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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조선의 해군 기지인 보령의 충청수영성 탐방

by 즐풍 2023. 6. 21.

2023_101

 

 

2023.6.18. (일)  오후에 잠시 들림 1.9km, 52분 탐방

 

 

국림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 시즌2 날인을 위해 태안해안 국립공원 기지포해변 방문했다.

수령한 여권에 날인하고 나니 태안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작년 6~7월에 두 달이나 살았으니 관광지를 대부분 한두 번씩 다 돌았기 때문이다.

최근 산성과 읍성을 관심 있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보령에도 수영성과 읍성이 많다.

이미 다녀오긴 했어도 오늘 한 번 더 기회를 만들어 충청수영성과 보령성곽을 둘러볼 생각이다.

충청수영성은 읍성이나 산성과 달리 오늘날로 치면 수군의 주둔을 위한 해군 기지인 셈이다.

 

 

수영성 탐방 코스

 

충청수영성 안내도

 

 

ㅁ 보령 충청수영성(保率 忠淸水營城)  사적 제501호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에 위치한 보령 충청수영성은 

충청도수군절도사영(忠淸道水軍節度使營)이 있었던 수영성(水營城)이다. 

중종 5년(1510)에 석성을 쌓았는데 성 둘레가 3,174척이고 높이가 11척이며 4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었다고 하며,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다.
충청수영성은 천수만으로 들어가는 포구에 해발 40m가량의 구릉상 야산이 연결되어 있는 곳으로써, 

오천항 동쪽과 남쪽의 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충청수영성의 길이는 약 1,650m로서 오천면 소재지를 감싸는 북동 능선과 남쪽 능선에 축조되었으며,

성의 평면은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다.

성의 가장 낮은 해안 쪽으로 서벽이 통과하며 서벽의 길이는 370m에 달하지만,

남반부는 시가지 조성으로 인하여 성벽은 지상에 남아 있지 않다.
서벽 북반부의 150m가량이 잔존해 있으며 서북 모서리에서 약 80m 지점에서 문이 남아있다. 

이 서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고도 불리며 치석 한 석재로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문 폭은 3m, 높이는 4m이지만 바닥이 많이 파인 상태로 기초석 축부가 60~80cm 정도 노출되었다. 
문의 상부 성벽은 붕괴되어 남아있지 않고 다만 홍예(紅銳) 부분만 간신히 남아 있다.

북벽은 길이가 370m로서 중간에 도로가 통과하면서 원상을 잃었으며, 북문지는 형적을 찾을 수 없다. 

북벽에서의 성벽 바깥의 높이는 4~5m이고, 성벽 안쪽의 높이는 1.5~2m의 토루 형태로 남아있다.
동벽은 280m가량의 길이로서 그 중간부에 동문지가 있다. 
동문지의 남쪽 성벽에 여장(女增)이 남아 있는 부분은 5m 내외이지만 여장의 높이는 90cm이다. 

성벽은 남쪽으로 약 120m 직선으로 축조되어 남벽과 만나며 모서리에서 치성(雉城)이 보인다. 
치성의 길이와 폭은 각 5m 내외이고 치성의 바깥쪽 8~10m 거리에 너비 4~5m의 해자가 조영 되었다.
남벽은 민가와 도로 등으로 인하여 50m 정도가 파괴되고 나머지 440m는 토루 형태로 남아있다.

남벽이 훼손된 곳에 남문인 진남문(鎭南門)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위치를 확인할 수없다.


성내에는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변루(待變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가 있었다. 

수군에 소속된 전선은 본영(本營), 속읍(屬邑), 속현(屬懸)을 합하여 92척, 진선(津船)은 40척이었고,

관원은 절도사, 우후(虞候) 각 1인이다.

성의 4대 문인 진남문(鎭南門), 만경문(萬頃門), 망화문(望華門), 한사문(漢舍門) 등이 모두 허물어지고

망화문 터만 겨우 홍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ㅁ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  사적 제501호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수영은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였으며, 

조운선의 보호와 안내 그리고 외적 방어 역할을 하다가 1896년 폐영되었다.
충청수영성은 1510년 수사 이장생이 돌로 쌓은 성이며, 

현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서문을 비롯하여 1,650m가 남아 있다.
북벽과 남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았고, 서벽은 바다와 편한 지점에 쌓았으며, 

서벽 앞은 유(U) 자 모양의 포구를 이루어 전형적인 조선 시대 수군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내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중 영보정은 천하 명승으로 알려져 조선 시대 유명 시인 묵객들이

방문하여 많은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충청수군은 임진왜란 때는 남해 바다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칠천량 해전 1597에서는 수사 최호가 통제사 원군과 연합하여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병자호란 1696 때는 수사 강진흔이 강화도 갑곶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등 국가 위기 시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다른 수영성 유적은 훼손되어 원래의 경관을 잃어버렸지만 

이곳 충청수영성은 지형과 함께 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다.  (안내문)

 

 

충청수영성 서문인 망화문(望華門)이다.

 

서문은 홍예문으로 상부를 돌렸고, 안쪽 돌에 문을 잠글 수 있게 홈이 파였다.

