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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보령읍성의 보령성곽과 해산루

by 즐풍 2023. 6. 22.

2023_102

 

 

 

2023.6.18. (일) 오후에 잠시 탐방

 

 

보령의 충청수영성을 먼저 보고 보령성곽으로 넘어왔다.

이곳은 보령읍성인데, 문화재청 자료에는 보령성곽으로 등재됐다.

보령읍성은 직선거리로 1.6km 떨어진 봉당성이 좁아 유사시 성 안으로 피신시킬 수 없고

물도 부족하여 현재의 자리에 새로 읍성을 만든 것이다.

1431년에 성을 다 짓고 난 뒤 관아 건물을 짓기 시작해 1432년 비로소 객관과 동서름(東西廩)⋅

제민당(濟民堂)⋅공아(公衙)⋅현사(縣司)⋅어풍정(馭風亭)⋅병기고(兵器庫)⋅영어(囹圄 :옥(獄) 등을 완성해

모두 140여 칸을 지었다고 하니 관아가 다 들어선 것이다.

 

1910년 일제강점기 때 읍성 철폐령이 내려지며 전국 읍성의 대부분을 관통하며 도로를 냈다.

보령읍성은 낮은 야산이라 도로 개설의 실익이 없어 1911년 12월 보령보통공립학교를 개교한 후 추후에

주포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1953년 4월 대천중학교가 보령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보령읍성으로 들어섰다.

주포초등학교가 들어서며 관아 자리를 절반 밀어내며 읍성의 일부가 헐리고,

보령중학교가 들어서며 읍성의 관아는 완전히 사라지고, 겨우 관아문이 설치된 성벽 일부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때 읍성철폐령이 내려지며 주포초등학교와 6·25 전중 중에 보령중학교까지 들어서며

보령읍성을 대표할 시설은 성곽에 있는 읍성관아문인 해산루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문화재청에서 보령읍성은 사라지고 보령성곽과 보령관아문만 제공된다.

 

아래 사진을 보면 보령읍성의 절반은 학교 교정이 들어섰다.

그 바람에 성벽의 양쪽 일부가 사라지고 관아문이 있는 성벽도 주포초등학교 운동장 담장으로 쓰인다.

흰 점선의 오른쪽 성벽 절반은 복원되었고, 왼쪽 절반 정도만 옛날 성벽 그대로 있다.

읍성을 만들고 6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보령읍성은 안타깝게도 빈 껍데기만 남은 셈이다.

 

 

 

ㅁ 보령성곽(保寧城郭)   충남 문화재자료 제146호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의 면소재지 한가운데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간척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동쪽에는 진당산(鎭堂山,350m)과 배재산(356m)이 높게 솟아

남북 쪽으로 길게 연결되면서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특히 서쪽의 간척지는 간척되기 이전에 포구(浦口)가 있어 주포(周浦)로 불리던 곳이었다.

주포를 통해 서해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는 고갯길 사이로 홍성(洪城), 부여(扶餘),

공주(公州) 등 내륙으로 진입하는 교통로가 연결되어 있다.

즉, 보령성곽은 서해안 포구와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하나로 모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진당산에서 서쪽으로 길게 늘어진 해발 60m의 구릉 선상부를 따라 축성된 읍성은 구릉 일부를 포함한

저평한 평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전체 둘레 897m로서 한가운데 자그마한 곡부를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형태의 읍성이다.

따라서 성내 지세는 북편에 구릉지, 남편에는 평지로 구분된 북고남저(南高北低)의 지형을 이루며,

평면 형태는 남벽이 북벽보다 약간 짧은 평면 사다리꼴의 형태를 이룬다.
성내에는 보령중학교, 주포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으며, 학교 운동장 조성과정에서 성벽의 대부분이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벽과 동벽 구간의 심한 훼손을 고려하여 4차례에 걸쳐 성벽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성벽은 북벽 일부분을 포함한 남벽과 동벽 구간은 모두 근래 해체 복원된 것이며,

축조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북벽의 일부 구간인 서벽 구간에 한하고 있다.


성벽은 폭 1,100cm 높이 280cm 정도가 잔존하며, 단면은 수직에 가깝게 직각을 이룬다.

보령성곽의 성벽에서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성돌이 간간히 확인된다.

명문은 서벽에서 4곳, 동벽에서 1곳, 총 5군데에서 확인되었다.
내용은 "단양 10척, 제천 15척, 신해시월일(丹陽十尺 堤川十五尺辛亥十月)……” 등으로 성곽을 축조할 

당시 인력이 동원된 지역과 축조성벽의 담당길이, 축성시점 등을 기록한 것이다. 

