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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서울 한양도성 ① 돈의문터~인왕산~창의문 구간

by 즐풍 2023. 7. 6.

2023_107

 

 

2023.7.3. (월)  13:30~15:50, 2시간 20분 탐방

 

 

일산에 살 때 일산백병원에서 심장의 관상동맥에 스탠스 4개를 삽입하는 시술을 했다.

그 이후 등산으로 운동을 대신하며 시작한 산행은 15년 차에 접어든다.

평택으로 이사를 했어도 여전히 일산백병원을 이용하다 보니 거리가 멀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의사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변원 이전을 위한 여러 가지 서류를 발급받았다.

 

이번 일산백병원은 예약일정을 변경하며 한 달 앞서 방문한 것이다.

수면 시 심박수가 40 이상이던 게 최근 38~39로 떨어진 적이 있어 불안한 마음에 서두른 것이다.

선생님은 운동을 하는지 물으셨고, 즐풍은 매주 등산을 한다고 대답하니 문제 될 건 없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어지러움증이 없으면 수면 시 심박수는 별문제가 없다고 하니 큰 걱정을 던 셈이다.

 

병원이전에 따른 서류 발급과 처방 약을 구매하고 한양도성의 첫 구간인 돈의문 터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다.

오늘 하루에 한양도성 전체를 돌 수 없으므로 하루라도 덜 더울 때 가장 힘든 인왕산과 백악산으로 연결되는

한양도성을 먼저 돌고 이동이 쉬운 나머지 구간은 나중에 돌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오늘이 월요일이라 시내 구간에 있는 관련 박물관이나 역사관 등을 볼 수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돈의문 터를 지나 돈의문마을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서울 한양도성 스탬프투어" 지도를 수령했다.

지도는 스탬프가 마련된 작은 공간에 비치되어 있다.

스탬프는 돈의문, 숙정문, 흥인지문, 숭례문에서 각각 찍어야 하고,

인증사진은 인왕산 정상, 백악산 청운대, 낙산 정상, 목멱산 봉수대 터에서 찍어야 한다.

스탬프 찍는 공간에 마련된 지도로 첫 번째 스탬프를 찍었다.

 

 

ㅁ 돈의문敦義門

 

돈의문敦義門은 서울도성 4대문 4소문 가운데 서쪽 대문으로, 성문의 이름은 ‘의로움을 돈독히 한다.’는 뜻이다.

유교덕목인 인의예지신 가운데 오행에 따라 방향을 잡아 서쪽을 뜻하는 ‘의義’를 취하였다.

여기서 ‘의義’ 자의 뜻을 살펴보자.

‘의義’는 ‘양羊’과 ‘아我’의 합성글자이니 양가죽으로 만든 훌륭한 옷을 입은 나의 단정한 모습을 일컫는다.

즉, 자세가 바르고 행동함에 있어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된다.

나아가 불의를 보면 기꺼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실천적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의’는 ‘인仁’과 대비된다.

‘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반면, 의는 옳고 바름으로서 옳지 않음을 물리치는 절도 있고

올바른 행동으로 표현되는 강함으로 나타난다.

이에 ‘인의仁義’로서 조화를 이룬 가치관이 실행되는 사회를 기원한 것이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이었고,

인간 도리를 밝히고 널리 실천하게 하여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흥인문과 돈의문이라는 현판으로 한양도성의 동대문과 서대문에 걸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의’는 인간이 당연히 행하여야 할 덕목으로서,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논어》의 뜻에 따라 돈의문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고, 실제 돈의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음미함으로써

그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조의 정권장악 과정이었던 계유정난 때 김종서가 칼을 맞은 곳이었고, 을미사변 때 일제의 군사에게

속은 흥선대원군이 이 문을 통과하여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가 살해된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픔의 역사 현장이었던 돈의문이 어찌 의로움만이 현창 되기를 기원했던 문이라 하겠는가?

이상과 현실은 항상 괴리가 있는가 보다.

                                                               (출처_조선의 정신을 담은 서울의 문)

 

지금은 사라진 돈의문이 이 길 위에 있었다.

 

 

서울 한양도성 [사적]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소의문·광희문·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역사를 품다 -----------

 

한양도성에는 우리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 온 축성기법과 성곽구조를 계승하였으며,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축조 당시의 모습은 물론이고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성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이 처음 완공된 것은 약 620년 전이다.

