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17
2023.7.21. (금) 08:07~13:09, 5시간 산행, 10.8km 이동, 57분 휴식
가까운 데 있는 산성을 하나 또 알았다.
용인에 있는 할미산성이다.
할미산성은 남원, 성주, 용인, 철원, 포천에도 같은 이름의 성이 있고, 거창엔 할미성이 있다.
지난번에 충주에 있는 부모산성까지 다녀왔는데 이번엔 좀 더 늙은 이름의 할미산성이다.
산성과 읍성, 도성 들을 매번 이렇게 찾아다니다간 산성·읍성 박사가 되겠다.
이렇게 산성이나 읍성이 많다는 건 그만큼 외침이 많았다는 걸 방증한다.
세계 최강이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3중 성인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그런 성체도 오스만 터기의 대포로 결국 무너지며 로마는 역사 속에 남는다.
오늘 탐방하게 될 할미산성은 그 이름만큼 지혜를 갖고 격전을 버텨냈을까?
안타깝게도 이 성의 축성시기나 전쟁의 역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한글이 삼국시대 초에 만들어졌다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글로 전해지겠지만,
백성의 대부분은 까막눈이니 전해지는 역사는 전무한 편이다.
선장산(할미산성)-석성산-금박산 산행 코스
버스에서 내려 영동고속도로 지하 통로를 이용해 효종당부터 들렸으나
누군가 아침 일찍이라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잠시 밖에만 구경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살펴봤으나 특별히 찍을만한 풍경은 없다.
이후 산성까지 올라오는 구간 역시 평이해 산성 사진부터 올린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산성의 성벽을 볼 수 없다.
초입에 만난 산성 밖으로 15M 정도 올라가니 제법 잘 쌓은 산성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곳은 성돌이 상하좌우로 1M 정도 빠져나가며 무너지게 생겼다.
지금 보수하지 않으면 1000년을 지켜온 성벽이 무너지겠단 생각에 용인시청에 복구해 줄 것을 제안했다.
가타부타 연락이 있으면 좋겠다.
서성벽 북쪽 구간이 이 구역 성벽이 가장 온전한 상태로 제일 긴 편이다.
그 외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졌다.
용인 할미산성
산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용인 할미산성은 경안천, 탄천, 신길천 등 하천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석성산을 사이에 두고
고갯길(작고개, 백현) 형성되어 있어 동서 방향의 교통로까지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툰 삼국시대에 신라인이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7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성 내부에서 물을 저장하는 집수시설.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필각형 건물지, 적이 침임에 오는 것을 살피기 위한 망루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굽다리토기. 화살촉, 갑옷조각 등 천여 점이 출토되었다.
용인 할미산성은 산성 내 다양한 시설이 남아 있고 신라 산성의 축성법, 건축기법 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사용시기(6세기 중반~7세기 중반)와 사용주체(신라)가 명확하여 한강유역 신라 산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안내문)
할미산성(龍仁 할미山城)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산 23_1번지 일원에 위치하는 할미산(해발 349m)의 정상과 그 남쪽의 능선
일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할미산은 북쪽의 남한산성이 위치한 청량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석성산에 이르기 전 마지막 봉우리다.
할미산과 석성산의 동쪽에는 금학천(金鶴川), 운학천(雲鶴川), 양지천(陽智川) 등이 합류하여 경안천을 거쳐
한강에 이른다.
서쪽은 석성산에서 발원한 신갈천이 오산천과 진위천을 거쳐 서해의 남양만에 다다르고, 탄천이 북류하여
한강에 유입된다.
이렇듯 할미산과 석성산을 중심으로 세 갈래의 물줄기가 탄천, 경안천, 진위천으로 이어지고 있어 이곳을
통해 세 하천과 주변 평야지대를 공격할 수 있다.
할미산과 석성산 사이에는 작고개가 개설되어 있어 탄천과 경안천, 신갈천과 경안천을 연결하는 동서
방향의 교통을 통제하기에 유리한 위치이다.
즉, 할미산성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탄천과 경안천의 상류 및 남쪽으로 흐르는 신갈천의 상류를
형성하는 내륙수로의 요충에 해당한다.
아울러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 하천을 연결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이다.
