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00
2023.6.18. (일) 14:35~15:35, 한 시간 탐방, 2km 이동
오전에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 섬+바다」를 수령하고 기지포해안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같은 태안해안에 있는 학암포 해변으로 가야 하지만, 거리가 멀어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인근 홍성군의 홍주읍성과 면천읍성은 이미 탐방했으나 미답지인 결정읍성으로 간다.
다른 사람의 결성읍성 블로그를 보면 대부분 관아와 옹성을 보는 것으로 끝낸다.
즐풍은 관아와 형장청, 옹성만 보고 읍성을 마무리짓기엔 너무 허전하다는 생각으로 좀 더 찾기로 한다.
옹성에서 동쪽으로 예전 성벽이 조금 보인다.
이 성벽은 마을을 따라 마을길을 따라가지만, 더 이상 성벽은 보이지 않는다.
결성초등학교 뒷산으로 성벽이 연결될 수 있겠단 생각을 갖고 학교로 들어섰다.
결성초교는 결성읍성과 지척에 있는데, 나지막한 산을 병풍 두르듯 담장처럼 쓰고 있는 학교다.
학교 뒤로 돌아 산을 보니 아무래도 결성읍성이 이곳의 작은 능선을 따라서 올라가겠단 생각이 든다.
즐풍의 예상대로 초등학교에서 시작되는 성벽은 산으로 올라가며 석당산성과 연결된다.
석당산성을 먼저 만든 후 나중에 결성읍성을 덧붙이며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삼킨 게 결성읍성이다.
ㅁ 홍성 결성읍성 (洪城 結城邑城)
홍성군 결성면 소재 결성읍성은 치소(治所)를 석당산성(石堂山城)으로 옮긴 후 51년 만인 1451년에 완축했다.
『세종실록지리지』와『신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 『여지도서』 등에 기록이 전한다.
규모는 성 주위 약 1,007m(3,325척)이며, 성벽높이 내측 약 2∼3m, 외측 약 3∼6m이고,
성벽 기저부 폭 약 4.5m이다.
성을 개축할 때 구간마다 도내 각읍(各邑)이 나누어 쌓은 것을 표시한 아산 지역의 기각역축(記刻役築) 기록이
북쪽 성벽에 남아 있다.
읍성 내에는 17개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헌, 형방청, 책실이 남아 있다.
홍성 결성읍성은 원래의 결성현 치소였던 석당산성 대부분을 포용하며 넓혀 쌓은 읍성으로서
조선조 읍성연구와 결성면의 역사성을 밝히는 역사적·학술적 중요 자료이다. (출처_문화재청)
성(城)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높은 장벽을 말한다.
고대의 도시들은 대부분이 흙을 쌓아 만든 장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城자에 쓰인 土자는 그러한 뜻을 전달한다.
그러니 城자는 성벽을 쌓고 창을 들어 지킨다는 뜻이다.
창 과戈 자는 ‘창’이나 ‘전쟁’, ‘싸움’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戈자는 고대에 사용하던 창을 그린 것이다.
이 창은 끝에 낫처럼 생긴 무기가 달린 것으로 적의 다리를 절단하는 용도로 쓰였었다.
戈자는 이렇게 전쟁 무기와 관련된 것이므로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창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네이버 한자)
이렇게 아문 현관의 성城 자를 창 모양으로 바꿔 성의 의미를 시각성 높게 발휘하는 마법을 부렸다.
아래 네모칸 안의 작은 지도는 등산 앱을 가동시켜 받은 그림이고,
이를 토대로 산성의 위치를 점선으로 표시했다.
ㅁ 결성읍성(供城 結城邑城) 충남 기념물 제165호
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산 28에 위치한다.
결성읍성은 결성면사무소 남방에 솟은 석당산(石堂山)의 정상부 및 동쪽으로(石堂山) 뻗은 능선을
남벽으로 삼고 동벽의 일부와 북벽이 평지에 접근된 포곡식 산성이다.