태조 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

모두 98일 동안 전국 백성 19만 7천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전체 공사구간(총 5만 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이름 붙인 뒤 군현(郡縣) 별로 할당하였다.

태조 때 처음 축성할 당시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으나,

세종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개축한 후에도 여러 번 정비하였다.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세종 때에는 구간명·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책임기술자·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다.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성문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다.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내 성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주택·공공건물·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한양도성의 중건은 1968년 1·21 사태 직후 숙정문 주변에서 시작되었고, 1974년부터 전 구간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일단 훼손된 문화재를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하여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관리·활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 총 13.7km(2020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다.

숙정문·광희문·혜화문을 중건하였지만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하게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졌다.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시민들의 지혜를 모아야 하며, 축성기술 등 무형의 자산을 제대로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_서울 한양도성 홈피)

 

 

 

 

일산에 살 때 인왕산은 북한산이나 도봉산에 밀려 겨우 네댓 번 산행에 불과했다.

당시엔 산행이 주된 목적이었기에 인왕산에 있는 한양도성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최근 산성이나 읍성에 관심을 두며 지방의 여러 산성과 읍성을 다녀왔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역사성이 좋은 서울 한양도성은 차례가 오지 않았다.

드디어 오늘, 반나절 남은 시간을 갖고 한양도성 중 가장 어려운 구간인 인왕산과 북악산을 오른다.

시간 관계상 오늘은 인왕산, 북악산을 오르고 다음엔 나머지 구간을 탐방하게 될 것이다.

이틀에 걸쳐 한양도성을 마무리짓겠지만, 한양도성 홈페이지에서 구분한 구간별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후 일제강점기가 되자 우리 민족을 얼을 빼앗는데 혈안이 됐다.

그중에 하나가 한양도성은 물론 전국의 읍성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뚫으며 도성과 읍성 파괴에 나섰다.

한양도성은 더 심각해 당시 소의문, 돈의문, 혜화문 등이 철거되었다.

아래 성벽 사진을 보면 성돌은 맨 아래 일부만 남았다.

돈의문이 헐리고 난 뒤 주변의 건물 등을 지을 때 석재로 쓰이며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해방된 이후 나라살림살이가 좋아지자 복원 가능한 곳의 한양도성 대부분이 복원되었다.

도심을 지나는 곳에 도로가 생긴 곳이나  빌딩이 들어선 곳은 어쩔 수 없지만, 한양도성의 70%는 복원되었다.

 

 

이곳도 도로가 지나며 성벽이 절단된 곳이다.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일부 구간은 성 안팎으로 모두 탐방할 수 있는 구간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 안쪽으로 탐방해야 한다.

 

인왕산 범바위 인근의 곡성은 군사시설이 있어 탐방할 수 없다.

 

성 안쪽과 연결되는 곳은 암문으로 연결되거나 밖에 별도의 계단을 만든 곳도 있다.

 

 

 

성을 복원하며 주민의 편의를 위해 만든 암문이 출입구로 이용된다.

 

 

 

한양도성을 처음 만들 때 쌓은 성돌 일부가 하단에 남았다.

이후 복원할 땐 기계로 가공해 빈틈없이 쌓은 레고블록 같다.

 

 

 

워낙 큰 바위는 지지대를 이용해 여러 명이 쌓았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바위는 그대로 성돌이 되어 가장 완벽한 성벽으로 탈바꿈했다.

 


ㅁ 서울 한양도성의 가치


한양도성에는 우리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 온 축성기법과 성곽구조를 계승하였으며,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축조 당시의 모습은 물론이고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성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은 자연과 한 몸이 된 특별한 인공구조물이다. 

자연의 선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형을 그대로 따라가며 성을 쌓았으니, 

자연을 존중하는 것은 옛날부터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이렇게 쌓은 성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의 일부로 자리 잡 았으며 문학과 예술의 대상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되었다. 

천만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에서 이 정도 규모의 옛 성곽이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비록 훼손된 구간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는 전체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다.

                                                                                            (출처_서울 한양도성 앱)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漢陽)都城 刻字城石

鳳山上 봉산상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황해도의 봉산현(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이다. 

