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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몽촌토성은 백제가 서울시민에게 준 선물이야

by 즐풍 2023.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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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7. (금) 오후에 잠시 탐방

 

 

오전에 아차산성과 풍납토성에 이어 오늘의 마지막 미션인 몽촌토성 순성 차례다.

지난번에 한양도성을 순성 하며 탐방 대신 예전부터 써 오던 순성이란 말을 쓰려니 아직 낯설다.

앞서 살핀 풍납토성은 단절된 구역을 더 지나 남아있는 구간까지 갔어야 했다.

사전에 카카오 맵의 스카이 뷰로 검색을 했어도 밤새 기억이 사라져 놓치고 말았다.

이렇게 기억이 사라지는 걸 떠나 과거의 좋고 나쁨도 함께 버리고 미래만 생각하면 좋겠다.

과거에 매몰되는 것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희망을 가득 안는 미래지향을 꿈꾸자 

 

 

 

 

몽촌토성은 지하철 5호선, 8호선 9호선이 지나가는데,

각자 편의에 따라 올림픽공원역, 몽촌토성역, 한성백제역 등에서 하차하면 된다.

5호선 올림픽공원역에서 내리니 1988년 올림픽을 상징하는 세계평화의 문이 맞아준다.

 

세계평화의 문을 지나가면 몽촌토성을 지키는 해자처럼 몽촌호가 지나가므로 방향을 돌린다.

한성백제박물관으로 이동하는 길에 만나는 조각작품 몇 개를 찍었으나 세 개만 투척한다.

 

 

 

 

 

 

몽촌토성(서울 夢村土城)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삼국시대 한성백제의 도성유적으로서, 올림픽공원 내에 정비·복원되어 있다.

산성은 남한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낮은 구릉(해발 44.8m)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한 토성이다.

북쪽으로 1km 이내의 거리에 풍납토성이, 서쪽에는 석촌동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285m에 달하며, 동북쪽 외곽에는 외성이 약 270m가 량 직선 형태로 뻗어나간다.

성벽의 높이는 각 지점별로 차이가 있지만, 절개 조사된 서북벽, 동북벽등 2개지 점을 대상으로 하여

살펴보면 성벽 기저부 폭은 50~65m, 높이 12~17m, 상부폭 7.5~10.5m 정도이다.


몽촌토성에 있는 3개소의 문지는 성의 출입구로서 뿐만 아니라 배수로 역할도 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지의 폭은 북문지는 약 10m,  동문지는 약 7m, 남문 지는 약 10m이다.

서북 망대 지는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해당되는 해발 44.8m의 정상부에 위치하여 석촌동과 잠실

그리고 풍납동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한편 성내부에서는 적심석을 갖춘 지상건물지 1기, 적심 유구 7기, 판축 한 성토대지 1개소, 연못 2기,

수혈주거지 12기, 플라스크형의 저장시설 30기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한성백제의 전형적인 토기인고배, 삼족기, 직구단경호, 광구장경호, 심발, 장란형 토기,

단병호, 단경옹, 시루, 뚜껑, 원통형 기대, 병 등이 다수 확인되었고,

철기의 경우에는 칼, 투겁창 및 창고달이, 각종화살촉, 말편자, 말족쇄, 도끼, 철삽날, 가위등무기류 및

각종 농공구류들이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종합해 보면, 몽촌토성은 인근의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가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한성백제기에 중요한 기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대형 지상 건물지의 존재 및 연화문 와당 둥과 같은 기와류가 확인되고,

중국제 청자벼루 둥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몽촌토성의 위상을 확인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몽촌토성은 서진대 전문도기편의 출토로 축조 연대의 상한은 3세기말 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하한은『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기록된 것처럼 475년이다.

몽촌토성 서남지구에서 고구려토기가 출토되는 온돌건물지의 확인은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백제의 왕성 몽촌토성은?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의 끝자락에 축조된 백제시대 토성이다. 

평면 형태는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마름모꼴이며, 

성 밖에는 성내천이 몽촌토성의 동쪽과 북쪽을 감싸고 흐르면서 자연 해자의 기능을 하였다.
성벽의 전체둘레는 약 2.4km(2,383m)이며 내부면적은 약 216,000㎡에 달한다.
성벽은 나무틀 안에 흙을 붓고 다져 올리는 판축으로 축조하였으며, 

현재 남쪽과 북쪽, 동쪽에 각각 성문자리가 남아있다.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격자모양으로 구획한 삼국시대 대형 포장도로와 물을 

모으고 저장하는 목곽집수지사와 1, 건물지 등 중요 시설들이 확인되었다. 