이 지역은 서울과 남부지방을 연결하는 서울-광주-이천로와 서울-수원-평택-천안로의 남북교통로를 잇는
동서교통로의 일부로 사용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성에 대한 기록은 『중보동국문헌비고』에 폐성되었다고 처음 등장한 이후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績調査資料)』를 통해 현상과 축성 관련
전설이 약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후 몇몇 조사자료에 현상 기록이 남아 있으나 축성시기와 주체에 대한 기록이 없어 언제 누가 축성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전설에서 확인되는 대로 고려시대 축성 가능성이 있고, 성내 채집유물의 양상을 보면 삼국시대에
신라에 의해 축성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이 지역의 지명들 중에 구성·마성(駒城 • 魔城) 등은 이 성의 축성 이후에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마성(魔城)은『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와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서
전하는 축성전설에 나타나는 여성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판단된다.
산성은 성내부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길이 180m의 공유벽을 통해 북쪽의 내성, 남쪽의 외성으로 구분된다.
북쪽의 내성은 정상부를 포함한 높은 지대에 축조하고 남쪽의 외성은 경사면과 낮은 지대에 조성한 관계로
형태상 사모봉형형(紗帽峰形) 산성이다.
성벽은 협축으로 전체 둘레가 651m이다.
성내 평탄지중에 시설물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은 모두 5곳이다.
먼저 성내 가장 높은 곳인 북쪽과 남쪽 회절부, 성내 가장 낮은 곳인 동벽의 계곡부와 서벽에 접해 현재
헬기장이 들어서 있는 곳, 그리고 성을 동서로 양분하는 능선의 중앙부이다.
성내 시설물로는 성의 중앙에 위치한 추정 저수시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저수시설 이외의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성벽이 능선과 능선의 사면상에 축조되어 성의
평면형태가 울퉁불퉁하여 곡성이나 치의 설치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벽과 관련된 시설물은 수구와 토광이 있다.
매납유구는 정상부 평탄지의 서쪽 내벽에 붙어 부가구연장경호(附加口緣長頸壺)가 세워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부가구연장경호는 바닥을 원형으로 굴토 한 후 그 안에 작은 석재를 원형으로 돌려 기울지 않게 하였다.
매납유구에서 동쪽으로 약 2m 떨어져 판상 할석재가 노출되었는데 할 석재의 상면에서 바로 선고배 2점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의 양상은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반으로 편년 되는 토기류가 중심이다.
특히 성의 가장 높은 지역인 북벽에서 출토된 부가구연대부장경호와 그 주변에서 출토된 대부완은 구연부와
대각을 인위적으로 타격한 흔적이 뚜렷하여 의례나 제사의식 등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유적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출토유물로 보아 신라에 의해 축조되어 폐기 시까지 짧은 기간 동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사가 일부 지역에 한정되었으나 성내부의 모든 지역에서 신라 유물만이 확인되며,
통일신라 양식의 토기는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 후에는 크게 이용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벽·봉수 편)
산악자전거 팀 네 분이 앞서 올라왔다.
사진을 부탁드렸더니 풍경 위주로 잡는 바람에 인물은 덤으로 들어갔다.
뭐, 그래도 좋다.
할미산성 정상에서 가야 할 석성산을 바라본다.
석성의 한자도 돌로 쌓은 성이란 뜻일진대 사실이 그러한지 가면 알 수 있겠다.
할미산성 중앙에 동서로 가로지르는 축대를 돌로 쌓았다.
위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벽·봉수 편」에서 말하길.
"산성은 성내부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길이 180m의 공유벽을 통해 북쪽의 내성, 남쪽의 외성으로 구분된다."고
했는데, 즐풍 생각의 축대 아래쪽은 성을 관리하는 건물과 우물이 있어 흙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옹벽이나 축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 글에서도 '180m의 공유벽'이라고 했으니 성벽이라고 특정한 건 아니다.
안내문은 없지만, 우물지로 추정된다.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벽·봉수 편」에서는 할미산이라고 말하는 데 표지석은 선장산 할미산성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할미산이었지만 최근, 어쩌면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지명이 바뀌었으니
그때 선장산이라고 한자로 고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할미산성의 대부분은 무참하게 무너졌다.
성돌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으니 복원할 때 요긴하게 쓰겠다.
성을 쌓을 때 주변의 돌은 모두 옮겼다.
