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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작아도 큰 역할을 한 여주 파사성

by 즐풍 2023. 6. 5.

2023-82

 

 

 

2023.5.17.(수)  오전에 잠시 탐방

 

 

어제 설악산 귀때기청의 털진달래를 보려고 서북능선을 걸었다.

악명 높은 귀때기청봉의 털진달래에 반해 앞으로 산방이 끝나고 열리는 첫날 매년 찾을 생각이다.

산행을 끝내고 설악산탐방원에 들려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의 인증이 끝났기에 인증서 신청을 했다.

이어서 홍천의 아미산을 타려던 계획은 시간이 부족해 바로 여주로 넘어왔다.

 

여주에서 1박 하고 아침에 천서리 막국수촌과 가까운 파사성을 오른다.

제법 이른 아침인데도 간편한 차림으로 두세 분이 마실 다니듯 가볍게 다녀 가신다.

이곳 주민들은 역세권이니 뭐니 다 필요 없고 남들 느끼지 못하는 산성권에 산다.

산은 나지막해도 파사성 정상까지 올라가 산성을 한 바퀴 돌면 약 2.2km를 걸어야 하니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ㅁ 여주 파사성  (婆娑城)  국가 사적 제251호


여주 파사성은 남한강 동쪽에 있는 해발 230.4m의 파사산 꼭대기에  돌로 쌓은 성이다.

이곳은 한강의 수상 교통과 중부 내륙의 육상 교통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포대교 주변의 넓은 한강 유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성의 둘레는 1,800m이고 최대 높이는 약 6.5m로 규모가 큰 편이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일부 구간은 최근에 복원했다.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주요 지점에는 치*와 포루** 터가 있으며, 동문과 남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남문터에서는 문루의 팔각 주춧돌과 불에 탄 성문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안에서는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 여러 시기의 건물터가 확인되어 파사성이 오랜 기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80~112 제위)이 쌓았다고 전해지지만 당시 이 지역은 백제 영역에 속하였으므로

유사한 이름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한 결과 성안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성벽의 쌓기 방식, 성문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파사성은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파사성은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군 총섭 의엄이 승군을 동원하여 1592년(선조 25)부터

3년에 걸쳐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전체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남아 있는 성벽의 대부분은 조선 시대에 다시 쌓은 것이며,

처음 쌓은 성벽은 성벽 하단부와 조선 시대 성벽 안쪽에서 일부 확인된다.
파사성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아름다워 고려 말의 이색과 조선 증기의 유성룡이 시로 남기기도 했다.
*치: 성을 방어할 수 있도록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타원형으로 쌓은 성. 곡성이라고도 함.
**포루: 성벽 밖으로 각지게 돌출시켜 전쟁한 때 포를 쏘거나 망을 보았던 조선 시대의 방어 시설들.

                                                                                                                          (안내문)

 

 

남문 지를 들어가면서 왼쪽은 복원공사를 마쳤고, 오른쪽 일부는 복수공사 중이다.

올 11월 3일까지 보수를 마치겠단 안내문이 보인다.

 

 

문루 입구에 있는 팔각 주춧돌 위에 개거식 문루를 설치했다.

잠시 후 안내 그림을 보게 된다.

 

남문지 우측에 보수공사 중인 구간

 

남문에 있던 문루의 상상도이다.

양쪽에 기둥이 절반인 곳은 성벽 위에 올리고 가운데는 문이다.

이런 문루를 개거식이라고 한다.

이 그림 가운데 그림 뒤쪽에 주춧돌이 놓인 걸 볼 수 있다.

 

좀 더 멀리서 본 남문지 

 

녹색으로 변하는 참나무가 시원한 게 보기 좋다.

 

산성 위는 평탄하게 잘 깔아 거든 데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성벽은 사진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대략 4~5m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제일 높은 곳은 6.5m라고 하니 성벽으로는 만점이다.

 

 

 

파사성 주변에 흩어진 기와조각을 한 군데 쌓아놓았다.