읍성의 북동벽은 산기슭에 형성된 민가에 의하여 일부 파괴되었으나,
문지 및 옹성의 일부와 성벽의 통과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결성읍성은 본래 결성현의 치소였던 옛 결성산성의 대부분을 포용하면서 넓혀 쌓은 것이다.
체성외벽의 석축은 조선전기의 일반적인 양상처럼 하부는 대석을 사용하고 상부로 올라가면서는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막돌 층지어 쌓기 수법으로 축조하였다.
어느 켜에서는 수평 가로줄눈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그 틈새에는 쐐기돌을 끼운 것이다.
내면에는 경사를 이루며 흙을 두텁게 덮은 내탁부를 이루고 있지만,
치성은 옹성과 같이 석재를 사용하여 구축하였으며 각을 이루고 있다.
성벽외측의 하단은 해자를 향하여 경사지도록 흙으로 보축하였다.
남벽과 동벽에서의 성벽의 폭은 약 4.5m이고 성벽의 외벽 높이는 3~4m로서
동벽의 경우 1단에서의 성돌의 크기는 165 x 90cm ~ 85 x65cm 정도의 부정형 대석을 사용했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 의하면 문종 원년 10월 29일에 결성현성이 축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등 지리지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읍성의 둘레가 3,325척, 높이 9척, 우물이 6개소이며, 3,325척, 높이 9척, 우물이 6개소이며,
옹성이 2개소, 곡성이 1개소이고, 성문은 동·서에 2개의 문이 시설되었는데
동문의 문루는 1층이나 서문은 누각을 시설하지 않았다.
또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옛 산성을 새로이 개축하면서 도내 각 읍으로 나누어 축성할 때
구간마다 축성역에 대한 기록을 석각 하여 나타냈다고 하는바,
실제로 북쪽, 성벽의 일부에 아산지역의 축성구간을 표시한 석각이 남아 있다.
한편, 『여지도서(興地圖書)』에는 성체의 높이를 14척으로 기록하고 있어 『신중동국여지승람』과
5척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여장이 시설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볼 때
체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높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지는 동문지와 서문지가 확인되는데 모두 옹성을 시설하여 문헌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동문지의 문복은 3.6m로 현재 양 측벽의 높이는 4단으로 1.75m를 나타내고 있는데,
1단의 성석(城石)은 200x56cm, 110x70 cm 정도의 대형 석재를 사용하였다.
동문지의 옹성은 80X30cm, 50x 40cm 정도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20~30cm 정도 물려서
기단석을 놓고 체성을 축조하여 반원형의 편문 식으로 축조한 높이는 2m를 나타내고 있다.
서문지의 문복과 옹성은 5m이며, 반원형의 편문식으로 축조한 출입구의 너비는 3.5m이다.
웅성의 기저부 폭은 4.9m이며, 100x70cm, 57x53cm 석재로 축조한 높이가 2.6m 정도이다.
현재 성벽에는 치성이 5개소가 남아 있어 기록의 곡성(曲城) 1개소보다 4개소가 더 시설된 편이며,
남벽에 2개소, 서벽에 2개소 그리고 동벽에 1개소가 있다.
서남쪽 모서리의 치성은 평면형이 사각형이고 암문과 결합되어 옹성처럼 마련되어 있다.
동남 모서리와 동벽에 있는 치성은 평면이 사다리꼴이고, 치성의 입지는 모두 산의 지맥이 뻗은 능선의
위쪽이나 좌우의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해자는 산기슭을 따라 측벽이 이루어진 서벽과 동벽의 경우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성벽을 따라간다.
남벽의 경우 해자는 남쪽사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성벽은 정상부 능선을 따라가고 있어서 성벽과의
간격은 일정치 않다.
서벽의 경우 성벽에서 13.5m 정도 바깥쪽에 해자가 있으며 해자 내측 측벽의 높이는 약 40cm 외측
측벽의 높이는 약 70cm로서 대부분이 토사가 퇴적되어 메워진 상태이지만 그 윤곽은 양호한 편이다.
해자의 너비는 6 m 내외이다.