‘신해년(辛亥年)’은 1431년(세종 13년)이며, 1430년에 성곽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완공된 시점을 보여준다.
성내 부대시설로는 문지 3개소, 건물지 등이 있다.

문지는 성내로 진입하는 출입시설로서 동문, 남문, 북문 등 3개 방향에서 각각 1개소씩 시설되었으며,

서문은 추정지로 비정되고 있다.
남문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충팔작지붕으로 누각 전면에는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동문은 복원되었으며, 북문은 대부분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서문 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해동지도(海東地圖)」에 문루를 갖춘 서문이 그려져 있어 존재했었다.

적대(敵臺)는 기록에 의하면 8개소가 있었으나 현재 남벽·동벽·북벽에 각각 1개소씩 3개소 만이 확인된다. 

옹성(甕城) 및 우물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해자(垓子)는 외형상 확인되지 않지만, 『문종실록(文宗實緣)』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09척인데 

해자는 2,190척이라고 하여 해자가 성벽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외곽에 시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같은 기록에는 성벽 높이 12척, 여장 높이 2척, 적대 8개소, 성문 3개, 여장 412량, 우물 3개소

등이 나타나 있는데, 현존하는 읍성의 경우 상당 부분의 성곽 관련시설이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령성곽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우환이 되어 1400년(태조원년)에 봉당성(鳳堂城)을 쌓았으나 

성이 좁고 험준하여 성을 폐하고, 현재의 위치에 옮겨서 다시 축조하였다고 한다.

성곽은 세종 12년에 쌓기 시작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축조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3년 여에 걸쳐 각종 시설과 객관(客館) 등을 조영하여, 이 지역의 군사·행정의 중심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내부에서는 기록에 나타나는 관아시설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당시 사용되었던 기와 편 및 백자 편들

많이 성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발췌)

 

 

 

ㅁ 보령 관아문 保寧 官衙門  충남 유형문화재 제40호(1976. 1. 8)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62-2


보령 관아문은 조선시대에 쌓아 보령현의 치소 역할을 하였던 보령성곽의 남문이다.
장초석 위에 가동을 한 정면 3칸, 측면 2간의 누각건물이며, 조선시대의 관아문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은 보령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보령현은 고려시대부터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인근 오천면에 있었던 충청도 수군절도사영과의

통치관계에 따라 보령부(保寧府)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보령성곽과 즐비한 공덕비

 

 

보령읍성 안 주포초등학교 입구 

 

주포초등학교를 뒤로 돌아 산이랄 것도 없는 구릉으로 올라왔다.

이 성벽은 1980년대에 복원한 것이라고...

 

성벽 밖은 석성으로 거의 직각으로 올렸다.

 

 

 

 

 

 

 

 

 

성벽 아래에 있는 논은 모판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농가란 생각이 든다.

절반 정도가 나갔다.

 

모판이 있는 논 위의 성벽은 일부 잔디가 있어 걷기에 어려움은 없다.

이곳만 벗어나면 잔디가 사라지며 잡풀이 많아 탐방에 곤란을 겪는다.

 

이 잡풀을 뚫고 지나갈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보령읍성도 중요한 문화유적인데, 두어 차례 예초기로 밀면 탐방하기 좋을 텐데...

 

북문이 있던 자리

 

 

 

 

 

 

 

모판이 있던 농지를 지나면서부터 성벽은 예전 그대로다.

복원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정도의 성벽이다.

보령읍성을 복원하겠다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내보내지 않는 한 성벽만 번드르르하게 복원할 필요는 없다.

 

보령성곽 탐방으로 마치며 보령중학 교정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구간의 소나무다.

 

보령리 5층 석탑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26

 

진당산 서쪽 기슭의 절터에 매몰 방치되었던 석탑을 1960년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이전 복원하였다.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350cm이고,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체감률이 거의 없어 둔중한 느낌을 주고,

형식이 간략화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보인다.

맨 꼭대기 5층의 탑신석과 옥개석이 없어 현재는 4층만 남아있다. (안내문)

 

 

 

 

 

보령읍성은 주포초등학교와 보령중학교에 자리를 내어주고 보령성곽이란 이름만 남았다.

140여 칸의 관아 건물 중 남은 것은 5칸짜리 보령관아문이 전부다.

우리 문화유적이 일제강점기에 맥이 끊긴 현장이다.

보령읍성을 살리자고 학교를 내보내는 소탐대실을 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