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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서울 한강 인근의 풍납토성 살펴보기

by 즐풍 2023. 7. 18.

2023_112 

 

 

2023.7.7. (금) 오후에 20여 분 탐방

 

 

서울 아차산과 용마산에 있는 아차산성과 보루를 살펴보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풍남토성에 왔다.

풍납토성은 사전에 검색을 통해 중간에 마을이 들어서면 일부 끊긴 지역이 있는 걸 알았다.

중간 마을을 지나면 풍납토성은 서울 아산병원 앞을 지나가는 도로까지 이어진다.

막상 현지에서 풍납토성을 탐방할 땐 이 사실을 잊고 청호역(풍납토성) 인근 토성만 탐방했다.

연식이 오래되다 보니 메인보드의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아 다른 구간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은 것이다.

 

 

 

 

ㅁ 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 風納洞 土城)


백제시대 초기(한성백제기) 한강변에 흙으로 쌓은 평지성으로 풍납토성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3.5㎞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유실되어 

지금은 2.1km 정도만 남아있다. 

발굴조사에 의해 성벽 기초부는 너비가 43m, 높이가 11m가 넘는 대규모의 토성으로 확인되었다. 

성벽의 축조는 중심부 하단에 뻘흙을 깔아 기초를 다진 후 그 안팎으로 진흙과 모래흙을 다진 

판축기법으로 중심 토루(土壘)를 쌓아가며, 일부에 식물유기체를 깔거나 자갈을 이용하여 

토루를 보강하는 등 독특한 축성기술을 동원하였다.

1925년(을축년) 대홍수 시 중국제 청동자루솥, 허리띠장식 등 상류층이 사용한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 주목받아왔다. 1936년에 조선고적(제27호)으로 지정된 바 있으며,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도 경당지구 발굴조사를 거치며 한성백제시대 

첫 도읍인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발굴조사가 지속되며 풍납토성이 

백제의 최초 도성이었음은 학계의 정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토성 내부 발굴조사에서 중요 유구들과 수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 상수도로 추정되는 토관, 백제 초기 최초의 동서남북대로 유구, 대형 주거지, 백제 최초의 

지상식 기와 건물지, 신전 추정 초대형 건물지, ‘大夫’, ‘井’ 자 등이 생겨진 항아리 등 한성백제기 

최고 상류층 사용 주요 시설이 확인되어,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의 역사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시대 최고의 왕성유적이다.

※ ‘광주풍납리토성’은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명칭변경 되었다.(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ㅁ 풍납토성 의 보존 · 활용 배경


「서울 풍납동 토성」(사적 제11호)은 백제 시조 온조가 한강유역에 세운 최초의 도읍지이다. 

기원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도읍지를 웅진(공주)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약 500년간 사용되었고, 

토성 내부에는 긴 시간만큼이나 많은 백제의 문화재가 남아있다.

풍납동 토성은 성벽 길이만 약 3.7㎞이고, 토성 내부 면적은 1백만㎡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학술 연구 결과 성벽축조를 위해 연인원 135만 명 이상을 동원해서 15m 높이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현재는 높이 7~9미터 내외로 2㎞ 길이 성벽만 남아있다.

풍납동 일대는 해방 이전까지 논과 밭으로 이용되었는데, 196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발달로 인해 

도시로 변화하였다.
이후 1998년 경당연립재건축 부지에서 신전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유구가 발견됨에 따라 풍납동 

토성 내부지역은 보존하도록 결정되었다.
1970년대 천호역 인근에 위치한 북성벽 복원사업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발굴조사, 토지매입, 성벽 정비 등

다양한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며, 단순히 문화재를 보존하는 목적에서 벗어나 느끼고 볼 수 있는

활용의 관점에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최근에 풍납백제문화공원이 완성되어 주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현재는 성벽 문지 

보호각 조성, 역사공원 조성, 둘레길 조성 등 문화재와 주민이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앞으로 풍납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관광도시로 변모해 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출처_송파구청, 문화관광)

 

 

풍납토성의 원형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카카오 맵으로 풍납토성을 보면 북성벽에서 남성벽으로 연결되는 동성벽의 160여 m 구간은

주택이 들어서며 끊어졌다.

한강변 쪽의 서성벽은 올림픽대로가 놓이고, 이곳도 주택이 들어서며 사라졌다.

어쩌면 오래전에 한강이 범람하며 자연스럽게 풍납토성이 사라진 게 먼저일 거란 생각이 든다.

북성벽의 풍납토성 일부 구간이 차도가 지나가는 절단된 지점으로 작게 돌며 탐방을 짧게 끝낸다.