성내 시설에 대하여 『여지도서』 공해조에 의하면, 결성관(객사 41칸), 평근당(내동헌) 5칸, 망일헌
(외동헌) 3칸 등의 건물명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동헌과 그 옆에 나란히 있는 책실,
동헌입구에 1988년 복원한 아문과 그 전면으로 형방청 건물이 남아 있다.
동헌은 현재 정면 5칸, 측면 4칸의 평면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원래는 정면 5칸, 측면 3 원래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었던 것을 1982년 해체 복원할 때에 전면(前面)으로 1칸을 더 내 달은 것으로 보인다.
동헌 바로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는 책실은 정면 2칸, 측면 1 칸반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건물로
지붕은 흩처마 우진각지붕을 이루고 있다.
형방청은 정면 4칸, 측면 2형 방청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다시 꺾여서 정면 5칸, 측면 5칸, 측면 2칸이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ㄱ’ 자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나, 건물 내부는 일제강점기부터 1984년까지
결성지서로 사용된 관계로 적지 않게 변형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충청도읍지』 결성현 누정조에는 읍성의 동문이 진의루(振衣樓)라 기록되어 있어 문루가 건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성내에는 평근당, 망일헌, 천자고, 지자고, 현자고, 공고(工庫), 화약고, 화약고,
군기고 등이 수록되어 있어 『여지도서』의 기록을 보완해 주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 편에서)
현감이 정무를 보던 외동헌인 망일헌이다.
대청마루에 문은 더울 때 들어 올려 매달고, 추울 땐 내려 외풍을 막는다.
시원하게 잘 정리된 대청마루
외삼문과 망일헌
책실이다.
결성읍성과 관련된 문헌을 보관하던 곳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밖에서 보는 결성아문과 공덕비
결성아문
이 노란 나뭇잎이 무슨 나무인지 궁금하다.
감나무 잎에 초반에 이렇게 노란색인데, 6월 중순이면 푸른색으로 변하고도 남았다.
감나무가 아닌 건 분명한데, 모르겠다...
신목의 유래비 神木의 由來碑
중종조 때 영의정인 정광필의 증조부는 후덕하여 인성이 높았던 정귀령으로 경성현감을 지냈다.
그 후손이 경향 각지에 입신출세하여 잘 살고 있는 데 서울에서는 홍주병오순난장사 비문을 지은
정인보 선생이 있고, 홍주지역에서는 후손이 번창하여 풍족하게 살고 있다.
삼수 정귀령이 1425년 봄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 기념으로 심은 홰나무의 수령이 510여 년이 되던 1935년 여름
결성 주재소에 근무하던 야마구지란 왜경이 이 나무 가지를 치고 나서 졸지에 벙어리가 되어 귀국했다.
모진 왜경에게 신벌을 내린 영험이 나타난 뒤부터 역대 주재소 후임들이 계속 신목에게 제를 지내온 유서 깊은
나무가 되었다.
이 나무의 신목의 가치는 조선 중기의 전설에서 유래하며 광복 후에도 모 방위병이 전지를 하고 나서 신목의
벌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배관제 노인회장이 선두에 나서 신목제의 연례행사를 추진하자 그 아들 칠성 씨가 신목의 영험을 깊이 체득
하고 신목 유래비를 세울 것을 제창하며 기금 일부를 성금으로 내놓았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목비가 세워진다는 여론이 돌자 결성에 들렸던 임동권 박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민속적 기념비로서의 가치를 크게 알리자 신목의 영험을 알고 있던 문화재보호위원과 농요보존회원,
상록회원들이 성금을 기탁함으로써 결성면민이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1996.8. 결성면민 일동
(한자 투성이 신목 유래비를 즐풍이 풀어씀)
신목으로 추앙받는 형장청 뒤 둔덕에 자라는 홰나무는 수형이 보기 좋다.
