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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서울 아차산과 용마산의 아차산성과 보루

by 즐풍 2023. 7. 14.

2023_111

 

 

2023.7.7. (금) 7.19km 산행, 08:50~12:00, 3시간 10분 이동, 30분 휴식, 흐림

 

 

서울에는 한양도성 외에도 많은 산성과 토성이 있다.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아차산성, 불암산성, 호암산성, 대모산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제법 많은 산성과

도성, 토성 등이 존재하지만, 무심하게 지나면 있는지조차 모른다.

대개는 산행을 하거나 일부러 찾지 않는 한 이들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불암산성, 호암산성, 한양도성은 해당 산행기 또는 산성·읍성 카테고리에 올렸다. 

강남의 나지막한  대모산에 대모산성이 있는데, 경기도 양주에도 같은 이름의 산성이 있다. 

대모산성은 오늘에야 검색으로 알았으니 언젠가 부담 없이 들려야겠다.

오늘은 이중에 아차산성과 풍납토성, 몽촌토성 세 군데를 둘러볼 생각에 배낭을 꾸렸다.

 

 

아차산·용마산 등산코스

 

 

아차산성을 가기 위해 제일 빠른 지하철이 아차산성인 줄 알고 내렸더니 아차산 어울림정원까지 1.4km이다.

광나루역에서 내리면 1.2km이니 200m 차이로 광나루역이 더 가깝다.

들머리를 어느 쪽으로 잡냐에 따라 거리가 달라진다.

 

 

 

자생식물원에서 800여 m만 오르면 아차산성을 만난다.

주변에는 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의 사진이 걸려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건진 유물들이다.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성벽 

 

아차산성은 아단산성(阿旦山城), 아차산성(阿且山城), 아차산성(峨嵯山城), 양진성(楊津城), 광진성(廣津城)

등으로 불린다고 한다.

하나의 산성에 여러 이름이 있는 걸 보면 이곳을 차지했던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안다.

 

 

ㅁ 아차산성

시대 : 삼국시대, 소 재 지 :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5-11 외


아차산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단성 또는 아차성이다.
「삼국사기」에 이 성을 286년(백제 책계왕 28)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396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 성을 빼앗았으며, 475년에는 백제 개로왕이 이 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과 1999년에 성벽과 성 내부에 대한 조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차산성은 부정 육각형의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1km가 조금 넘는다.

성벽은 높이 7m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안팎 모두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성벽 바깥쪽 기저부는 별도의 보강성벽을 쌓은 후 흙으로 다져서 덮었다.

해발 203m의 북쪽 모서리 가장 높은 곳에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고, 동··남쪽에 문지가 남아 있다.
계단상 지형을 이루고 있는 성 내부에서 여러 기의 건물터와 연못, 우물,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아차산성은 백제가 수도 한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으나 나중에 고구려와 신라가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과 시설물들은 7세기 이후 신라가 축조한 것이다. 

이 산성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안내문)

 

 

아차산성은 규모가 작다.

아차산성은 중간중간 보루로 연결되어 야구 경기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홈플레이트 다이아몬드 본진으로 들어오기 위해 공격수는 공격과 수비를 잘 거쳐 본진에 합류하며 이긴다.

아산산성은 여러 보루가 산재하여 본진과 유기적인 공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아차산의 본진도 사실 작은 봉우리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한 군데 입구가 보여 들어가 보니 이렇게 복원공사를 한 게 보인다.

 

 

아차산성은 한강 건너편에 백제의 토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다.

이 두 개의 토성은 사실상 백제가 한강을 차지했을 때 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위 내용에 보면 396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 성을 빼앗았으며,

475년에는 백제 개로왕이 이 성 아래에서 죽었다고 한다.

내용을 더 들어가 보면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왕성인 한성을 포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은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다고 하니 백제로서는 국난에 빠진 셈이다.

 

아차산성의 꼭짓점이다.

맨 위에 초소가 있었음직 하다.

아래쪽은 다소 넓은 평지가 있어 이곳에 여러 사령부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나지막한 성벽이 지나간다.

 

이곳이 평지로 군량미 창고나 무기고, 작전 사무실 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 유래


옛날에 삼청동에 점을 잘 친다는 사람이 있어서 임금이 그 사랑을 불러들였다.
"네가 접을 잘 친다고 하니 한번 쳐봐라." 하고는 통 속에 쥐 한 마리를 감춰 놓고,

"이 안에 있는 쥐가 몇 마리냐?" 하고 물었다

이에 그 점쟁이는 세 마리가 들었다고 대답했다.

"나쁜 놈! 한 마리인데 세 마리가 들었다고 하니 이놈을 죽여버려라."라고 임금이 말했다.

여러 장정이 몰려들어서 그 점쟁이를 붙잡아 나간 후 임금이 이상해서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두 마리 있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랑을 급히 보내 죽이자 말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죽이지 말라 가면서 손을 들어 표시하는 것을 본 백정이 빨리 죽이라는 것인 줄 알고 죽여버렸다.