어쩌면 바위를 가르고 쪼개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돌을 잘 다루었으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아래쪽에 일부 온전한 성벽이 보이고 나머지는 모두 붕괴되었다.
현대전에 필요한 1인용 참호를 돌로 둘렀다.
성 안에 이렇게 참호를 만든 게 더러 보인다.
할미산성 탐방로엔 잡풀이 방치되어 걷기도 불편하다.
길은 성벽과 나란히 걷게 되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성벽을 실체를 만날 수 없다.
산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용인 할미산성은 경안천, 탄천, 신갈천 등 하천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석성산을 사이에 두고
고갯길작고기, 백현이 형성되어 있어 동서 방향의 교통로까지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툰 삼국시대에 신라인에 의해 쌓인
것으로 여겨진다.
5세기 중후반~7세기 중반 탄천을 중심으로 한 마부동, 보정동 일원의 생활유적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
유물이 모두 출토되고 있어 신라가 본격적으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용인지역에 백제 마을이
존재했고 거기에 고구려 영향, 이후 신라화 되는 연속적인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일대 신라인들이 할미산성의 축성과 운영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용인 할미산성은 산성 내 다양한 시설이 남아 있고 신라 산성의 축성법, 건축기법 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사용시기(6세기 중반~7세기 중반)와 사용주체(신라)가 명확하여 한강유역 신라 산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안내문)
남문인 이곳의 성벽을 한 번 들어내며 석성의 구조를 살폈다.
이곳은 돌로 채우는 판축공법을 보여준다.
서벽을 따라 올라가며 보는 성벽도 동벽과 다를 바 없이 대부분 무너졌다.
할미산성 서쪽 성벽
한미산성의 전체 둘레는 661m이고 평면형태는 남북으로 긴 장타원형이다.
전체적으로 외벽은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品'자 모양의 바른층쌓기 하였다.
2015년 3차 발굴조사에서 성벽 축조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서쪽 성벽 구간 일부를 해체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성벽은 암반 위에 바로 축조하였는데. 등고선을 따라 암반을 4단의 계단 모양으로 굴착하여
조성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층단식 기저부 조성방식은 지금까지 다른 신라성 조사에서는 밝혀내주 공법으로,
당시 할미산성을 쌓았던 신라 장인들의 수준 높은 기술력을 알게 해 준다. (안내문)
서쪽 성벽의 제일 높고 온전한 형태의 성벽을 보여주기 위한 나무 데크가 설치됐다.
할미산성을 한 바퀴 돌며 대강을 살펴봤다.
용인시는 인구 100만 명을 넘기며 특별자치구의 명칭을 받았다.
문화재청의 예산 지원과 용인시의 예산을 투입해 할미산성이 하루빨리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고속도로 상단을 지나는 산성교에서 625 전쟁에 참가한 터어키군 참전기념비를 바라본다.
해방된 후 전쟁의 참혹함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이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나라꼴을 보면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다.
국민은 2류인데, 정치는 여야 가릴 거 없이 꼴통들만 모였다.
성산교를 건너왔다.
석성산 아래에 있다고 성산교란 이름이 붙었다.
석성산부터 금박산을 거쳐 하산할 때까지 봉수대 터 외에는 특별한 건 없다.
돌로 쌓은 성이란 뜻을 가진 석성산 주변에 산성은커녕 흔적도 보이지 않는 다.
석성산이란 명칭이 무색한 데, 정상 주변엔 바위가 많아 이를 두고 석성이라 여길만 했나 보다.
바위를 은폐물로 가리고 화살을 쏘아대며 전쟁을 벌였다면 석성산이라 명칭이 틀리지 않다.
용인시 조망
정상 주변의 바위들
누군가 해변에서 몽돌을 가져다 바위 앞에 모셔놓았다.
위 사진에서 보듯 드러난 나무뿌리가 몽돌이 흐트러지지 않게 잘 받치고 있다.
이런 수고로 지나가는 등산객의 호기심을 불렀으니 재미있다.
석성산 봉수터는 보수정비공사로 정비 중이다.
석성반 봉수터 석축, 연조를 살피며 복원공사를 하는 것이다.
공사기간은 2023. 05. 15. ~ 2023. 11. 10. 까지로 용인시청에서 발주했다.
