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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복원공사가 필요한 서천읍성

by 즐풍 2023. 8. 15.

2023_130

 

 

2023. 8. 3. (목) 오후에 탐방

 

 

오늘을 포함해 3일 일정의 휴가는 고창, 부안, 부여에서 각각 하루씩 머무르는 것이었다.

부안 여행을 끝내고 올라가는 길에 서천읍성을 둘러보고, 지난번에 부여에서 남긴 나머지 구간을 갈 생각이었다.

오늘 변산국립공원의 개암사를 들려 우금산성까지 오르려던 계획은 목우가 귀가를 요청하며 끝내기로 한다.

앞으로 살 날은 첩첩이 30년은 쌓여 있으니 귀로에 서천의 서천읍성만 들리리로 한다.

그렇게 상냥한 네비 양의 안내로 서천향교에 도착하니 사선으로 서천읍성이 보인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한 뒤 전국 모든 도시의 향교는 문을 굳게 닫았다.

향교는 밖에서만 간단하게 사진을 찍고 서천읍성을 오르니 나지막한 산에 있는 산지형 읍성이다.

 

 

 

 

ㅁ 서천향교(舒川鄕校)


1413년(태종 1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향전(鄕傳)에 의하면 756년(경덕왕 15) 처음으로 문산면 문장리 향교골 돌고개 쪽에 암자 형식으로 

세워졌다가 1314년(충숙왕 1) 서부면 동조리로 이건 하였으며, 1413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다.

1869년을 비롯하여 수차례에 걸쳐 보수하였으며, 1984년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홍살문·수복청(守僕廳) 등이 있고, 홍살문 밖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건축형태는 앞쪽에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대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두어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공부자성적도(孔夫子聖蹟圖)≫·≪존화록(尊華錄)≫·≪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서천군선생 안(舒川郡先生案)≫·≪동사회 강목(東史會綱目)≫

·≪대전속록(大典續錄)≫ 등이 있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천향교에서 200여 m를 이동하면 서천읍성 동문에 닿는다.

드론으로 찍었음직한 조감도를 보면 

 

 

 

 

 

 

 

ㅁ 서천읍성(舒川邑城)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


서천읍성은 조선 시대 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는 한편, 군사 및 행정 기능을 담당했던 지방 주요 지역에 쌓은 성이다.

우리나라 서해안 곳곳에는 왜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이러한 읍성을 많이 쌓았다.
서천읍성은 세종 20년 1498~세종 32년 1450 사이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성은 숙종 41년 1715에 다시 쌓은 것으로 처음 위치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규모가 확장되었다.
돌로 쌓은 서천읍성의 둘레는 약 1,645m에 달하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둘레는 대략 1,190m, 높이는 3m이다. 

성벽 밖으로 돌출되게 쌓은 치성雉城이 16개이고, 문 터가 3곳이나 있다.

성벽은 외벽만 돌로 쌓고 내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채웠다.

성벽 바깥쪽으로 10m 전후의 거리에 너비 5~6m, 깊이 2~3m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垓子 시설이 남아 있다.

                                                                                                                          (안내문)

 

서천읍성의 동문은 잘 복원되었다.

 

 

ㅁ 서천읍성(舒川邑城)


서천읍성은 오석산과 영취산 사이의 서천읍내 중심에 자리하 고 있다.

서천읍성은 포곡식으로 축성되어 있었는데, 서천군청과 초등학교, 민가 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성벽은

대부분이 붕괴되었다.

이 성은 조선 초에 왜군의 침입이 잦은 이유로 연해지역에 읍성을 축성하여 고을과 야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는 과정에서 축성되었다.
서천읍성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세종 때에 영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긴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현재의 서천읍성의 축성 시기는 일단 세종연간(1418~1450) 임을 알 수 있다.

 

세종 때 완성된 읍성은 문종 때 수축하게 되었고, 성종대에 들어서서 서천읍성은 다시 확장하였다.

이때의 규모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서천군 고읍조(古邑條)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3,525척에 이른다.

성종대에 확장된 성은 「대동지지」 충청도 서천읍성지조의 문헌으로 보아 별 변화 없이 조선 후기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 후기까지 서천읍성은 둘레 3,525척 높이 10척, 샘 5개와 못 2개, 

그리고 치성이 27개와 동문과 남 문 등 2개의 성문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지도서」 공해조의 기록을 보면, 객관 십이간, 동헌 오간, 아사 구간, 락민당 삼간, 향청 오간, 

군사 삼간, 관청 오간, 작청 사간, 서기 팔간, 사창좌기청 삼간, 군관청 삼간 등이 성내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건물이 오늘날의 군청사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읍성은 동서 장축의 타원형이며, 둘레는 1,190m다.

읍성은 지형을 이용하여 북고남저형으로 축성하였는데, 완만한 지형을 따라 동벽과 서벽이 북벽에서

내려오다가 남벽은 평지로 통과하고 있다.

현재 성벽과 문지 등은 서천군청과 민가로 인하여 훼손된 상태이다.

이전의 조사내용에 의하면 남벽은 3~4단의 석축이 2~3m의 높이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동벽은 토루상으로 잔존하고, 가장 높은 능선의 정상부에 축조된 북벽도 토루 형태로 남아 있다.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곳은 성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이곳에 오르면 주변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가장 높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능선으로 연결된 곳이기 때문에 방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 지역에 치성이 축조되었다.

나머지 성벽에 대해서는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설치한 적대는 「문종실록」에 14개소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성문은 이전에는 동서남북 등 사방에서 확인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여지도서」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내에는 많은 건물지가 있을 것이나 현재는 학교와 관청, 민가

등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원형을 잃고 있다. 

                                                                 (출처_서천군지 제4편 제3장 관광유적에서 발췌)

 

 

서천읍성 동성벽

 

 

 

동문으로 오르는 계단

 

안쪽에서 보는 동문

 

성벽에 올라가며 보는 동문

 

 

 

동문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성벽은 더위에 지치기 쉬워 다음 기회로 미룬다.

 

목우는 먼저 차에 가서 쉬고, 즐풍 혼자 남성벽을 더 탐방하기로 한다.

 

남성벽은 복원 공사 중인지 천막이 덮여있다.

 

 

 

성벽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별로 높지 않다.

바깥은 석성으로 쌓았고, 안쪽은 토성이다.

 

코너엔 이런 치성도 보인다.

 

 

 

 

 

이곳은 성벽을 쌓은 돌이 많이 사라져 신경 써서 복원할 구간이다.

 

 

 

 

 

 

 

 

 

서천읍성 동문을 한 번 더 보는 것으로 읍성 탐방을 마친다.

서천읍성 안에는 서천여고와 서천군청 일부 국실, 교회 민가 등이 남아 있다.

이런 건물을 수용하기 어려우니 남아 있는 성벽을 증개축하는 정도로 복원할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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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청에서 다운로드한 관방유적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이렇게 많은 관방유적 중에 현존 상태가 좋은 산성 등을 더 찾아볼 계획을 세워야겠다.

서해바다와 닿아 있는 서천군은 금강을 통해 내륙 깊숙히 들어올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이 지역에 왜구들이 많이 출몰하여 피해를 주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관방시설이 필요했다.

그들은 최근 오염수를 방출하여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있으나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빨아주는 집단이 있다.

이런 한심한 작자들은 내년 총선에서 전부 물갈이하여 응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