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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고창 무장현 관아와 무장읍성은 다시 봐도 멋져

by 즐풍 2023. 8. 9.

2023_122

 

 

 

2023. 8. 2. (금)  오후에 탐방

 

 

오전에 고창읍성, 고창 판소리박물관, 고창고인돌박물관과 고인돌유적지를 다녀왔다.

고인돌박물관과 고인돌유적지는 아직 포스팅 작성 전이다.

고인돌유적지 탐방을 끝내고 주변에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무장읍성 주변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넘어왔으나

무장면 소재지에 마땅한 식당이 안 보여 시장을 뒤지다시피 했다.

 

무장읍성을 코앞에 둔 맛고을(☎ 063-564-8780)이란 식당에 들어가 코다리조림을 주문했다.

중년의 주인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식당인데, 생긴 지 얼마 안 된 집인 듯 깨끗하고 청결한 집이다.

제법 기다린 끝에 받은 음식은 의외로 맛있는데, 너무 매워 혀는 불이 난 듯하고 콧물도 자주 닦아야 했다.

매운 걸 알았다면 미리 안 맵게 주문했을 텐데, 아쉽다.

 

음식을 다 먹자 주인아주머니는 코다리찜 그릇에 남은 양념을 보더니 맛있는 음식을 왜 다 안 드셨냐고 한다. 

음식이 맛있어서 밥 한 그릇 더 시켜 싹싹 긁어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매워 다 못 먹었다고 하니 아쉬워하신다.

화성의 어느 회사 식당을 운영했으나 회사가 분당으로 이사 가자 그쪽 임대료가 비싸 식당 운영을 포기했다고 한다.

코다리조림에 많은 양념이 들어갔다며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철철 넘치는 재야의 숨은 고수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 김노(金蘆)가 쌓은 길이 약 1.2km의 평지읍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 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동헌이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 441m)·높이 7척(약 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 638m)이고 문은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무장현관아와 읍성은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성 주위에 있었다는 해자는 가장 낮은 지대인 진무루 앞인 이곳일 텐데, 해자를 메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진무루를 둘러싼 옹성 안에 들어와서 보는 개거식 문 위에 자리 잡은 누각

 

이번엔 옹성에 올라가 옹성과 함께 진무루를 잡아본다.

 

옹성에서 바라보는 무장현읍성의 성벽

 

진무루 앞 옹성은 양쪽으로 여장을 은폐 삼아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근총안과 원총안이 마련되었다.

옹성엔 이렇게 양쪽으로 여장을 설치해 방어와 공격이 유리하다.

현대전에서도 시가전이 벌어지면 옹성은 유리하게 쓰이겠다.

 

진무루로 들어와 시계방향으로 성벽을 돈다.

 

 

 

성벽을 돌기 전 남문인 진무루와 웅성을 잡아본다.

 

작년에 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한창 석성을 쌓는 복원공사 중이었는데, 이젠 전부 복원되었다.

이렇게 구부러진 회절부는 당초 토성이었으나 최근 복원하며 밖에 석성을 쌓으며 보강했다.

 

중간에 나무가 있는 곳부터 복원한 구간이다.

 

 

 

 

 

 

1/3 정도가 토성으로 남아 있다.

토성은 토성대로 남겨두면 좋겠다.

 

 

 

 

 

한쪽은 소나무 일색이더니 이번엔 오동나무가 많다.

오동나무는 속성수이니 빨리 잘 자란다.

 

 

 

관아 뒤편 사두봉 일대

 

 

무장읍성(高敵 皮長邑城)

 

사적 제346호(지정 명칭은 무장현관아와 읍성).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무송현(菜茂縣)과 장사현(長沙縣〉이 통합되면서 그 중간지점에 치소를 정하고 축조하였다. 