또한 '궁宮' 자가 찍힌 곧은입항아리, 얼굴모양을 새긴 토기 뚜껑 등 백제 한성도읍기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고,

중국·왜(일본)  가야 등 주변 나라 들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백제 수도[왕도] 한성을 함락시킨 뒤 일정 시기 동안 몽촌토성에 주둔하였음을 나타내는 

고구려 유구와 유물, 그리고 백제 성왕이 한강 유역을 탈환했을 때 백제군이 몽촌토성에 다시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백제 사비기 유물 등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유물들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는 몽촌토성이 풍납동 토성과 함께 백제 한성 도읍기의 왕성임을 알려준다. 

현재 역사학계는 일반적으로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 기록된 한성의 북성北城을 지금의 풍납동 토성으로,

남성南城을 지금의 몽촌토성으로 보고 있다.   (출처_팸플릿)

 

 

서울 몽촌토성

 

몽촌토성에서는 백제 한성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1만여 점의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었다. 

최고 지배세력이 거주했을 궁궐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포장도로, 건물지와 움집터, 독무덤, 저장구덩이,

토기, 돌절구 등이 출토되어 당시 중요한 세력이 거주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화살촉, 뼈갑옷 등 무기류가 다량 출토되어 군사적 요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로써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을 백제 한성기 남성南城으로 보고, 

북성北城인 풍납토성에 비견되는 방어적 성격이 강한 별궁으로 이해하고 있다.
몽촌토성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구와 유물을 볼 때, 

475년에 한성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된 이후 일정 기간 동안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면서 사용했고,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는 점차 신라의 마을로 변해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초선시대에 촌락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왕도 한성


왕도는 왕이 머물며 나라를 다스리던 도읍을 뜻한다.

왕도는 왕권이 발현되는 상징적 장소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 역량이 집약되어 있다.
백제의 왕도는 시기별로 변화하였지만 그 중심지는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이다. 

특히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백제 왕이 머물던 왕성이며, 

석촌동 고분군은 왕이 잠든 왕릉구역으로 왕도의 핵심이었다.
왕도한성은 온조가 위례성전 맛에 처음 도읍한 이래 나라가 성장하면서 왕도의 규모가 커지자 

그에 걸맞게 붙여진 새로운 명칭으로 '큰 성'이라는 뜻이다.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두 왕성을 중심으로 석촌동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왕릉구역 및 왕성 바깥쪽의 

마을과 생산시설, 성곽 등을 모두 아우르는 범위이다. (안내문)

 

 

문명의 기원


한강유역에서는 아주 일찍부터 사람이 많이 살았다.

서울에서 출토된 다양한 종류의 구석기시대 유물은 그 증거이다.

신석기시대에는 한강변에 큰 마을이 생겼다 (강동구 암사동).

고조선이 성립·발전한 청동기시대에는 한강 남쪽의 여러 구릉지대에 방어시설을 갖춘 마을이 생기고 

그 주변에 고인돌무덤이 만들어졌다.

(강남구 역삼동·원지동, 송파구 가락동, 강통구 상일동 등)

한강유역에 위치한 마을 중 일부는 점점 세력을 키워 마한 통화의 소국으로 성장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백제국이다.  (출처_팸플릿)

 

 

왕도 한성

 

백제의 건국 3세기 무렵 마한 50여 개 국의 하나이던 백제국은 빠르게 세력을 키워 고대국가 백제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건국설화에는 기원전 18년에 졸본 부여 출신 온조가 사람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웠기에 부여를 왕실 성씨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이에 백제는 부여·고구려를 비롯한 북방계통 주민과 마한을 비롯한 남방계통 주민이 함께 어우러져 만든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종 기록에는 4~5세기 무렵 백제왕이 사는 곳의 이름이 한성으로 적혀 있다.

이에 백제가 영토를 크게 넓힌 4세기 무렵에 여러 제도를 정비하면서 왕도의 범위도 넓히고 이름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바꾸었다고 흔히 이해한다.

한성은 북성과 남성을 합친 이름이며, 북성은 지금의 풍납동토성, 남성은 몽촌토성으로 볼 수 있다.

한성 남쪽에는 강변에 조성한 왕릉구역이 있었다(석촌동고분군).

 

백제 사람들은 평면모양이 육각형이거나 사각형에 가까운 움집을 많이 만들었다.

상류층은 주로 여呂 자형 주거지, 철凸 자형 주거지라고 불리는 큰 집에 살았으며, 왕궁, 관청 등에서는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 기와를 얹기도 하였다.

움집 안에 설치한 부뚜막에서는 계란모양토기, 시루, 깊은 바리 등의 토기 그릇으로 음식을 조리하였다.

