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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서울 한양도성 ④ 광희문-남산공원-숭례문-돈의문 구간

by 즐풍 2023. 7. 12.

2023_110 

 

 

2023.7.5. (수) 10:36~14:47, 네 시간 10분 간 순성, 6.7km 이동

 

 

그동안 10년 넘게 등산에 올인하던 걸 떠나 여행으로 지평을 넓히며 삶은 보다 풍부해졌다.

우리나라 곳곳에 명소가 많다는 걸 알았고, 같은 곳이라도 계절 따라 풍경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도 알았다.

그동안 산행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산성에 관심을 가지며, 읍성과 도성까지 그 저변을 넓혔다.

이번엔 서울 한양도성을 두 번에 나누어 한 바퀴 온전하게 순성巡城길을 끝냈다.

 

그동안 수원화성이나 북한산성, 남한산성, 금정산성, 공주 공산성은 물론 3대 읍성으로 일컫는

고창 해미읍성, 순천 낙안읍성, 서산 해미읍성까지 주요 읍성이나 산성을 많이도 다녔다.

물론 알려진 산성이나 읍성 중 못 가 본 곳이 더 많으니 앞으로 찾아야 할 곳도 많다.

이번에 다녀온 서울의 한양도성은 조선의 역사를 관통하여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수레바퀴 중심지역이다.

 

 

 

 

 

도성의 유산가치

1)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

 

서울 한양도성은 오백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사직과 도성 백성의 보호막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도읍의 상징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고대 고구려 평양성과 고려 개성에서 보이는 평지성과 산성을 융합한 독창적 한국형 도성 

제도를 계승하고, 동아시아 유교 질서와 상징체계를 반영한 계획도시이다. 

1396년 전국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건설된 한양도성은 세종, 숙종 연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한양도성은 서울이 품은 역사유적으로 자연 속의 도시경관과 도시 속의 역사경관이 조화를 이루며 600여 년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도시규모의 성곽유산
서울 한양도성은 고려 고구려 도성 형식에 기원을 두고, 평양성과 개경도성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된 독창적인 

한국 도성으로서의 위상과 형식을 갖추고 있다.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결합한 성곽 내부에 궁궐, 종묘, 사직과 행정시설, 시장시설, 거주지를 포함하는 한국적 

도성체계와 축조방식을 보여준다.


- 600년의 역사층위가 축적된 유산
서울 한양도성은 문루와 성곽의 원형이 잘 남아있어  조선시대 도성 형식의 전통과 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길이가 18.627km로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유산 중 가장 큰 규모로 현재 12.854km의 구간이 원형

또는 복원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나머지 구간 가운데 일부는 지하유적으로 남아있다.

서울 한양도성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조선왕조의 수도로 도성의 형태와 기능을 유지해 왔으며,

시기별 축조형태와 수리기술의 역사적 증거와 기록과 함께 실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 땅과 한 몸으로 구축된 문화유산
서울 한양도성의 입지는 풍수에 바탕을 두고 한반도의 지형체계를 고려하여 결정되고,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건설되었다. 

석재로 축적된 성곽 안쪽에 판축층을 조성하는 등 지형과 일체화된 축조기술을 보여준다. 

성곽은 자연적인 지형을 활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내사산의 굴곡과 도성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도시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 집단 장인기술로 구축된 유산
한양도성은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성곽을 축조했는데, 구간마다 축조에 참여한 장인들의 실명이 새겨져 있다. 

서울 한양도성의 보존을 위해 내사산의 지형을 잘 보존하여 왔고, 도성 안의 하천을 유지하기 위해 내사산의 

수종들을 관리하여 왔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문루와 성곽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과 도성 풍경을 묘사한 회화작품이 많다.

 


2) 진정성(authenticity)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오백여 년 동안 수축과 수리의 과정을 통해 지속해서 관리되어 왔다. 