어쩌면 북한산의 대동문이나 대남문, 대서문처럼 위에 문루를 세웠는지도 모른다.

문루를 세웠다면 한층 더 늠름한 자태였겠다.

 

 

 

 

ㅁ 충청수영 진휼청 (忠淸水營 脤恤廳)  충남 문화재자료 제412호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객사와 삼문만이 남아 있다.
진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이 있다.
충청수영 고지도금  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

 

 

충청수영성은 옛날 해군기지라 바로 오천항 옆에 만들었다.

오천항은 서해바다이기는 하나 천수만 안쪽 강물과 만나는 곳에 있다.

천수만 밖은 태안의 안면도가 막고 있어 태풍의 피해와 사나운 조수, 불규칙한 안개 등에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다.

고려나 조선시대 때 호남에서 생산된 쌀을 조운선에 싣고 개성이나 한양으로 올라갈 때

태안 앞바다에서 파도에 쓸려 전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나 많은 세곡선이 전복되었던지 태안 앞바다에 쌀썩은여가 있다.

바위 암초에 전복돼 쌀이 썩어나갔다는 곳이다.

무역선도 많이 침몰돼 고려청자나 백자가 많이 발굴돼 태안에는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도 있다.

 

 

태안 앞바다에서 조운선의 피해가 많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운하공사를 다섯 번이나 시도했다.

장비가 부족한 시대라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결국 조선 인조 때 가로림만은 빼고 태안반도 중간에 운하를 뚫으며 안면도가 생겨났다.

그 운하 위에 안면대교가 설치되어 안면도가 섬이란 것도 모른 채 운전하며 지나간다.

충청수영성은 이런 배경 아래 보령의 오천항에 생기게 된 것이다.

사학자들은 이런 배경 설명 없이 수영성의 구조만 설명한다.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석성처럼 크고 견고하진 않지만 바닷가에 성을 쌓아 제법 근사하다.

 

충청수영성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단히 큰 규모이다.

 

영보정(永保亭)

 

영보정은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여 고쳐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 시대의 많은 묵객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남겼다.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수영이 폐지되면서 없어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영보정도(永保亭圖)가 전해온다.

                                                                                                                               (안내문)

 

조선초기 충청수영은 고만량(高巒梁)에 설치되었으나,

왜군의 침공을 직접적으로 받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 9) 충청수영을

오천(鰲川)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충청수영 이전 후 고만량에는 첨사, 만호 등을 수군 진장으로 두었으나, 이마저도 1460년(세조 6) 혁파되었다.

우후는 고만량만호가 혁파된 지 4년이 지난 시점에 충청수영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충청 수사를 보좌하기 위함이었다.

                                                                               (출처_해양문화재 제16호 발췌)

 

천수만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하다.

이곳도 조수간만의 차는 그대로 받고 있으나 사나운 조수는 피해 갈 수 있다.

 

 

 

옆에서 보는 영보정

 

610번 도로가 충청수영성을 가르듯 지나간다.

길을 건너 한결 더 높은 동북쪽 성벽으로 이동한다.

이곳엔 충청수영 내삼문과 공덕비가 즐비하게 서있다.

 

충청수영성의 장교청과 내삼문 사이에 현대 건물이 오천교회가 시대를 역행하며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부조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녹아든 느낌이다.

 

 

ㅁ 충청수영 내삼문 (忠清水營 内三門)  충남 유형문화재 제210호
 

조선시대 충청수영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1896년 폐영과 함께 대부분 소실되고 객사, 진정,  

공해관의 삼문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수사의 집무실이었던 공해관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삼문이다.
원래는 삼문 뒤의 객사와는 별도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객사와 함께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판은 김가진(1846~1922)이 썼다.

                                                                 (안내문)

 

 

 

 

 

ㅁ충청수영 장교청(객사) 忠清水營 將校廳(客舍) 충남 문화재자료 제411호

조선시대 충청수영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1896년 폐영과 함께 대부분 없어지고 객사,

공해관의 삼문, 진휼청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진 충청수영 객사이다.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결을 향해 어제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이 객사의 이름은 운주헌이다.

이 건물 앞에 있는 삼문은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문으로

원래 객사와는 별도 건물인데 지금은 한자리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장교청을 끝으로 충청수영성 안에 있는 건물은 모두 둘러봤다.

수영성 안에 더 많은 건물이 있었겠지만, 현재 복원된 건 진휼청, 영보정, 내삼문, 장교청이다.

 

천수만과 보령교

 

수영성은 장교청 위로 짧게 석성을 쌓고 나머지 구간은 토성과 석축이 뒤엉킨 상태이다.

그나마 석축은 중간중간 보강된 느낌이고 대부분은 토성이다.

 

 

 

 

 

여장은 보통 성 밖을 향하여 있는 데, 이곳은 성 안에 여장을 둔 특이한 경우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여장이다.

 

성벽 일부 구간을 높게 쌓아 치성처럼 밖으로 빼지 않아도 치성 역할을 한다.