이 바위 위에 봉수터가 있던 걸 복원공사 하겠단 말씀이다.
석성산 봉수(龍仁 石城山 烽燧)
경기도 용인시 포곡면 마성리 석성산 정상 해발 471m 석성산성(5城Lli城) 내에 위치하고 있다.
석성산성은 일명 보개산성이라고 불리며,석성산 봉수는 보개산 봉수(實蓋山 烽燧)라고도 한다.
석성산 봉수는 고려시대 중기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운영되었던 봉수로 보인다.
동쪽으로 용인의 건지산 봉수(巾芝山 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성남 천천산 봉수
(穿川山 烽燧)에 보내는 역할을 했던 제2 내지봉수의 지봉 노선이었다.
당시 중앙의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봉수로로서 충청·전라·경상의 하삼도로부터
보고된 사항이 충주 망이산 봉수(望夷山 烽燧)에서 만나 죽산과 용인·광주를 지나는 간선 통신망의 중요한 봉수였다.
최초 기록으로는『세종실록(世宗實緣)』「지리지(地理志)」 경기 용인현에는 “봉화 1곳이 석성(石城)에 있다.
현의 동쪽에 소재하며,동쪽으로 죽산(현 용인) 건지산에이 어지고, 북쪽으로 광주 천천산(穿川山)에
이어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경기도 용인현 봉수에는 “보개산봉수는 동쪽으로 죽산부(竹山府, 용인)
건지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주부 천천현(穿川峴)에 응한다.”라고 하였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봉수 명칭이 석성에서 보개산 봉수로 변했음을 알 수 있으며,
석성산 봉수와 보개산 봉수란 이름이 같이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99년 발간된 『용인군지(龍仁郡誌)』의 봉수조에는 “을미년(1895)에 폐기되었다.”라고 하였다.
1999년 실측조사에서 성격이 밝혀졌다.
잔존 봉수는 할석으로 타원상의 모양으로 축조한 부분과 암반 부분, 그리고 동쪽의 평탄지에 마련된 건물터 등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 편)
봉수터가 있던 곳에 나무가 죽은 건지 아니면 공사에 방해가 되어 베어 건지 모르겠다.
용인 석성산 봉수
위치: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산 71-38 일원
본 유적은 석성산 정상에 축조환 식상산 농수터로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봉수가 있었던 곳이다
특히 조선 후기 [화장성역의궤]에 따르면 화성봉돈이 축조되면서 수원 화성의 봉수가 용인 석성산
봉수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어, 조선시대 봉수체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가치가 있다.
(안내문)
봉수터와 이곳 근무자들을 위한 건물의 상상도
용인 석성산 봉수터
• 유적 성격: 조선시대 봉수시설
용인 석성산 봉수는 석성산 정상인 471m에 만들어진 것으로 경기 남부에서 광주와 성남, 하남, 송파(한양)로
이어지는 교통로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용인 석성산 봉수는 조선시대 5거제 봉수 노선 중 제 2거 노선으로 삼남지방의 봉수와 안성 망이산 봉수에서
결집한 후 용인 건지산 봉수(원삼면 소재 용인 석성산 봉수-성남 천립산 봉수를 거쳐 한양 목멱산 봉수
(경봉수)로 이어진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화성 흥천산 봉수도 수신하고 있어 18세기 화성 봉돈 설립 이후 신설된 봉수 체계에
석성산 봉수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용인 석성산 봉수시설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봉수대 보호시설인 방호벽
연기와 불빛으로 국경의 위급상황을 알리는 신호 시설인 연조(불을 피우는 굴뚝 시설), 불을 켜기 위한 비품과
재료를 보관하는 창고,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다량의 고려~조선시대 기와, 도·자기편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돌을 사용하여 만든 네모난 형태의
시설에서 출토된 향로와 제기를 통해 석성산 봉수에서 중요한 의례가 행해졌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석성산 봉수가 조선시대 제 2거 봉수 노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수터 아래쪽에 있는 우물터와 건물지에 대해서는 2019년~ 2020년 5월까지 추가 조사를 실시하여 석성산
봉수의 구조와 운영 체제에 관한 기본 자료를 확보하였다. (안내문)
세월이 지나며 건물은 사라졌어도 그 자리가 어디였는지, 온돌의 구조까지 밝혀냈다.