 

 

 

백제의 성곽의 변화는 첫 도읍이었던 위례성(지금의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500년간의 한강 중심 지역인 

한성시대가 주를 이루고 공주의 웅진시대와 부여로 수도를 옮긴 사비시대를 합한 200여 년간을 나누어 

살펴야 할 것이다.
백제국은 본래 5부로 되어 37군과 200여 성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도합 76만 호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의 쟁패로 일상적으로 성을 중심으로 살면서 전쟁에 대비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한성시대의 성곽은 위례성·탕정성·북한산성 등 16개가 있다. 

이외에도 목책시설이 8회에 걸쳐 등장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은 도성인 위례성이었다.

BC 11년(온조 8) 2월에 말갈 군사 2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에워쌌으나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자

열흘이 지나 적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돌아가거늘 정예한 군사를 뽑아 쫓아가서 단번에 이기고

적병 5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BC 6년(온조 13) 9월에 성을 쌓고 대궐을 세우고 BC 5년(온조 14)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7월에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그곳에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7년 봄에 알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살랐다.

위례성은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비정되는 바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판축기법으로 모래와 흙을 한 층씩 다져 쌓았다. 

현재 약 2.1㎞ 정도가 남아 있으며,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전체 길이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루왕 때는 신라의 와산성을 두고 서로 공방전을 벌였다. 132년(개루왕 5) 2월에 북한산성을 쌓았다.

 210년(초고왕 45) 2월에 적현과 사도 두 성으로 쌓았다. 

286년(책계왕 1) 왕이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근초고왕은 371년에 평양성을 공격, 고구려왕을 죽이고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377년(근구수왕 3) 10월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 침공하였다.

진사왕 대에는 말갈과 고구려에게 대체로 패배하는 시기였다. 398년(아신왕 7) 3월에 쌍현성을 쌓았다. 
469년(개로왕 15) 10월에 쌍현성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의 병졸들을 나누어 수비하였다.

474년(개로왕 21) 9월에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한성을 에워싸고 백제 개로왕을 죽였다.

그리하여 한성시대가 막을 내렸다.

백제의 성은 풍납동 토성과 정주의 정북동 토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성으로 분류된다. 

그리하여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테뫼식 산성이 주류를 이룬다. 

목책을 상대적으로 많이 세워 활용하였고 토축 특히 판축기법이 일찍 발달하였다.

                                                                                  (출처_선조들의 발자취, 성과 옛도로 발췌)

 

 

 

풍납토성의 전체 길이는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현재 약 2.1㎞ 정도가 남아 있으나 북성벽 일부만 탐방한다.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동성벽에 주택이 160여 m나 들어서며 성벽이 사라진 걸 사전에 알았으나

막상 현지에 도착하자 까맣게 잊어 나머지 구간은 탐방하지 못했다.

사실, 풍납토성의 나머지 구간도 보고 있는 구간과 동일한 규모의 토성이니 본 것이나 다름없다.

 

 

 

 

백제가 고구려, 신라와 각축을 벌이기 전 한강유역에 먼저 정착했다.

당시 한강유역은 제방이 없었기 때문에 풍납토성의 서성벽이 제방역할을 했을 것이다.

잘 나갈 땐 고구려와 몇 번의 격전을 치르며 잘 막아냈으나 개로왕은 고구려와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백제는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한다.

60여 년이 지난 후 사비, 지금의 부여로 다시 천도하게 되며 영토가 점점 작아진다.

 

서울지역에 백제가 만든 성은 꽤나 많은 편이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보이는 것만 해도 북한산성, 아차산성, 위례성(풍납토성) 탕정성 등이 있다.

북한산성이야 워낙 바위가 많으니 자연지형을 이용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고,

아차산에는 주요지점마다 보루를 쌓는 형식으로 적군과 대치를 벌였다.

반면 평지인 풍납토성은 토성을 높고 넓게 구축하며 많은 노동력이 들여 잘 쌓았다.

 

 

 

이렇게 높고 긴 토성을 장비도 변변히 없던 초기 백제 시대에 쌓았으나,

고구려에 패전한 474년에 개로왕이 전사하며 백제의 한성시대는 막을 내리며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오전에 아차산성을 탐방을 끝내고 이어서 오게 된 풍납토성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토성을 만났다.

이곳을 지나 잠시 후 몽촌토성으로 이동하겠지만,

서울은 벌써 1,500여 년 전에 백제의 수도로 약 500여 년을 보낸 셈이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할 때까지 잠시 고구려 영토이기도했으니 삼국시대부터 서울의 중요성이 부각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