 

 

ㅁ 보령 충청수영성 동문지(東門址)·성벽(城壁)·적대(敵臺) 발굴조사 


동문지는 훼손이 심하여 목조 기둥을 받쳤던 장초석과 문을 달았던 문지도리석 등이 확인되었다.
성문은 성벽 사이에 누각을 지어 통과하는 일반적인 형식의 개거식으로,

규모는 정면 8칸, 측면 2칸, 그리고 어칸의 폭은 3~3.2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충청수영성 내에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성문으로 군사적으로 망루로서의 

기능을 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다져 쌓은 내탁식인데,

문지 주변의 일부 구간은 바깥쪽과 안쪽을 모두 돌로 쌓아 만든 협축식으로 확인되었다.
적대는 적들의 주된 공격 목표인 성문 가까이의 성벽에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7단까지 계단식으로 들여쌓았고, 그 위로는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평면상의 길이는 8.8m, 너비는 7.49m이다. 

적대는 성벽과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벽의 수·개축할 때, 혹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안내문)

 

언젠가 동문지를 이렇게 복원하겠단 의지를 담았다.

동문지에 누각을 설치한다면 그에 앞서 서문에 누각을 설치하는 게 더 빠른 것이다.

 

동문지 주변에 쌓은 석축이 드러났다.

 

동문지를 지나는 작은 도로도 보인다.

나중에 이 길을 따라 동문을 쌓을 자재가 들어올 것이다.

 

 

 

 

 

성이 구부러지는 곡성에 치성이 함께 설치됐다.

군사적 기능이 중요한 치성이다.

 

 

 

 

ㅁ 보령 충청수영성 남동치성((南東雉城) 발굴조사


치성했은 성벽의 바깥에 덧붙여 돌출시켜서 만든 구조물로 충청수영성에는 남동치성 외에도
2개소(남서치성 1·남서치성 2)가 확인되었다. 

남동치성은 2017년 발굴조사 결과 3~8단가량 잔존하며 상단부는 대부분 유실되어 내부 채움석이 

노출된 상태이며, 정방형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은 지대석을 원지반에 바로 놓거나 받침석을 사용하는 등 지형에 따라 축성방법 차이를 보인다.
치성이 외벽과 맞물려 있지 않아 충청수영성 초축 이후에 고쳐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치성의 주변으로는 방어시설인 외황과 원형의 함정유구가 확인되어 방어와 관련된 시설에 대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ㅁ  보령 충청수영성 남벽(南壁)·남문지(南門址) 주변 발굴조사 


남문지 및 남벽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문지, 적대(敵臺), 편축(片築)식의 성벽이 조사되었다.
충청수영성에서 남문 지는 외부와 연결되는 주 진출입로로 추정되며, 5개의 문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문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적심석과 초석. 일부가 확인되었다.

적심석의 배치와 규모 등으로 보아 누각이 있는 개거식의 성문으로 추정된다.
적대는 문지의 서쪽에 위치하며, 나중에 축조된 문지에 의해 모서리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정방형의 형태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문지 주변의 성벽구간은 자연경사를 따라 벽석은 물려서 조성하였다. 

성벽의 외부로는 방어시설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안내문)

 

다시 도로를 건너 동성벽으로 들어선다.

 

이곳도 왼쪽으로 돌출된 성벽이 치성이다.

 

성벽 아래 야자매트를 깐 곳에 풀이 나지 않아 산뜻한 느낌을 준다.

성벽 위에 자란 풀을 제조제를 뿌려 풀이 크게 자라지 않아 걷기에 불편이 없다.

 

 

 

수영성 안의 옛날 건물과 현대 건물의 혼재된 모습

 

수영성 안 영보정 방향

 

 

 

 

ㅁ 보령 충청수영성 남서치성(南西雉城) 2 발굴조사 


치성은 성벽의 바깥에 덧붙여 돌출시켜서 만든 구조물로 충청수영성에는 남서치성 2 외에도
2개소(남동치성·남서치성 1)가 존재하고 있다.
남서치성 2는 경사가 심한 지형을 극복하고자 위로는 계단식으로 축조하여 아래쪽이 넓고 위가 좁다. 

치성은 15단 정도가 남아있는데, 8단까지는 성벽에 덧대어 쌓았고 그 위로는 붕괴 후 새로 쌓는 과정에서 

성벽과 함께 쌓은 모습이 확인되었다.
남서치성 2와 붙어있는 성벽의 안쪽 겉면은 성돌을 약간 단이 진 모양으로 쌓았는데,

이는 충청수영성에서 처음 확인된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사실상 서성벽의 북단은 이 소나무에서 끝난다.

이후 낮게 마을로 내려가며 사라지고 마을 주차장과 만난다.

 

 

 

 

1년 만에 다시 보는 충청수영성은 전과 다를 바 없지만 느끼는 감회는 또 다르다.

지난 1년간 즐풍이 산성과 읍성을 바라보는 눈은 많이 변했다.

이번에 이곳을 탐방하며 왜 이곳에 수영성을 설치했는지 지리적 이점에 대해 생각했다.

아는 만큼 조금 더 명확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