조선시대 읍성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현존하는 건물은 동헌(翠白堂), 객사 <松沙官), 

남문(鎭茂樓)이 있으며, 문헌기록과 고지도를 통해 35개의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緣)』을 비롯한 『무장읍지(茂長邑誌)』 등 여러 지리지에 의하면 태종 17년(1417)에

처음 축조되었다.

『무장읍지(茂長邑誌)』성곽조에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1417년 병마사 김저래(金著來) 때

읍성을 쌓고 동헌과 관사를 세웠는데,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끝마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장지역에 읍성이 축조된 유래는 이곳에서 30리 떨어진 서쪽에 어항과 무역이 활발한 법성포가 있었는데, 

고려말부터 왜구의 노략질과 침입으로 인해 장사 마을에 피해가 심하였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서해안 연변의 어획보호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1417년에 읍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에 중간지점인 무장에 터를 잡고 진성을 쌓고 고을 이름도 첫 글자를 따서 무장으로 하여 현 지명으로 삼았다.

무장읍성은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 입지 하는 평지읍성이다. 

행정적인 기능을 우선하는 다른 읍성들과 달리 군사적인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더 강했던 읍성이다.

체성은 상부구조가 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지만 협축식의 석성으로 보인다

체성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각종 문서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먼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석성으로 둘레 658보'로 기록하고 있고 문종실록(文宗實錄)에서

“둘레 1470척, 높이 7척, 여장의 높이 1척, 문 2개소가 있는데 옹성이 있고, 해자의 둘레는 2,127척(尺)이고 적대가

없으며, 여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資)』에 "무장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 2,639척, 높이 7척, 안에 우물이

  있다." 기록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기록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讀調査資料)』에 “무장읍성은 석축 

둘레 550간, 높이약 1간 반, 둘레 550간, 높이 약 1간 반, 거의 붕괴하였다.”고 하였다.

1872년 무장현지도에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를 표기하고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1417년 초창 이래 1581년에 개건 되었고 이후 계속적인 개건과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근래 남문 

주위의 정비 • 보수가 이루어졌다.

문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봉은 팔작이고, 통로는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석축으로 쌓여있다.

문루의 가장자리에 난간이 돌려져 있다.

 

해자는 문종실록에 따르면 둘레 2,127척으로서 거의 성벽의 2배에 이르고 있다. 

성벽에서 6.0m 정도 바깥쪽에 해자가 있으며, 안쪽의 양 벽면에는 할석재를 쌓아 보강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해자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읍성 내의 건물은 현재 남아있는 객사와 동헌은 각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객사는 고려시대부터 각고을에 설치하던 건물로 객관이라고도 한다.

면사무소로 쓰이던 객사는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객사는 중동국여지승람』 누정조를 통해 세종 11년(1429)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1988년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인조 27년(1649), 영조 12년(1736)에 중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무장현지도」에 의하면 사두봉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좌 • 우익헌은 각각 정면 4칸이다.

동헌은 현감이 집무하던 곳으로 객사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계속적 인보수와 조선후기지방지도(朝鮮後期地方地圖)(1872)에 나타난 배치양상을 보면 무장읍성은 객사와 관아, 

관아부속 건물, 병영 • 시장지역, 부속관아 창고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객사지역에는 내삼문, 외삼문, 관아지역에는 내아, 책실, 형청, 장청, 현사 등 문헌기록에서 확인되는 건물은 읍성

내 • 외부를 포함하여 32개소에 이른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편집)

 

무장현읍성의 고지도를 보면 동문은 누각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누각은 없어도 읍성의 보호를 위해 문은 달았을 테니 지금이라도 문을 달면 좋겠다.

 

옹성에서 보는 성 안쪽문

 

여닫이 문이라도 달아야 한다.

 

 

 

뒤돌아 본 동문 

 

군데군데 걸린 깃발이 초병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문인 진무루가 보이는 걸 보니 무장현읍성을 한 바퀴 돌았다.

 

성벽 밖에 있는 우물 

 

사두봉 앞 읍취루 밑에는 응급차가 두 배 대기 중이다.