형장청 刑將廳
이 건물은 조선조 건축양식으로 1991년 9월 20일 해체 복원 당시 현사縣司란 기록의 오류를 시정하며,
원래 형청刑廳, 형방청刑房應, 현옥청刑獄廳, 옥방청獄房廳, 포도청捕盗廳. 한말韓末에는 순검청巡檢廳 등으로
칭하였으나 18세기 결성현 관아도에 형방청, 장청將廳으로 합쳐진 기관이라 전하여 형장청 현판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일제강점기 때 읍성 안의 대부분은 기존의 관아는 관아대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 관아의 한 구석에 일본 경찰서나 하부 조직인 경찰의 지서가 들어앉았다.
이 주재소에 있던 왜경이 홰나무 가지치기를 하다가 벙어리가 됐다고 하니 천벌을 받은 것이다.
형장청은 결성읍성의 정문인 진의루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만나는 건물이다.
결성읍성의 정문인 동문을 둘러싼 옹성의 이미 완성했고,
안쪽 누각이 들어설 자리는 여전히 복원공사 중이다.
홍성군에는 홍주읍성과 결성읍성이 있다.
홍주읍성은 시내 중심에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도로가 생기며 대부분은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 복원할 수 있는 지역은 대부분 복원했다.
이제 결성읍성은 들어오는 입구인 동문의 옹성부터 새로 쌓고 진의루도 복원할 계획이다.
나머지 구간은 민가가 들어섰거나 농지로 사용되고 있어 수용해야만 복원이 가능한 곳이라
당분간은 이곳 동문만 복원이 가능하다.
홍주읍성이 궁금하면...
복원되는 읍성의 성돌을 보면, 돌마다 위치를 적은 청테이프가 붙어 있다.
돌을 가공할 때 위치에 맞게 미리 번호를 붙여 놓고 레고블록을 맞추듯 쌓으면 된다.
옹성 안에서 바깥쪽으로 본모습
옹성 밖으로 보이는 예전 성벽이다.
이후 성벽은 농경지의 담장 역할을 하며 짧게 끝난다.
마을에서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결성읍성이 어디로 지나가는지 물어볼 수 없어 대충 지나갈만 한 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조금 더 가자 결성초등학교가 산 아래 자리 잡은 걸 알았다.
교사 뒤로 이렇게 흙담처럼 쌓인 게 결정읍성이란 생각에 잠시 올라가 본다.
예상대로 흙담처럼 보인 게 결성읍성인 것이다.
학교 안에 있던 읍성은 건물과 운동장으로 사라지고 교사 뒤 산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근대를 지나 현대로 들어서며 읍성의 중요성은 사라졌다.
더 이상 읍성에 관심을 갖지 않자 소나무가 자라며 결성읍성과 한 몸이 되었다.
ㅁ 결성읍성 서문지
결성읍성의 서운 터이다. 둥근 원형은 서문 앞에 설치한 옹성의 흔적이다.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설치한 구조물로,
모양이 마치 항아리 같다고 하여 용성이라고 불렀다..
결성읍성의 문지로는 동문지와 서문지가 확인되는데, 모두 옹성을 설치하였다. (안내문)
왼쪽 하단에 비밀을 씌운 곳은 바깥 옹성을 두른 곳으로 들어와 성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복원 공사를 위한 것인지 비닐이 처져 있다.
옹성 안쪽은 돌로 쌓은 게 보이지만 높지 않아 동문과 달리 누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왼쪽 읍성 안쪽은 완전히 토성이고, 오른쪽은 밖이라 간혹 돌로 덧댄 곳도 있다.
관리가 안 되는 듯해도 성 밖으로 이렇게 예초작업을 해 한눈에 성벽인 지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석당산이라 석당산성이라 했다.
그런데 아래쪽에 결성읍성이 들어앉으며 결성읍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읍성이라고 하지만 규모가 작아 읍성 안에는 관아와 부속 건물이 들어설 만큼 규모가 작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간악하게 전국 대부분의 읍성에 의도적으로 도로를 내는 등의 이유로
대부분을 무너뜨리거나 없애다시피 했다.