시기별로 구별되는 재료와 축조기술이 성곽의 형태로 드러나므로 오백 년의 역사적 층위를 확인할 수 있다.

흥인지문과 더불어 도성의 성문 건축물의 원형과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3) 완전성(integrity)


서울 한양도성은 한국의 독창적인 도성형식으로 조성되었으며 규모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큰 성곽으로 전체

구간 중 약 70% 정도가 성곽의 원형 또는 유적형태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성벽과 더불어 성문·암문·수문·봉수대 등의 서울 한양도성을 구성하는 성곽시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 한양도성의 내부에는 도성을 구성하는 궁궐과 종묘·사직단 등의 주요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출처_한양도성 홈피 편집)

 

 

ㅁ 광희문光熙門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문루 가 소실되었으나 1975년 원 위치에 15m 떨어진 현 위치로 옮기고 문루를 복원하였다. (안내문)

 

 

문門, 사람들의 염원과 기원을 담은 행복의 상징

 

한양도성의 대문과 소문은 그 기능도 달리 나타났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임금이 행차하고, 사대외교의 대상이었던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문이었다. 

그러나 교린외교의 대상이었던 일본 사신은 광희문(남소문), 여진 사신은 혜화문(동소문) 등 소문을 이용하였고,

도성 내의 장례 때는 상여가 광희문(시구문)과 소의문(서소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문의 격에 따라 의례 제도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이 되는 5대 궁궐이 남아 있고, 그곳에는 정문이 있다.

그런데 5대 궁궐의 정문 이름은 한결같이 중앙에 ‘화化’를 붙여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 경희궁의 흥화문, 경운궁(덕수궁)의 인화문 등

모두 교화를 뜻하는 ‘化’가 들어가 있다.

이는 대궐의 정문을 통하여 임금의 덕목인 인仁(사랑)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통하여 백성들을 교화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자 나라의 정령이 나아가는 관문임을 밝힌 것이다.

궁성의 정문은 임금이 출입하는 문으로, 동문은 왕실들의 출입구, 서문은 관리들의 출퇴근 문으로 사용되었다.

한양도성의 문은 조선시대 이후 교통로와 경계의 의미를 넘어 풍수지리에 어울리는 방향에 따라 위치하였고,

나라의 정치이념을 표시하여 안정된 국가경영을 기원함은 물론 사람의 도리를 밝게 하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출처_조선의 정신을 담은 서울의 문)

 

 

 광희문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구간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오르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

 

순성객을 위한 정자도 보인다.

 

순성길이 높아지는 만큼 성벽도 함께 높아진다.

 

한양도성 주변 사람들은 참 좋겠다.

도성 안으로는 크고 작은 나무가 많아 운치를 더하고 여름엔 그늘이 생겨 열섬현상도 줄일 수 있다.

한양도성은 몫 좋은 숲세권이다.

 

남산(목멱산)이 나지막한 산이라도 산자락을 잘라 성벽 안으로 흙을 밀어 넣어 

안팎의 단차를 높여 성벽의 역할과 기능을 크게 높였다.

산성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는 셈이다.

 

광희문을 지나 잠시 이어지던 한양도성은 마을을 지나며 골목길 따라 숨은 그림 찾듯 이리저리 맴돈다.

그렇다고 해도 간간이 나타나는 한양도성 순성길 이정표를 따라갈 수 있다.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또 한 차례 도로가 지나가는 구간의 반얀트리클럽 경내를 지나게 된다.

큰길을 건너 국립극장을 왼쪽으로 끼고돌아 남산공원 입구로 접어들며 남산지역의 도성과 다시 만난다. 

 

이곳에서 잠시 동안 성 밖으로 순성길을 돌렸다.

여러 시기의 산성이 혼합된 지역으로 다양한 성돌을 마주한다.