용인 석성산 봉수터 건물지
• 유적 성격 : 조선시대 봉수시설 관련 건물지
용인 석성산 건물지는 2019년 5월~2020년 4월까지 총 3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에 축조한 축대 2개소와 건물지 4동, 우물지 2기가 확인되었다.
축대는 2개소가 확인되었으며, 모두 2단으로 조성되었다.
조성 방법은 자연암반 면에 할석(자연돌을 적당히 가공하여 만든)을 기대어 쌓았으며, 바른층 품 (品) 자형 쌓기,
들여쌓기를 사용하였다.
건물지는 총 4동이 조사되었으며, 1-4호 건물지는 초석과 구들(온돌) 시설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축대를 쌓아 평탄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건물지를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지에서 출토된 기와와 자기의 제작 시기는 15세기부터 조선 후기로 앞서 발굴조사된 석성산 봉수터의
유물과 동일시기로 판단된다.
석성산 봉수와 건물은 조선시대에 지속적으로 이용되다가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
출토유물과 구들 시설로 보아 봉수군(烽燧軍)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석성산 봉수의 운영 체계에 관한 기본 자료를 확보하였다.
용인시는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학술적 가치와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석성산 봉수터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추후 종합 정비 계획 수립, 봉수 복원 정비 등 보존과 체계적인 정비에 힘쓰고자 한다.
(안내문)
이 축대는 한 칸 위에 작은 건물이 있던 장소의 옹벽이다.
처음엔 산성이겠거니 하고 올라왔으나 옹벽으로 확인되었다.
건물지 주변의 기와 편
잠시 통화사 한번 둘러본다.
통화사로 들어가는 도로는 담장을 두른 게 산성처럼 보인다.
석성산에서 찾지 못한 산성을 여기서 만난 듯싶다.
이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싶어 다시 되돌아 올라와 산길로 내려간다.
나중에 두 길이 만난다는 걸 알고 웃음이 나온다.
금박산으로 가는 길에 군부대의 사격장이 있나 보다.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등산로 외에는 다니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었다.
구군가의 블로그를 보며 금박산 정상을 놓쳤다는 글을 봤다.
계단의 상단에 이런 안내판이 붙을 걸 보면 왼쪽에 보이는 큰 참나무 옆으로 15m 덩도만 올라가면 금박산 정상이다.
길은 낙엽이 덮여 보이지 않으니 적당히 알아서 올라가야 한다.
금박산 정상에 누군가 코팅한 종이로 금박산 정상을 알린다.
이곳에 올라올 것도 없이 길을 지나면 정상을 지나는 셈이다.
멱 조 현
메주고개의 유래
지금의 삼가리(삼가동) 근방에 아주 가난한 부부가 살았다.
이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했고, 자그마한 밭뙈기를 갖게 되었다.
그 해 지은 콩으로 메주를 만들었는데, 쇠파리 한 마리가 메주 위에 앉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기분이 상해 만들던 메주를 내던져 놓고 쇠파리를 잡기 위해 나무주걱을 내리쳤으나,
쇠파리는 잽싸게 다른 메주로 옮겨 앉고 정성스럽게 만든 메주는 엉망이 되었다.
더욱 화가 난 아낙은 쇠파리를 잡을 생각에 메주가 엉망이 되든 말든 나무 주걱을 휘둘렀다.
쇠파리는 찔끔찔끔 날아갔으나 아낙은 포기하지 않고 맨발인 채 쇠파리만 쫓다 보니 지금의 멱조현을 넘었다.
멱조현을 메주고개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아낙이 메주를 만들다가 쇠파리를 쫓아 넘었던 고개라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용인 삼가동에서 어정을 잇는 고개이다.
세월이 바뀌어 한적한 고개가 되고 말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이 고개를 넘어야 수원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안내문)
이곳 참호는 네 명이 앉아 사방을 경계하며 지킬 수 있게 잘 만들었다.
내려가는 내내 왼쪽엔 부대 울타리가 처졌다.
궁금했던 할미산의 할미산성은 대부분이 무너지긴 했지만 잔해로 그 전모를 살피기에 부족함은 없다.
잔해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산성을 복원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면 된다.
지금은 대부분 지역의 산성이나 읍성을 복원하며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한다.
돈 많은 용인시에서도 적극적으로 복원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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