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80
2023.5.31. (수) 오전에 탐방
오전에 잠깐 흐리고 오후에 맑겠다는 예보를 믿고 호암산과 삼성산 연계 산행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지난번 호암산성을 보려고 왔을 땐 제대로 성벽을 찾지 못했다.
이번엔 성벽을 밖에서 찾아내겠단 굳은 생각을 갖고 호암산을 오른다.
한다면 하는 즐풍이니 반드시 찾아내고 말리라.
호암산성 둘레길
호암산을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들머리를 찾다 보니 서울 금천구의 벽산아파트 5단지 정류장이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환승해 정류장에 내리니 산으로 오르는 무장애길과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있다.
도로 특성상 건널목을 설치할 수 없어 지하통로를 이용하는 출입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것이다.
이렇게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산을 오르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서울 호암산성 안내도
서울 호암산성 (서울 虎巖山城)
호암산성은 산마루를 둘러쌓은 통일신라시대의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1,250m이며,
그중 약 300m 구간에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우물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天井)'이라는 뜻으로 호암산성 안에 있는 2기의 연못 중 하나이다.
발굴조사에서 연못 2개·건물지 4개가 확인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의 한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이고, 그 아래의 신라시대 석출지도 확인되었다.
다른 우물지에서는 ‘잉벌내력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이 있는 청동숟가락이 나왔다.
우물지 근처에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수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서울에 화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우물 근처에서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 지라고 불려진 것이라고 보인다.
(출처_문화재청)
들머리에서 얼마 오르지 않으면 서문지로 추정되는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이 산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처럼 보이지만 옆에 설치된 나무데크로 오른다.
서문지를 지나면 곧 불영사를 만난다.
밖에 있던 호랑이 무늬를 가진 개가 젖이 불어 늘어진 걸 보니 새끼를 낳은 거 같다.
가까이 가자 사찰로 들어간다.
사찰의 텃밭에 핀 어느 나물꽃이 예쁘다.
이 꽃엔 나비가 사뿐히 앉고...
돌나물 꽃
한우물(제1우물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天井)이라는 뜻으로 서울 호암산성 안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길이 17.8m, 너비 13.6m, 깊이 2.5m의 규모로 만들었으며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길이 22m, 너비 12m 깊이 1.2m의 규모로 증축하였다.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동일신라 시기의 것이며, 1991년 2자 보수정비공사에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두 시기의 연지를 함께 복원하였다.
문무왕 때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왜군과 전투를 하면서 이 우물을 군용수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조선시대 건국 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이라는 설도 있으며 가물 때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벽 상단에서 석구지(石狗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뒤집힌 채로 발견되었다.
(출처_문화재청)
불영사가 바로 옆에 있으니 부처님 오신날에 즈음하여 연등을 단 게 보기 좋다.
한우물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호암산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안내지도엔 이곳이 북문 추정 지라고 하는 데, 밖으로 나가면 이렇게 산성 흔적이 보인다.
이제 산성을 제대로 찾은 느낌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이라니 대략 1,300여 년이 지났다.
오랜 세월 비바람이 무너지고 주저앉아 산성은 이런 모습으로 변했다.
석구상
석구상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경기읍지(京畿邑誌)」 의 「시흥읍지」에 있다.
호암이라는 바위가 현의 진산인 금지산(금주산, 지금의 호암산)에 있는데,
그 모양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닮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삼을 때 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위의 북쪽에 돌로 만든 사자를 묻고 남쪽에는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고 전한다.
과거에 해태상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그 형태가 개에 가깝다고 하여 석구상이라고 부른다.
또 1990년 제1우물지 발굴조사 당시 조선시대 건축물에서 석구지(石狗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확인되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0m가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안내문)
돌로 만들었다는 개는 석구란 이름으로 이렇게 거창하게 모셨는데, 사자상은 어디에 묻힌 걸까?
서울 호암산성(虎岩山城)
지정번호 : 사적 343호 / 시대 : 통일신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통 산 93-2번지 등
금천구의 주산인 호암산(347m)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 1,547m 면적 133,790㎡이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건축하여 군사적 전략 거점 및 행정 치소(기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서측에서 보면 소래와 남양만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지리적으로 육로와 해로를 방어하고,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서해 연안과 한강수로, 내륙 교통로의 중간 지점인 한강이남 중심에 있어 삼국시대 양천고성·행주산성·
오두산성을 잇는 거점 성곽이었다.
당시 한강 유역의 18개 신라 산성 가운데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등에 이어 네 번째로 길었다.
고려시대에는 한강 수로를 통한 중국 무역의 경유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군대가 주문했다고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서남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며, 축조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을 채우는 내탁법 (內託法)을 사용했다.
현재 동벽의 북쪽 성벽이 잘 드러나 있으며, 원형을 포함해 남아 있는 성벽은 1,016m이다.
산성 내의 시설로는 한우물(지1우물지)과 제2우물지, 건물지 터, 석구상이 있으며 많은 기와와
청동순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호암산성에서 가장 성벽의 상태가 좋은 곳이다.
임진왜란 때 잠시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지만, 성벽을 증개축한 거로 보이지 않는다.
산성에 남은 성벽은 조금씩 남아 있고 상태도 별로 좋지 않다.