그래서 아차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안내문)

 

 

 

처음 접하는 물레나물꽃

 

 

고구려의 기상이 서린 아차산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3백 m 남짓 되는 야트막한 산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리와 인근 시민이 가벼운 산행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며, 
40분 정도의 등산로를 오르면 한강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이 일대에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보루 20여 개가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 군사유적으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4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온달석탑, 대성암이 자리 잡고 있다.  (안내문)

 

 

거대한 바위 위에 세운 고구려정

이곳이 한 때 고구려 땅이란 사실에 다소 웅혼한 느낌을 받는다.

 

 

아차산일대 보루군


아차산 줄기는 용마산과 망우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전체를 아차산이라 하였다.
아차산 능선에는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堡壘)'라고 불리는 성곽이 있다.

보루는 흔히 300m 이하의 작은 성곽을 가리키는데, 군사적·행정적 종심지 역할을 하는 일반 성곽과

달리 주로 교통로나 요충지를 감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몇 개의 보루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위치한 것이 특징이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들은 장수왕 63년(473)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만들어져 양원왕 

7년(551)에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 밀려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은 인구와 물자가 풍부하고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 모두 중요하게 여겼다. 

아차산 보루군은 한강 유역을 넣게 조망할 수 있고 동쪽으로 왕숙천, 서쪽으로 중랑천 변의 남~북

교통로를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있다.
아차산에 흩어져 있는 약 20여 개의 보루 중 아차산 3보루, 아차산 4보루, 시루봉보루, 홍련봉 1보루, 

홍련봉 2보루, 용마산 2보루를 발굴 조사 한 결과, 고구려 보루는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깊게

박아 판축공법으로 성벽 안쪽의 토축부를 먼저 만들고, 돌을 덧대어 외벽을 석촉으로 마감하였다.
이는 백제나 신라, 가야 성곽과 다른 독특한 공법이다. 

'토삼석축공법'으로 불리는 이 공법을 통해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하여 효율성과 경제성을 높인

 고구려의 발달된 토목 기술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장마 때라 자주 비가 내리지만 가까운 잠실도 미세먼지로 시야가 좋지 않다.

우리나라가 미세먼지를 없애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어도 미세먼지를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편서풍의 영향으로 중국발 미세먼지의 피해가 분명한 데도 정부에선 아무 말도 못 하는 현실이다.

 

아차산 1보루

 

 

아차산 1보루

1보루(해발 250m)에서는 남쪽과 남동쪽으로 아차산성과 풍납토성, 몽촌토성 자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북동쪽으로는 아차산 5보루를 볼 수 있다.
아직 발굴조사되지 않았으나 고구려 토기가 여러 조각 발견되었고, 

성벽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동쪽과 남쪽 일부에 노출되어 있다.
발굴조사 된 다른 보루처럼 지면 아래에는 고구려 군사들의 생활시설인 여러 개의 건물지와 온돌, 배수로와 

석축 성벽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안내문)

 

 

건너편 아차산 5보루

 

 

 

 

아차산 5보루

 

아차산 6보루에서 남쪽으로 약 250미터 떨어진 작은 봉우리 (해발 267.2m)에 있다.

둘레 약 158미터, 내부면적은 약 1.818㎡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한강 남쪽의 암사동에서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잠실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정상부와 연결된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노출되어 훼손되고 있던 것을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이곳 정상의 돌무더기는 비교적 최근에 쌓은 것으로서, 무너진 성돌을 주워 사용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조각이 여러 점 발견되어, 삼국시대 보루를 파괴하고 통일신라시대 

고분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안내문)

 

 

하산하게 될 용마산 정상은 왼쪽 봉우리다.

 

 

아차산 3보루

둘레 450m, 면적 6,500㎡ 크기로 주변 보루 중 규모가 가장 크지만 일부 구역만 발굴 조사되었다.
지형상 평지와 비탈면 경계지점에 석축 성벽을 쌓고 성벽 안쪽에 생활시설을 만들었다.
건물지, 배수시설, 저장고, 단야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다른 보루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디딜방아의 볼씨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아차산 3보루가 아차산 일대 병사들의 식량지원처로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접시, 몸통긴항아리 등 토기 약 400개, 무기, 마구, 농기구 등 철기도 약 185개 확인되었다. (안내문)

 

 

 

 

아차산 정상과 소나무

 

 

이차산 정상 (해발 295.7m)


아차산은 주변의 용마봉 해발 348m, 망우현 해발 282m를 함께 부르는 표현이었지만,
요즘은 주변의 산지와 구분하여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여 이곳 아차산 3보루 지점을
'아차산 정상'이라 말하기도 한다.
아차산 3보루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55호로 지정된 아차산일대보루군 17개 중 한 개이며
일부 구역이 발굴조사되었을 뿐 문화재구역 대부분이 조사되지 않았다.
지면 아래에는 삼국시대 군사들의 생활시설인 여러 개의 건물지와 온돌, 배수로와 석축 성벽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안내문)

 

 

 

아차산 4보루가 아차산성보다 더 규모나 짜임새 면에서 실용적이다.