 

 

 

 

 

안쪽에서 보는 읍취루

읍취루 복원기에 읍취루의 뜻을 적어 놓은 내용을 보면,

읍(挹)은 잡아당길 읍으로 자동사이고 동헌의 당호(堂號)가 취백당(翠白堂)이라

푸를 취(翠) 자를 취하여 읍취루라 하였다.

현감이 수시로 지역의 선비들을 모아 민원을 청취한 처소였음을 건물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읍취루에서 내려다본 작은 연못엔 연이 심어져 있다.

 

읍취루

 

어느 사극인지 영화인지 모르지만 무장현읍성을 전세 내 맘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한다.

돈을 주고 하루 임대했으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방문객은 괜한 봉변을 당하는 느낌이다.

 

그 바람에 객사인 송사지관은 제대로 찍지도 못했다.

 

송덕비

 

고목나무에 내려앉은 이끼

 

고목 밑둥지의 특이한 형상

 

 

성내리 사두봉과 용소

 

무장 고을 터를 반사[서리고 있는 뱀] 형국이라 하여 조석으로 양쪽 용소에서 안개가 솟아 나와 

고을 안을 뒤덮으면 경치도 좋거니와 이 기운으로 고을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게 되고 

또한 많은 인걸이 배출되어 옛날 무장 현령의 세력이 드세었다고 한다. 

예부터 ‘고창은 성자랑’, ‘흥덕은 양반 자랑’, ‘무장은 아전 자랑’ 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무장 고을은 지방세가 강하여 항상 이 고을에는 역량 있는 현감들이 부임해 왔다. 

만약 사람만 좋고 역량이 부족한 현감이 왔다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와 같이 바닥이 드세고 배타성이 강하다 보니 시장이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6㎞나 떨어져 있는 안진머리장[현 해리면 안산리 이상동]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이 장터는 사두봉에서 마주 보이며, 장날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시끄러우므로 

뱀이 이곳을 넘보아 장날이면 젊은 청년 한 사람씩 희생이 되었다. 

고을의 역대 현감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어느 날 시주를 얻으러 온 중이 사두봉을 깎아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리게 해야 한다는 묘책을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사두봉을 깎아 메워 버리면 옛날처럼 번창하는 기운이 차츰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현감은 이제야 무서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고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두봉에서 안진머리장이 안 보이게 깎아내리고 뱀의 두 눈인 용소를 메우도록 했다.

그 뒤부터 안진머리장날에 싸움을 하고 살인을 하는 변은 없어졌지만 과연 무장에서 인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를 또 걱정하던 중에 도사 한 분이 지나다가 이 말을 듣고 일러주기를 사두봉에 나무를 심어

이 나무가 예전 사두봉 높이만큼 자라게 하고 남산 밑에 개구리 못을 만들면 이 뱀의 먹이가 생기게 되어

무장 고을은 다시 번영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고을 현감은 깎아내린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도 만들었다.

이 개구리 연못 자리가 지금의 무장 장터이고 객사 주변의 나무들은 그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출처_디지털 고창문화대전)

 

 

동헌인 취백당

 

취백당 옆 노송

 

동헌으로 들어오는 내삼문 

 

취백당에서 다시 보는 사두봉 

 

 

 

무장현읍성을 대충 둘러보고 나와 진무루의 옹성에 설치된 배수구를 본다.

옹성 위 용도에도 비가 내리면 물이 빠져야 하니 이렇게 배수루를 만들었다.

 

 

고창읍성은 우리나라 3대 읍성 중 가장 작지만 가장 아름답다.

고창의 도 다른 읍성은 무장현읍성은 평지읍성으로 고창읍성보다 더 작은 읍성이다.

이제 성벽 복원은 끝났고 성안에 관아 등 건물은 고증받아 복원할 것으로 보인다.

지방정부의 군수님이 바뀌었더라도 전임 군수님처럼 읍성에 관심과 애정이 계속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