 

시기별 성돌의 모양을 나타내지만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都廳監官 趙廷元 吳澤 尹商厚 邊首安二土里 己丑八月日

(도청감관 조정원 오택 윤상후 편수 안이토리 기축팔월일)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숙종 35년(1709) 8월에 도성 개축 임시 책임자인 조정원, 오택, 윤상후가 함께 

공사를 감독했으며, 전문 석수 안이토리가 공사에 참여했다는 내용이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G),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남산의 초입에 있는 성벽은 동남쪽으로 이어지므로 북서 방향과 달리 풍우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는 곳이다.

물론 300여 년이 조금 더 흘러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은 영향도 있지만 글자 상태는 비교적 좋다.

 

 

지금까지는 성 밖에서 순성해 왔지만 이곳부터는 나무 계단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성벽의 틈이 넓어지는 게 보여 안전진단이 필요해 보인다.

 

성 안으로 들어론 뒤 제법 걸음을 걸어 남산 정상으로 가는 차도와 만난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監役判官 崔有遠 一百五十尺 (감역판관 최유원 일백오십 척)

 

이 각자 성석은 태조 5년(1396년)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했을 때 감역관(공사의 실무관료)을 임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기 위해 도성이 완공된 후 성돌에 새겨 넣은 것으로 오늘날의 '공사 실명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축성 공사를 담당했던 옛 군부대, 지역, 담당자, 일시 등을 기록한 성돌이 한양도성 곳곳에 
남아있다. 

이러한 축성의 흔적과 기록은 도성의 역사성과 당시 도성 관리의 철저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

어릴 때 남산에 오신 분들은 많은 추억을 갖고 있겠다.

걸어서 올라오려니 부담스러울 땐 남산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다.

아니면 동대입구역 6번 출구 입구의 장충동 정류장에서 01번과 8001번 버스를 타면

약 3.2km 거리에 16분 정도 걸린다.

 

 

 

플록스 꽃

 

이곳 여장은 복원을 서두른다고 시멘트로 발라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남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인왕산 방향, 우측으로 북악산이 가깝게 보이고, 멀리 북한산도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한양도성 순성의 마지막 구간인 남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엔 내외국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북적거린다.

 

남산 팔각정

남산 팔각정은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 등을 모시는 국사당이 있던 자리이다.

1959년 이승만 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한 우남정이 지어졌다가 철거되고, 1968년 11월 팔각정이 건립되었다. 

 

ㅁ 목멱산 봉구대 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번지 1호

 

목멱산(木覓山) 봉수대 터는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리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던 곳이다.

봉수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멀리서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

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는 경상도 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선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이곳은 1993년에 김정호의 <청구도> 등의 관련자료를 참고해서 남산의 다섯 개 봉수대 중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서울 한양도성 순성하기의 인증 사진을 찍는 남산 봉수터이다.

대만에서 왔다는 젊은 여성 두 명과 사진 품앗이를 했다.

 

남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이니 이틀에 걸친 서울 한양한양도성 순성이 끝나가는 순간이다.

벌써 장마가 시작되고 난 뒤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하며 대지는 찜통으로 변했다.

7월의 가장 뜨거운 날의 하루를 이렇게 보낸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2013~2014년 발국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유적은 한양도성 남산 구간의 일부로 그동안 멸실된 줄 알았던 성벽 구간이다. (안내문)

 

 

한양도성의 구조


한양도성의 뒤채움 구조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산 자락의 성벽은 경사지를 활용하여 한쪽에만 성돌을 쌓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를 편축성이라 한다. 

면석으로 외벽을 쌓고, 성벽의 안쪽과 자연 지형, 토축 사이를 흙과 잡석으로 채웠는데, 이를 뒤채움이라 한다. 