결성읍성도 경찰서 주재소가 설치되고, 결성초등학교가 들어앉으며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결성읍성은 일부 구간의 토성은 산과 수평으로 연결될 만큼 낮은 곳도 있다.
ㅁ 결성읍성 치성(雉城)
결성읍성에는 모두 5개의 치성이 있다.
치성은 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벽이다.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싸울 때에는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만들었다.
결성읍성의 치성은 남쪽 성벽에 2개소, 서쪽 성벽에 2개소, 동쪽 성벽에 1개소가 있다. (안내문)
치성 밖으로 석당정이란 정자가 있다.
석당의 堂과 정의 亭은 의미가 비슷한 데 웬일일까 싶다.
결성초등학교를 지나면서 만나는 성은 사실 석당산에 쌓은 석당산성이다.
나중에 결성읍성이 자리 잡으며 먼저 생긴 석당산성 이름까지 흡수한 셈이다.
한국고고학전문사전에서 석당산성을 찾으면 결성읍성으로 안내한다.
석당정에서 바라보는 결성읍성의 치성
석당정과 치성
정상에 있는 산성 안쪽에 네모꼴로 둘러쳐진 작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 두어 칸자리 작은 누각이 있었겠단 생각이 든다.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수원화성 등의 제일 높고 조망이 좋은 곳에는 장대란 건물이 있다.
동쪽에 있으면 동장대, 서쪽에 있으면 서장대 등 방위에 따라 명칭도 다르다.
결성읍성은 규모가 작아 이곳에 군사 지휘본부인 장대가 들어서기 좋은 위치다.
장대가 있는 곳으로 예상되는 곳은 밖에서 보면 수평을 이루고 있어 장대가 있을 장소가 맞겠다.
정상에서 이제부터는 하산하는 구간이다.
이쪽 구간은 성밖에 석성을 쌓기도 해 가장 튼튼한 성벽이다.
여전히 보이는 석성 구간
이곳은 성 밖보다 성 안쪽이 더 낮다.
성을 지키기엔 다소 위험한 구간이다.
결성읍성에서 가장 높은 구간이다.
마을 쪽으로 내려오자 성은 급격하게 낮아진다.
서양 보리수 열매인가?
붉은 열매가 너무 많이 열려 나뭇가지는 구부러져 다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구간에 카페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으나 카페는 갈 일이 없어 결성읍성을 길을 내는 데 길이 없다.
발에 감기는 풀숲을 겨우 빠져나와 원점 회귀했다.
결성읍성의 담장 일부는 농경지의 둑으로 이용되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옹성을 포함해 겨우 50여 m 복원되고 마는 결성읍성이다.
결성초등학교 뒤에 있는 읍성은 토성이니 크게 손댈 게 없다.
다만 앞쪽의 성벽은 더 길게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성의 결성읍성은 석당산성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하단에 읍성을 설치한 새로운 방식이다.
산성은 고도를 높이며 토성으로 쌓여 있고, 하단에는 읍성이 깔끔하고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읍성에는 기본적으로 관아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으나 민가가 들어선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금 들어선 결성초등학교가 깔고 앉은 약 5,900여 ㎡의 면적이 전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없다.
석당산성은 결성읍성의 보루로써 의무를 다하는 외성인 셈이다.
현재 복원 중인 홍성의 결성읍성은 석당산성까지 범주를 늘려 역사와 문화를 살리면서도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읍민들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특별한 읍성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여 가림성 사랑나무 너무 사랑스러워 (9) | 2023.06.23 |
---|---|
보령읍성의 보령성곽과 해산루 (10) | 2023.06.22 |
조선의 해군 기지인 보령의 충청수영성 탐방 (12) | 2023.06.21 |
이천 설성산성은 눈이 남은 자리로 쌓았다는데... (11) | 2023.06.08 |
작아도 큰 역할을 한 여주 파사성 (10) | 2023.06.05 |
서울 호암산성의 실체 완벽히 살펴보기 (14) | 2023.06.03 |
밀양읍성도 밀양 아리랑만큼 유명해 (10) | 2023.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