세종 때는 성벽을 쌓은 지방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서울로 올라와 다시 쌓게 했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G)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G),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한양도성을 처음 쌓을 때가 조선을 개국하고 4년이 지난 태조 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으로 총 98일이란 짧은 기간에 쌓았다.

설 명절을 가족과 함께 지내고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끝냈다.

그리고 가을 추수를 끝내며 다시 모여 성벽을 완성했다.

농사는 농사대로 지어 백성의 호구지책은 해결하되 도성을 만들어 국가의 안위도 지키는 전략을 이용했다.

 

경기도 백성은 한양도성까지 2~3일이면 올라오겠지만 먼 지방에 있는 백성은 많게는 열흘 이상도 걸렸겠다.

먼 데 있는 백성들이 더 고생한 것이다.

 

이 바위 위로 성벽을 지나가게 만들어 바위 높이만큼 노동력 절감 효과가 있겠다.

 

이곳 성벽은 여러 시대의 결과물이다.

멀리 보이는 아래 성돌은 작고 각진데, 바로 앞 오래된 성돌은 크고 규격도 제각각이다.

그 위에 최근 복원한 성돌도 두 번에 걸쳐 개축이나 복원된 걸 알 수 있다.

 

성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계단을 만들었다.

그 계단 상단에서 보는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의 성벽 

 

이곳 또한 거대한 암벽이 산성의 역할을 대신한다.

서울 호암산에는 통일신라 때 만든 호암산성이 있다.

호암산성의 대부분은 자연적인 암릉을 성벽으로 삼은 훌륭한 산성이다.

조선시대에도 호암산성을 그대로 물려받아 큰 개축 없이 그대로 사용했다.

 

 

호암산성이 궁금하면...   

 

서울 호암산성의 실체 완벽히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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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바위는 워낙 크고 높은 낭떠러지로 된 바위라 성벽으로는 완벽하다.

 

범바위에서 바라보는 인왕산 정상 

인왕산에서 보는 서울의 야경이 그림 같다고 한다.

하여 요즘엔 젊은이들 사이에 야간에 인왕산을 오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범바위 방향 

 

 

 

인왕산 정상에 다다를 즈음 온통 바위인 이 구간에 바위를 깎아 계단을 만들었다.

그 공력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겨우 한 사람 다닐 공간 밖에 안 된다.

 

정상엔 한성대학 외국인 학생들과 몇 명의 한국인이 보인다.

단체로 올라왔다가 되돌아간다.

 

그중의 한 외국인 여학생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었다.

 

인왕산 정상의 바위다.

이 바위 앞면에 인왕산이란 글자를 새김으로써 표지석을 만들면 근사하겠단 생각이 든다.

북한산 정상에 잇는 큰 바위에도 북한산이란 글자를 한자로 새겼으니 이곳도 못할 이유는 없다.

 

인왕산 정상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성벽 왼쪽의 기차바위 옆으로 산불로 죽은 소나무가 보인다.

지난 4월 2일 인왕산 산불로 축구장 19개 정도의 면적인 14ha가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산불의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해 안타깝다.

 

종로구에 해당되는 성곽의 현황을 살펴보면, 먼저 새문안길의 중앙에 있었던 돈의문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는 상태이며, 강북삼성병원에서 사직터널에 이르는 구간은 미복원 상태로 남아 있다.

그 뒤부터 인왕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는 일부 복원되었고 대부분은 체성까지 잘 남아있으며,

창의문(彰義門)에서 북악정상을 거쳐 북문에 이르는 구간은 전부 복원되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연리근 소나무란 안내문이 붙었다. 은근히 재미있다. 

 

성벽 밖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목인박물관 목석원이다.

언제 한 번 방문해 볼까.

 

성 안쪽은 낮아 보여도 성 밖은 10여 m가 넘게 만들어 고도차이를 잘 이용했다.

 

인왕산이 끝나는 지점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문을 닫았는데, 인왕산 내리막길에 그의 「서시」를 차용한 서시정이란 정자가 있다.

 

 

지금까지 네댓 차례 인왕산을 다녀왔으나 한양도성에 뜻을 두고 오르기는 처음이다.

아무것도 모를 땐 그냥 성벽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역사를 알고 난 뒤 보는 눈이 달라졌다.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4대문과 4소문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 매년 한두 차례 한양도성을 돌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