백제 사람들의 옷은 신분에 따라 색깔이 달랐으며, 귀족들은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 화려한 꾸미개로

높은 신분을 과시했습니다.

백제 왕도 한성은 한강변에 위치하기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중국대륙, 일본열도 등 먼 지역을 오가기에

유리했다.

4~5세기 무렵에는 백제 영토가 서해와 남해에 맞닿았으므로 바다를 통해 중국 일본의 여러 왕조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안내문_팸플릿)

 

 

삼국의 각축

 

한강으로 한강유역은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이 치열하게 충돌한 곳이다.

그리하여 5세기 후반기(475년)까지는 백제,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엽(551년)까지는 고구려,

 553년 이후는 신라가 각각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는데, 모두 서울지역을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통해 중국으로 사신을 자주 보내며 활발히 교역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삼국을 통일하였다.


한성, 그 후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을 입은 백제는 웅진(충남 공주)으로 도움을 옮겼다.

웅진도읍기 초기에는 혼란스러웠으나, 6세기 초엽 무령왕 때 국력을 회복하고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후 성왕은 538년에 사비(충남 부예)로 도움을 옮기고 통치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출처_팸플릿)

 

몽촌토성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백제의 토성이다.

나지막한 구릉을 깎아내거나 흙을 쌓아 토성을 쌓은 것이다.

서울의 산은 바위와 암릉이 많은 데 비해 이 구릉은 부드러운 흙이다.

장비도 변변히 없던 시절에 쌓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석성은 활석이 많다.

조선시대처럼 야무지게 사각으로 자르며 쌓기보다는 철기시대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연석에 일부 도구로 다듬어 석성을 쌓은 활석이 많다.

그에 비해 한성 백제의 도성 역할을 한 이 몽촌토성은 토성이다.

 

토성이라고 해도 1,500여 년이 지났어도 성벽이 온전한 상태를 보면 흙을 쌓을 때 얼마나 정교하게 쌓았는지 

여전히 원형을 유지한 경우가 많다.

물론 후세에 복원하고 증개축한 영향도 많다.

 

구릉이라고 해도 높고 낮은 데가 많았으니 높은 데를 깎아내며 토성을 쌓으면 석성보다 훨씬 쉬운 건 사실이다.

 

일부 구간에 목책의 흔적이 있었으나 실물이 존재하지 않아 이렇게 목책을 둘러 복원시켰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면 로마인들이 주변 국가를 정복하러 갈 때 하루를 야영하면서도

이런 목책을 사방으로 두르며 방비를 단단히 한다.

심지어 강을 건널 땐 돌로 쌓은 다리가 지금도 무너지지 않고 존재한다.

그렇게 전쟁에 진심이었던 로마는 당시 그들 지역에서 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준비가 잘 된 민족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는다.

 

몽촌토성은 잔디를 잘 가꾸고 관리를 잘해 골프장을 연상시킨다.

어딜 가나 빽빽한 빌딩 사이로 이렇게 멋진 숲 속 공간을 갖는다는 건 백제가 서울시민에게 준 큰 선물이다.

로마나 이집트는 고대 유적으로 그 후손들이 대를 누리며 먹고 산다.

서울은 한성 백제가 남긴 몽촌토성이나 풍남토성, 아차산성은 서울 시민의 휴게 공간이다.

 

이곳은 잠실과 가까워 롯데월드타워가 친근하게 보인다.

 

 

 

 

 

키 큰 능수버들의 가녀린 줄기가 살살 부는 미풍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춤춘다.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성하의 열기에 푸른 잔디가 보여주는 시원함이 보기 좋다.

여름의 뜨거운 햇빛에 도로와 건물이 달아 열기를 내뿜을 때 이곳의 숲은 주변온도를 끌어내린다.

가까운 곳에 살면 맨발로 매일 이곳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다.

 

 

 

 

 

 

 

몽촌토성은 여전히 토성으로서의 기능이 남아있기는 해도 이젠 서울 시민을 위한 공간인 셈이다.

 

이곳은 소나무 숲이 좋아 사시사철 푸른 곳이다.

 

 

 

잠깐 10여 m만 오르면 깊은 산속처럼 이런 소나무 숲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이곳 주민들은 숲세권을 제대로 느끼며 산다.

 

 

 

 

 

부드러운 진디밭과 숲의 공간인 몽촌토성은 이곳의 자랑이다.

 

몽촌토성을 둘러싼 해자로 인해 토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멋진 도성이 된 것이다.

백제인의 따듯한 손길로 서울시민은 훌륭한 공원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삭막한 빌딩 숲 사이로 빛나는 공원이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