문루와 식량 창고, 병장기 창고, 지휘본부 등이 있었겠다.

 

위로 오르는 계단형 성벽이다.

 

복원된 구간과 원래의 성벽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구간이다.

오래된 성벽도 제법 높게 축조되었다.

 

성벽 안쪽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된 통로

 

 

 

바로 아래는 이포대교가 놓였지만 보이지 않는다.

이 남한강을 우측으로 돌면 양평읍을 지나는 구간이다.

 

파사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성벽 구간

 

 

 

계단으로 한 칸 한 칸 오르게 되는 서성벽이다.

 

 

 

파사성과 가까운 여주·이천 지역은 예로부터 벌판이 많아 이 지역의 식량창고 역할을 했다.

이곳을 차지하는 나라가 창고를 두둑이 채울 수 있으니 어느 나라든 차지하는 국가가 강성해진다.

 

산세가 뱀이 기어가듯 이리저리 생긴 대로 성벽도 몸을 튼다.

이렇게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성이 방어에 훨씬 유리하다.

 

아침 햇살을 받은 보라색 붓꽃이 청초하게 느껴진다.

 

파사산 정상을 돌아가는 북쪽 치(성)인 셈이다.

이 치 위에 노각을 짓고 포를 쏠 수 있게 만들었다.

여기서 짧게 꺾어지며 이제부터 동성벽이 된다.

 

안내문을 보면 삼국시대에 신라가 처음 쌓고, 임진왜란 때 대대적으로 보수했다고 한다.

 

밖에서 보는 치

 

 

파사성은 파사산의 정상부에 축조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936.5m이고

내부면적은 약 3,966.9㎡이라고 한국고고학전문사전에서는 밝히고 있다.

서두에 게시한 산성 안내문에는 둘레가 1,800m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 둘레는 936.5m가 맞다.

파사성을 돌 때 가동한 줄 알았던 등산앱이 꺼져 있어 객관적인 증빙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직접 돌아본 결과, 성의 둘레는 1km가 안 되는 작은 성이다.

 

이곳이 치에서 바라본 파사산 정상이다.

 

치에서 내려가는 동성벽 구간

 

 

 

동성벽으로 내려가며 뒤돌아 본 북쪽

 

동성벽 중간에서 바로 정상으로 오르는 구간이다.

 

파사성은 사방 어느 곳이든 성벽은 이 정도로 높다.

대부분 복원됐다고 하지만 성벽은 제기능을 온전히 다 했을 것이다.

 

옛날 성벽이 남은 곳도 제법 잘 쌓았다.

 

 

성내부에서는 동벽과 서벽 주변의 건물지가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주거지 2기, 구들 23기,건물지 4기,

저장공 1기 및 축대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장방형 주거지와 백제주거지가 1기씩으로, 이중 백제 주거지는 한강이 조망되는

구릉의 암반을 파고 수혈식으로 만들어졌다.

성내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확인된 유구는 구들로서 총 23기가 확인되었다. 

구들은 방형 혹은 세장방형으로 굄돌 위에 장방형의 면석을 구들장으로 사용한 구조로 석재로 만든

연도부에 기와 혹은 토기로 보강한 것도 있다.

유구에 따라 고려자기와 조선백자 편이 출토되어 축조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는 4기 중 2기가 2칸 규모의 소형이며,1기는 규모가 확인되지 않았다. 

또 다른 건물지는 15 x 5m의 크기로 동문지 안쪽에 위치한다.

건물지의 기단 석렬은 동서로 긴 형태로 북쪽과 서쪽이 남아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사전, 성곽·봉수편에서)

동성벽 안쪽의 이 공터에 건물이 있었단 말씀

 

파사성을 한 바퀴 돌아 남문터로 나왔다.

 

 

대한민국이 좁은 땅덩어리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싸우던 시기에 처음 만든 파사성이다.

이 성을 근거로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기 위해 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며 보수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지키는 요충지이자 남북 교통의 중심지를 사수하게 된다.

작은 성이지만 그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큰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