매끈매끈하고 기름 같은 광택이 나는 광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안내문)

 

이 동문에서 북쪽으로 복원된 산성은 60여 m에 지나지 않고, 

동쪽으로는 아동산 정상에 무봉대를 지나 무봉사 직전에서 끝나 390여 m 정도밖에 안 된다.

시내를 통과한 밀양읍성은 이제 모두 사라져 복원할 공간이 없다.

다만, 아북산을 통과하는 구간의 읍성은 복원이 가능하다.

 

 

밀양읍성은 조선 초기인 1479년(성종 10)에 축조되었으나 1902년에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파괴되었으니

공식적으로 읍성 철거령이 내린 1910년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왜놈들은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 될만한 읍성을 철도 개설이나 도로를 깐다는 핑계로 무자비하게 철거했다.

 

 

동문에서 무봉대로 올라가는 구간의 중간 지점에 있는 치성이다.

동문까지는 직선이고, 무봉대까지는 완만한 곡선이라 이 즈음에 치성이 필요한 곳이다.

치성은 동문과 무봉대까지의 바깥쪽 성벽을 경계하고 공격할 수 있는 곳이다.

 

치성에서 바라보는 무봉대 방향

 

 

 

밀양읍성은 이름만 읍성이지 반쪽은 산성이다.

성벽 끝으로 보이는 북쪽은 아북산(118.6m)이고, 뒤로 조금 더 오르면 아동산(88.1m)이다.

산이 아니어도 마을에서 보면 제법 높게 보이니 산성의 기능도 있다.

밀양읍성 안에 관아가 있었기에 관아(官衙)가 있다 보니 북쪽에 있는 산은 아북산衙北山,

동쪽은 아동산衙東山이란 이름이 붙었다.

 

가까워진 무봉대

 

동문을 지나 위쪽에 보이는 건물은 밀양여고 교사이다.

숲 속에 학교가 있어 맑은 공기를 마셔 머리가 상쾌하겠다.

 

 

 

 

 

 

밀양읍성(密陽邑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167호로 밀양시 내일동에 위치한다.

밀양읍성의 북쪽에 위치하는 아북산(衙北山)과 아동산(衙東山)을 연결하는 밀양읍성이 읍내로 연결된다.

밀양은 해안지방에서 내륙으로 통행하는 육로상의 거점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이래 한양과 동래를 잇는 최단거리 코스인 영남대로(총연장 380km) 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 때문에 밀양은 교통상의 요충지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밀양읍성의 전체 평면형태는 제형이며 아동산, 아북산 등의 구릉과 선상지, 저위면 등의 평탄 지를 포괄하는

평산성으로 축조되었다.

한편 기록에 보이는 밀양읍성의 둘레는 4,670척, 높이 9척에 둘레 1,457m, 높이 280m로, 현재의 잔존 높이

271~288cm와 거의 유사하다.
밀양읍성은 고종 39년(1902)에 사대문과 그 주변의 성벽은 완전히 헐렸다.

일제강점기 때 철도 부설과 도로 개설을 핑계로 밀양읍성을 파괴한 것이다.


밀양읍성은 문종 원년(1451년)에 도체찰사 정분의 보고에 의해 처음으로 개축이 논의되고 성종 10년(1479)

10월에 석성으로 축조가 완료된 것으로 둘레가 4,670척 높이 9척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외 문지의 경우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서 「유동서남삼문(有東西南三門)」이라 하여 19세기 초까지

밀양읍성에는 동·서·남의 세 성문이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선조 39년(1606) 경부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아사(衙舍)를 복원하고 성내의 크고 작은 관자(館字)를

차례로 재건하였으나 대대적인 복원이 아니라 부분적 보수에 그쳤다.
2002년 1월 10일부터 두 달에 걸쳐 밀양읍성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읍성의 축조 방법이 확인되었다.

밀양읍성 체성부의 계단상으로 조성한 기반암의 전체적인 횡단면은 제형을 이룬다.

횡단면의 하단폭은 12.49m 이상이고 상면폭은 약 9.8m에 이른다. 


밀양읍성의 동쪽과 남쪽을 끼고 남천강이 흐르고 있어 남천강이 자연적인 해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서쪽 부분의 체성부 외곽에 인공적인 해자를 팠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이 개천을 해천이라 부른다.
밀양읍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 자기류, 경질토기, 석기 및 석박 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기와류는, 대부분이 무문양 암기와이고, 자기는 황록색의 색조를 가진 청자 1점이 확인되었으며,

분청사기와 백자 편이 대부분이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편집)

 

 

밀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은 성 바깥이 절벽을 이루며,

절벽 아래의 남천강은 방어시설인 해자(垓子)를 대신하였고, 이곳에서는 지금도 남천강을 해천(垓川)이라고 부른다.

 

 

 

무봉대舞鳳臺는 말 그대로 산속이라 봉황이 춤춘다는 뜻인데,

산세가 그런지 밀양의 앞날에 그런 서기가 서린다는 건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곳에 무봉대가 설치된 건 동성벽과 북성벽을 관할하는 일종의 장대라 생각한다.

장대는 북한산성, 남한산성, 수원화성 등 큰 성벽에 대부분 설치됐다.

유사시 장군이 지휘본부로 사용하는 곳이다.

동쪽에 있으니 동장대인 셈이다.

 

 

 

 

 

동성벽은 이곳에서 끝난다.

조금 더 내려가면 무봉사 사찰과 만나므로 여기서 끊었다.

한 칸 더 내려가면 영남루 경내로 들어가게 되는 데, 영남루 담장이 성벽의 역할을 하겠다.

 

성벽이 짧아 너무 싱겁게 끝나므로 성밖을 한 번 더 살펴봐야겠다.

 

성 안과 달리 밖에서 보면 성벽이 제법 높아 오르기가 애매하다.

다른 사람 어깨를 딛어야 겨우 오를 수 있겠다.

 

 

 

봉황이 춤춘다는 무봉대 누각

 

 

 

마침 선생님이 학생들과 이곳에서 현장학습을 하시길래

밀양읍성이 이곳 말고 다른 곳에도 있냐고 물으니 없다고 한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사실상 읍성 탐방은 끝나는 셈이다.

 

 

 

 

 

치성 옆으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계단을 설치했다.

 

밖에서 보는 치성의 형태

 

 

 

 

영남알프스 8봉 인증 때문에 계획에 없던 밀양읍성을 탐방했다.

이어서 영남루와 월연정 탐방에 나섰다.

각각 별개로 포스팅할 예정이나 워낙 정리할 게 많아 한참 뒤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