그러니 호암산성은 다른 산성과 달리 통일신라 때 쌓은 산성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전쟁이 잦았던 공주 공산성은 백제문화 유적지의 중심이지만, 산성은 이후 국가에서도 계속
보수와 복원을 거듭해 현재 남아 있는 산성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대외적으로 내세우기는 백제의 것이나 드러 난 성벽 대부분의 조선시대에 고쳐 쌓은 것이다.
이와 달리 호암산성은 통일신라 때 만든 게 온전히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 철기문화가 들어온 건 넓게 잡으면 기원전 7세기 전후라고 한다.
이후 통일신라에서 이 호암산성을 만들 때 철기문화는 1,500여 년이나 이어진 것이다.
이젠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해 산에서도 돌을 다듬어 이렇게 산성을 쌓았다.
통일신라 때 서울의 많고 많은 산 중에 왜 하필이면 가까운 삼성산이나 관악산도 아니고 이 호암산일까?
비밀은 바로 동쪽 산비탈에 있는 이런 암벽을 이용한 자연 성벽 때문이 아닐까.
굳이 성벽을 쌓지 않아도 높고 가파른 이런 바위나 암벽이 산성 역할을 대신 한다.
이렇게 바위가 많은 곳이라면 적군은 위험을 감수하며 뚫을 수 없으니 비교적 쉬운 곳으로 공격할 것이다.
이런 곳은 보초 몇 명만 새우면 된다.
나머지 병사는 들어올 만한 곳에서 기다리다가 격퇴하면 된다.
그러니 이런 곳은 승리를 정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르는 장소이다.
이곳은 양쪽의 바위 공간이 제법 넓다.
그렇기에 취약한 것을 알고 산성을 쌓았으나 세월이 감에 따라 무너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암벽 연습장인 암장이다.
여기 말고도 주변에 몇몇 개의 암장이 있다.
당시엔 지금처럼 성능 좋은 등산화는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다.
좋은 신발이 있을 리 없으니 겨울이 아니면 맨발인 병사도 많았겠다.
동물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었다면 가장 좋은 신발이다.
맨발로 또는 허접한 신발로 이런 곳을 오를 순 없다.
산성 자리로는 최상의 지역이다.
20~30m 정도로 높은 바위 절벽이다.
얼마니 훌륭한 자리인가?
바위 구간을 지나 올라오니 어느 바위를 비석 삼아 묘를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산소는 거의 무너져 평장 상태이고 "천안김공상태지묘"란 묘비명만 남았다.
많은 김씨 중에 천안 김씨가 있다는 걸 처음 아는 순간이다.
바위 구간은 동성벽의 대부분이라 할 만큼 제법 길게 이어진다.
자연성벽이 성벽을 쌓는 수고로움을 덜어준 곳이다.
호암산성 남쪽 끝단의 남문 추정지에 있던 상성이 무너진 돌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돌이 남문 터에서 흐트러진 것이라면 남문은 제법 높게 만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문 터를 둘러싼 성벽에도 돌은 질서 없이 흐트러졌다.
남문터는 사방으로 돌이 흩어진 돌이 호암산성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남문을 받치는 성벽에 쌓은 돌이 멀쩡히 살아 있는 곳이다.
호암산성에 막 올라온 사람들이 잠시 돌을 의자 삼아 쉬고 있다.
남문 인근에 있는 왼쪽 성벽 안쪽에 참호인 듯싶은 구덩이가 길게 연결된다.
호암산성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다.
신랑각시바위 (사랑바위)
옛날 호암산 아랫마을에 믿음직한 총각과 어여쁜 낭자가 한마을에 살면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양숙으로 지낸 두 부모들은 이들의 관계를 반대하고 다른 사람과 혼인을 시키려 했다.
낭자는 부모님의 심한 반대를 못 이기고 깊은 밤을 틈타 집을 뛰쳐나와 산에 올라 목숨을 끊으려 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총각은 사랑하는 낭자를 찾으려 칠흑같이 어두운 산을 헤맨다.
그러던 중 산 중턱 절벽 위에 홀로 서서 세상을 하직하겠노라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낭자를 발견한다.
스산한 바람과 달빛에 비치는 절벽, 그 앞에서 만난 이들은 손을 맞잡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며 달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의 기도를 올리며 밤을 지새운다.
절절하고 애절한 이 연인의 사연은 마침내 달님에게 전달되었다.
달님은 진실된 이들의 사랑에 감동받아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마주 보며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 주었다.
이후, 산 아랫마을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아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면 옥동자를 점지해 주었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하는
행복한 가정을 성원해 주었다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안내문)
어느덧 신랑신부바위가 있는 전망대를 지나 다른 장소에서 보니 바위가 사람 형상이다.
이런 사람 모양의 바위가 두 개라 신랑신부바위란 이름을 지어주고 스토리텔링을 만든 것이다.
신랑신부바위 뒤에서 보니 벽산 5단지 아파트는 호암산 숲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이곳에 사는 주민은 창문만 바라보면 계절의 변화를 매일 느끼겠다.
신랑신부바위 쪽으로 드나드는 곳에도 산성으로 쌓은 돌이 보인다.
지난번에 호암산성의 실태를 거의 찾지 못했으나 이번엔 완벽히 찾아냈다.
통일신라시대 때 처음 쌓은 상태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에 이곳에 군대가 주둔했다고 한다.
신라 때 만든 한우물을 그때 한 번 더 정비했을 뿐 산성엔 손을 대지 않은 거 같다.
그러니 호암산성은 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규모는 작아도 병사 한 명이 적군 일당백을 감당한 천혜의 요새인 것이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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