면석은 사각볼 모양으로 뒤뿌리를 길게 빼고, 그 사이사이로 잡석을 넣어 성벽과 지형이 단단하게 맞물리도록 했다.
성벽은 땅속에 묻혀 상부의 면석을 받쳐 주는 기지부, 땅 위로 성돌이 켜켜이 쌓여 있는 채성, 

맨 위쪽의 여장으로 구성된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1단의 지대석과 3단의 면석인데, 

오른쪽 그림을 통해 한양도성 성벽의 본래 높이와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규모를 비교할 수 있다. (안내문)

 

 

이곳에도 시기별로 다른 형태의 성돌을 볼 수 있다.

 

 

 

 

한양도성 축성에 사용된 구조물 흔적

 

성벽을 쌓을 때 임시로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의 흔적이다. 

지름은 15~40cm 정도이며, 깊이는 최대 55cm이다. 

이 구멍들은 2~3개씩 짝을 이루며 성벽과 나란히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일부 구멍에서는 나무 기둥의 밑동도 남아있었다. 

남산 한양도성 유적에서는 총 137개의 기둥 구명이 발견되었는데, 구명 흔적의 보호를 위해 모두 보존 처리하였다. 

일부는 관람객들이 볼 수 있도록 노출하고, 나머지는 모래를 채워 다시 땅속에 묻었다.

                                                                                                                              (안내문)

 

나무 기둥을 박았던 흔적

 

 

 

안중근 의사 공원

 

 

 

 

 

한양도성 순성길은 남산 구간을 마지막으로 처음 인왕산 구간으로 오를 때 시작했던 돈의문 턱까지 가 본다.

 

 

 

 

서울 숭례문 | 崇禮門


서울 승혜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 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다. 

그 후 세종 30년 1448, 성종 10년 (1419)과 고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에 크게 수리하였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는 왼쪽과 오른쪽에 있던 성곽을 철거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8년에는 응급 복구 작업을 했고 1961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전면 해체 

보수 작업을 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건물 전체가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 작업을 하였다. 

이때 왼쪽과 오른쪽 성곽도 함께 복원하였다.
조선 시대 한양의 출입문으로 매일 밤 인정 10시쯤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 날 아침 파루세력 4시쯤에 문을 

열었는데, 문루*에 종을 달아 그 시간을 알렸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여기서 몸소 날이 개기를 비는 기청제나 비가 내리기를 비는 기우제를 지냈다.
숭례문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또한 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누각은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 구조가 견실하여 조선 초기의 건축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문루: 궁문, 성문 따위의 위에 지은 다락집  (안내문)

 

 

ㅁ 숭례문崇禮門

 

숭례문은 청계천과 만초천을 가르는 언덕(분수령)에 세워져 있으며, 인왕산 줄기와 남산 줄기를 잇는

길마재 즉, 안부鞍部에 해당된다.

숭례문은 조선왕조 도성의 정문으로 서울성곽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커 도성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지닌 성문을 통하여,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으로서 나라의 품격을 지키는 상징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전근대사회 중국의 외교사절은 이 문을 통하여 입국하여 태평관에 머물렀고,

조선의 외교사절은 이 문을 지나 의주로를 통과하여 중국의 베이징에 이르렀다.

                                                                        (출처_조선의 정신을 담은 서울의 문)

 

숭례문에서 「서울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 도장을 찍었어야 했는데 깜박했다.

버리자니 아깝고 다시 오자니 귀찮다.

그래도 언제가 서울 올 때 마저 찍고, 배지를 받아야겠다.

 

 

조선의 수도인 서울을 방어하던 서울성곽은 개화기에 들어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갔다.

조선후기 서울을 여행하던 선교사나 외교관들의 기록에 의하면 서울성곽은 이미 여러 곳이 허물어졌으며

많은 백성들이 그 허물어진 틈으로 다니고 있다고 전한다.

고종 6년(1869)에 동대문이 개축된 것을 마지막으로 추가 보수를 하지 않아 도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서울 성곽은 축조당시 보호대상이던 왕권이 점차 실추됨에 따라 존재의 의미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서서 새로운 교통수단인 전차가 등장하자 1898년 전차선로를 내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 일대의 성벽을 허물기 시작하여 국권을 실질적으로 상실한 1905년 이후에는 대대적으로 훼손되기에 이른다.

