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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잼버리 청소년들 고창의 고창읍성(모양성) 매력에 풍덩...

by 즐풍 2023. 8. 5.

2023_120

 

 

 

2023.8.2. (수) 오전에 탐방

 

 

아내인 목우가 오늘부터 휴가다.

작년 가을에 한 달간 고창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인상 깊게 봤던 고창의 명소를 함께 보기 위해 내려왔다.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당연히 고창읍성이다.

고창읍성은 순천의 낙안읍성, 서산의 해미읍성과 함께 우리나라 삼대읍성의 하나이다.

그중 고창은 성은 가장 작으나 세 개의 성문이 옹성으로 둘러싸인 데다 야산을 끼고돌아 가장 아름답다.

우리나라는 산성과 읍성, 도성이 많아 이들을 일일이 다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중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짜임새 있고 아름다운 건 역시 수원 화성이다.

조선 개국과 맥을 같이하는 서울 한양도성은 크기는 물론 자연과 어우러진 형태가 일품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도 영욕의 글레를 쓰고 있으나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남쪽에 있는 금정산성도 성 안에 마을이 있는 만큼 읍성의 기능도 함께하면서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청주의 상당산성, 공주의 공산성, 단양의 온달산성, 오산의 독산성 등이 제법 눈에 띄고,

오산의 독산성, 화성의 당성, 충주 정북동토성, 평택의 평택농성은 작아도 아름다운 산성(토성)이다.

아직 전국에 있는 수많은 산성과 읍성을 다 다녀보지 못했으니 그 아름다움이나 우수성을 다 알지 못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좋아했던 산행보다 산성 탐방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할지도 모른다.

산성이나 읍성 등을 탐방하며 우리 조상들이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는 슬기로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양성공원에서는 천막을 치고 바자회가 열린다.

 

 

ㅁ 고창읍성(高敞邑城)    
     사적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倭侵)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로 만들어진 읍성이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m로

동, 서, 북 문과 3개소의 옹성(甕城),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字)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현(東軒), 객사(客舍)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官衙)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兵火)등으로

소진(消盡) 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 오고 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踏城) 풍속이 남아있다.  (안내문)

 

외지인은 입장료 3천 원을 내면 지역상품권으로 전부 돌려준다.

고창에서만 쓸 수 있는 상품권이므로 지역 상인들에게 돌아갈 몫이니 아이디어가 좋다.

 

 

ㅁ 고창읍성

 

고창읍성의 축성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고창읍성의 관아건물 보수 시에 나타난 상량문과 

각종 문헌 및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이 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까지 

전라좌우도 19개 군·현에서 구간별로 분담하여 축성한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각자(刻字) 되어 있다.

그중에는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흔적이 있으며, 동문 옹성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

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서 이를 해석해 보면, 

고창읍성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창현성곽조(高敞縣城郭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하였으므로 성종 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 17년

(1484) 이전의 계유년으로 축성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다.

무장현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이 되었으므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

이후의 계유년이 되므로 고창읍성은 1453년의 계유년에 축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은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병이 없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행렬이 절정을 이룬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 번 돌아야 하고 일정한 지역에 그 돌을 쌓아두도록 하였다.

특히 윤삼월의 효험을 강조하고 있음도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 밟아 굳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머리에 돌을 이게 하는 것도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다지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출처_고창군청, 문화관광)

 

 

성 안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게 옥사이다.

옥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에 두는 것은 권선징악의 본보기로 죄짓고 살지 말라는 경고인 셈이다.

 

 

□ 북문인 공북루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은 화강석 돌기둥 위에 둥근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인 공북루(북문)와 등양루(동문), 진서루(서문) 등 3개소의 성문이 있다.

성문 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여담)을 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안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근총안, 원총안)을 만들어 놓았다. 

공북루 전후 사적기와 상량문에는 순치 3년 (인조 24년 : 1646) 병술 12월에 공북루를 소건하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_고창군청, 문화관광)

 

옹성 위에서 보는 공북루

 

성벽 밖은 봄철에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데, 지금은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었다.

 

 

 

공북루와 옹성

옹성은 산성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대부분 읍성에서 볼 수 있다.

산성은 산이란 특성 때문에 옹성을 지을 공간이 거의 없고 읍성은 공간이 있을뿐더러 

성문이 뚫리면 승패가 갈리기 때문에 옹성이 많은 편이다.

 

북동쪽 성벽은 거의 일직선으로 곧게 쌓아 방어가 불리하다.

하여 치성으로 그 단점을 보완했는데, 치성에서 보는 성벽의 모습이다.

 

3·1 운동 때 이 치성에 올라가 만세를 외쳤다고 안내하고 있다.

성벽 위라 읍내에서 "대한독립 만세"소리가 힘차게 울렸을 것이다.

 

 

 

이곳 옹성은 건너편 치성까지 경계하기가 좋다.

양쪽에서 화살이나 총으로 쏘면 완벽하게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이곳 옹벽의 여장에서 나머지 성벽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다.

 

고창읍성의 동문인 등양루(登陽樓)는 문이 잠겨 안팎으로 이동할 수 없다.

옹성에는 옹성 안쪽으로 들어온 적을 사살하기 위한 여장과 근총안이 마련되었다.

물론 밖을 향한 근총안이나 원총안도 있다.

이렇게 옹성 위의 성벽에 여장을 두르고 지날 수 있게 만든 길을 용도(勇道)라고 한다.

 

등양문의 옹성은 남쪽으로 출입구가 마련되었다.

 

 

 

 

 

 

 

성벽 위에는 황토색의 시멘트로 처리돼 황토흙을 깐 느낌이다.

잘 자란 소나무가 가지를 뻗어 성벽 위를 지나가니 그늘이 져 걷기 좋다.

 

 

 

 

 

 

 

남성벽의 치성을 지나며 순성한다.

 

 

 

 

 

고창읍성의 서문인 진서루(鎭西樓)이다.

정문인 공북루, 동문인 등양루, 서문인 진서루 모두 옹성으로 둘러싸였다.

옹성 위의 여장과 용도가 잘 드러났다.

옹성에도 철벽 수비를 위해 방어문을 달았으면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든다.

 

 

 

등양문이나 진서문은 공북루와 달리 누각은 전면과 후면은 여닫이 문이 설치되었다.

보통 누각은 벽이 없이 설치되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문이 설치되어 방어와 공격에 유리하다.

 

진서루는 복원한 지 오래되었는지 옹성에 풀이 많이 자란다.

방문객을 위해 예초기로 두세 번 밀어내면 좋겠다.

 

 

 

북치성

 

고창읍성은 한 바퀴 순성하며 공북루로 다시 들어왔다.

이 옹성은 트럭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너비라 읍성 안 관아 건물을 복권하거나 행사가 있을 때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

 

 

즐풍목우가 함께한 휴가의 첫 일정은 고창의 고창읍성 순성으로 마무리했다.

그동안 대부분의 일정은 즐풍 혼자 했는데, 둘이 함께하니 즐풍목우의 사자성어가 완성된 느낌이다.

삼대읍성의 하나인 고창읍성은 나지막한 산을 끼고 있어 가장 안전한 읍성에 속한다.

한 때 이곳을 점령했던 고창여고까지 성 밖으로 나가며 그동안 복원된 관아 건물로 고창읍성이 완벽히 복원된 느낌이다.

고창읍성을 포함한 우리나라 삼대읍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