 

 

 

밖으로 뺀 치성도 보이고....

 

최근에 복원하는 과정에서 반듯하게 성돌을 잘 쌓는 바람에 훌륭하게 보인다.

 

 

 

도굴꾼들이 이런 산성엔 고대유물이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산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런 유물이 출토되어 박묵과에서 보여줄 게 많겠다.

이런 유물 하나하나가 모이고 모여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치雉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옆쪽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성에서 치와 치의 거리는 화살의 유효사거리 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80미터 정도의 

간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고구려 보루에서는 치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다. 

아차산 4보루에는 5개, 홍련봉 2보루에는 7개가 있을 정도로 치의 수가 많다.

이는 치가 방어의 기능과 함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어하는 강구조물의 기능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내문)

 

 

 

 

 

 

다행히 4보루를 개방하여 자세히 볼 수 있다.

 

아차산 4보루를 지나 용마산 줄기로 이어지는 능선에 도착했다.

이 헬기장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며 용마산 정상으로 이동한다.

 

 

용마산·아차산 보루들을 이어주는 보루 연결로 (아차산장성)


용마산·아차산 보루군은 고구려[용마산 1,2,4,3 보루/망우산 1보루/ 아차산 1,2,3,4.5보루/시우봉보로,

홍련봉 1.2보루와 신라[용마산 3.6.7보루] 유적으로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이 한강 하류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 요충지에 축성한 남한에 남아있는 최대의 고구려유적이다.
아차산장성(아차산~용마산~망우산~배봉산)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면목동 하북위례성) 토성으로 추정하며,

고구려가 점령 후에는 보루를 이어주던 연결로로 사용되었고,

신라가 점령 후에는 이곳에 장한성을 쌓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살곶이목마장의 담을 축성하였다.

아차산장성 길은 고운 흙을 다져서 만들어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곳의 작은 돌, 토기 한 조각도 함부로 옮기면 유적이 훼손되어 발굴이 어려워진다.

고구려보루와 아차산장성을 잘 보존하고 사랑하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고구려역사를 중국

역사라 주장)을 통한 역사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든든한 방패가 된다. (보수 : 2011년 4월 16일)

바르게살기운동 중합구 면목3.8동 위원회  (안내문)

 

 

사적 455호 용마산 4보루 (고구려)


용마산·아차산 보루군은 고구려[용마산 1,2,4, 5보루/망우산 1보루/ 아차산 1,2,3.4, 5보루/시루봉보루,

홍련봉 1,2보루와 신라 [용마산 3, 6,7보루] 유적으로 삼국(고구려• 백제신라)이 한강 하류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전략 요충지이다. 

용마산 4보루는 둘레가 228m이며 넓은 범위의 목탄이 포함된 부토층이 유실되어 마사암반토가 노출되어 있다.
동쪽의 민묘 주변으로 회흑색 연질토기와 대형 항아리 편, 대상파수 편이 관측되었고, 북서쪽에서는 철제 화살촉

한 점이 수습되었다.
동쪽 능선을 올라오며 보루와 접하는 지점에 석축구조물이 일부 노출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의 중간 지점인 

저지대는 집수시설로 추정한다.
1994년 구리문화원조사에서 동서가 별개의 보루로 추정하였으나, 2003년 서울시 성곽조사 보고서에서 하나의

보루로 확인되어 용마산 4보루로 명명하였다.
보루가 발굴될 때까지 유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작은 돌 하나도 함부로 옮기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보수: 2011년 11월 22일)   (사) 바르게살기운동 중랑구 면목3.8동 위원회  (안내문)

 

 

용마산 정상이다.

용마산과 망우산까지 하나의 아차산이었는데, 지역별로 자기네 산 이름 하나씩 갖고 싶었나 보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은 동서남북 어느 쪽이든 끝에서 끝까지 하나의 산인데, 이곳은 한 발 건너 산 하나씩 이름이 있다.

 

 

 

 

 

용마산 아랫마을로 내려가면 또 바쁘게 돌아갈 것이다.

산에 잇는 동안은 그런 번잡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용마폭포로 가면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떨어지는 폭포를 볼 수 있으나 시간이 막 지나가 볼 수 없겠단

생각에 반대방향으로 내려간다.

 

고갯길에 눈이 내리거나 얼음이 얼면 녹여줄 열선을 깔고 있다.

홈통에 열선을 까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겨울에도 안심하고 차량이 언덕을 오르내릴 수 있겠다.

 

 

아차산성은 서울의 북한산성이나 한양도성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역사적 중요성은 크다.

한강을 낀 서울을 가져야 한반도를 가질 만큼 저력을 기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이곳에 도성을 만들었던 백제는 고구려에게 땅을 뺏기며 웅진으로 천도했다.

마지막에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며 삼국을 통일했다.

아득히 먼 옛날이지만, 당시 격렬했던 이곳에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어 그날의 함성이 귓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