1907년에는 일본왕자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경호상의 이유를 들어 ‘성벽처리위원회'라는 조직을 동원하여

서울의 4대문과 4소문 주변의 성벽을 차례로 허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훼손은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1915년까지 계속되어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일부 구간에만

성벽이 남게 되었다.

일제는 이때 훼손한 석재와 목재를 일본인들에게 다시 불하하였다고 한다.


서울성곽은 광복 후에도 이렇다 할 보수실적 없이 유지되다가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석축을

보수하였고, 1972년과 1976년에 부분적으로 보수 및 개축을 하였으며,

1987년에 석축의 기단부 일부와 창의문 보수를 거쳤으며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정문·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숭례문에서 한양도성 순성길 안내 이정표를 따라 돈의문으로 가는 길이다.

 

어느 건물인지 담쟁이넝쿨이 보기 좋게 담벼락을 타고 오른다.

빌딩 안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숲 속에 있는 느낌을 받겠다.

 

 

숙정문(肅靖門)에서 혜화문(惠化門)까지는 대부분 복원되었으나 서울과학고 일대의 일부만 도로 개설로

복원되지 못하였으며,

혜화문(惠化門)을 지나 흥인지문(興仁之門)까지는 도로 일부를 제외하고 전부 복원되었다.

중구에 해당되는 서울성곽 구간은 숭례문(崇禮門)~소의문(昭義門) 구간(479m), 소의문(昭義門)~돈의문

(敦義門) 구간(711m), 흥인지문(興仁之門)~광희문(光熙門) 구간(730m), 광희문(光熙門)~숭례문(崇禮門)

(5,390m) 구간이다.
숭례문~소의문 구간 중 숭례문~상공회의소 구간의 성벽은 현재의 상공회의소 담장을 끼고도는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는 구간으로서 원래의 성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공회의소~소의문구간 중에는 명지빌딩의 도로 측 40m 구간에 1.5~2.9m의 성벽이 잔존해 있어

2002년 5월에 정비·복원되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드디어 첫날 한양도성 순성을 시작하던 돈의문 터까지 왔다.

이렇게 한양도성을 온전히 한 바퀴 도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이제 길을 알았으니 다음엔 새벽부터 시작하면 하루에 끝낼 수 있겠다.

 

긴 티에 반장갑 낀 사이로 드러난 손목이 따가운 햇빛 테러에 붉게 물들었다

뜨거운 여름을 밖에서 보낸다면 자외선 차단제가 필수다.

얼굴에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기 귀찮아 버프를 쓰고 다녔더니 검은 반점이 점점 많이 생긴다.

이를 어찌할꼬....

 

 

일산에 살 때 북한산 등산을 하며 북한산성을 수없이 올랐다.

간혹 북한산성 14성문이니 16성문이니 하며 테마산행을 하기도 했다.

북한산성은 제법 높고 위험한 구간도 많아 종주하려면 꼬박 하루 걸린다.

그에 비하면 한양도성은 도심에 형성된 산이 낮아 크게 어려울 건 없다.

이제 한양도성 순성을 최소한 매년 한 번 이상은 해야겠다.

 

 

 

 

북한산 14성문 종주기

산행일자 2015.9.28.월(추석연휴) 07:00-18:07(11시간 7분, 이동거리: 17.12km) 날씨: 맑은 후 오후부터 흐림 북한산성의 시발점은 맨 아래쪽에 있는 수구문으로 봐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1925년 7월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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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16성문 종주

2017.11.26. 일 07:00~17:05(이동 시간 10:05, 이동 거리 14.56km, 휴식 시간 01:13, 평균속도 1.7km/h) 흐린 후 맑음 2015년 9월에 북한산 12성문 2차 종주를 끝내고 오늘 다시 종주하게 되니 참 오랜만이다.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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