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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관악산 대타로 간 오산 독산성

by 즐풍 2023. 9. 5.

2023_138

 

 

2023. 9. 1. (금) 08:40~10:47, 두 시간 47분 산행, 4.3km 이동

 

 

최근에 산행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늘 호암산이나 삼성산을 선택했다.

다른 산을 가려면 대중교통부터 들머리 날머리 선정에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은 좀 더 먼 곳의 관악산을 종주할 생각에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지하철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탔으나 오늘따라 노선을 반대로 돌아 시간이 더 걸렸다.

처음 이 노선에 처음 투입된 버스 기사가 노선을 착각해 벌어진 일이다.

 

결국, 지하철 1호선을 놓치고 다음 지하철이 들어올 때까지 30여 분을 기다렸다.

최근 지하철 1호선이 태업을 하는 바람에 배차 간격이 뜸해진 데다 굼벵이처럼 느려졌다.

잘 가던 지하철이 진위역에서 차량문제로 운행할 수 없다며 다음 차량을 이용하라는 안내방송을 한다.

기왕에 기다리던 승객까지 더해져 줄은 길게 늘어지고 지하철은 언제 올지도 모른다.

06:20 차량을 탔다면 목적지에 도착했을 게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콩나물시루처럼 서서 가게 생겼다.

 

최근 지하철 1호선이 태업하며 열차 간격이 뜸해지고 운행속도도 느려져 출퇴근 시간에 혼란이 가중된다.

태업을 할 이유는 있겠지만, 중간에 차량을 세우고 다음 차량을 이용하라는 건 승객에 대한 폭력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불만하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는 걸 보며 성숙한 시민의식을 느낀다.

지하철 이용은 포기하고 오산에 있는 독산성으로 목적지를 바꾸며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이렇게 예상에 없던 독산성을 오르게 되었다.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올라가게 되니 남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남문은 누각이 있던 곳이나 세월이 흐르며 성곽까지 무너진 걸 보기 좋게 복원했으나

아직 누각은 복원 전이다.

오산시의 재정자립도가 낮다고 하니 언제 복원될지 알 수 없다.

 

남문 입구 성벽 양쪽을 이렇게 삼각형으로 쌓아 올려 육중하고 견고한 느낌을 받는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烏山 禿山城·洗馬臺址

Doksanseong Fortress and Semadae Site, Osan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1,095m의 테뫼식 산성과 산 정상부에 복원되어 있는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장대將臺를 말한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오산과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독산성은 백제 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여주 파사성, 용진토성 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께 4일 만에 고쳐지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이 석성으로 다시 지었다. 

정조 16년(1792)에는 약 70일간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를 했고, 

정조 20년 (1796) 수원수원 화성이 완공된 이후 협수체제協守體制를 구축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세마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동문 안에 보적사가 있다. 

내부 시설물로 성문 5개, 치雉 8개, 우물 1개, 수로 1개가 남아 있다

 

장대: 장수의 지휘

협수 체제: 서로 협력하여 지키는 구조

치: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시설 (안내문)

 

 

 

남문 안쪽에 성문을 고정시키던 문확석이 바닥에 보이는 걸 보면 상단에 보기 좋은 누각을 세웠을 것이다.

여느 산성이나 읍성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누각 말이다.

 

 

남문 南門

 

남문은 독산성이 정문으로 진남루鎭南樓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의 규모는 6칸이었으며, 남문은 영조, 정조, 순조 때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으며 독산성이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2개가 남아 있다.

문루: 궁문, 성품, 지방관청의 바깥문 등의 위에 지은 건물

문확석: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안내문)

 

 

홍주읍성에 설치한 누각은 홍화문이다.

독산성의 남문에 진남루라는 누각을 세우면 이런 모습이겠지만, 구태어 여장은 만들지 않을 거 같다.

 

홍주읍성이 궁금하면...  

 

홍성의 옛 지명을 딴 홍주읍성 너무 멋져

2022_05 2022.1.16 (일) 오후에 탐방 수없이 보던 북한산성, 어쩌다 가게 되는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 강화도 정족산성은 수도권에 있는 산성이다. 임금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몽진했을 때의 상황을

electee.tistory.com

 

 

남문과 연결된 위쪽 성곽의 모습

 

남문을 지나가는 성벽의 모습이 아름답다.

여름이라 성벽 주변에 풀이 자라 성벽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소나무 두 그루가 독산성 남서 방향의 풍경을 멋지게 만든다.

 

성하의 여름은 온통 진녹색으로 가득하다.

집에 있으면 TV나 모니터 화면으로 눈은 늘 뻑뻑할 텐데, 모처럼 눈의 피로가 싹 가신다.

 

모서리에 치雉를 만들면서 성벽은 무척 높아졌다.

저런 치를 만들면서 방어나 공격능력은 훨씬 올라간다.

당장 사진을 찍는 장소부터 치가 있는 곳까지 가운데로 들어오는 적을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게 된다.

 

암문은 두 사람 정도 교행할 수 있는 너비라 상단엔 돌을 가로질렀다.

상단에 돌이 있음으로 문을 설치하여 여닫을 수 있데 된다.

 

 

암문 暗門

 

암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이 문은 순조 4년(1804)에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는 대신 새로 지은 성문이다.

1985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고, 이후 2010년 개거식 성문을 평거식 성문으로 복원하였다.

 

평거식 성문양쪽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수평상으로 걸쳐 방형의 통로를 만든 성문

개거식 성문성문의 개구부 상부가 개방된 형태의 성문 (안내문)

Ammun Gate

 

Ammun Gate, a small hidden gate, was made by placing a large flat stone on two sections of the wall.

Two base stones used to support the wood gate remain.

This entrance was made to meet traffic needs following the closure of the West Gate in 1804,

The gate was renovated in 1985 and restored to the present type gate by installing a large flat stone

on two sections of the wall.

 

이제부터 안내문에 영어가 병기되어 있으면 함께 올릴 생각이다.

안내문을 찍은 사진이 그대로 글자로 전환되니 어려울 것도 없다.

세상이 좋아져 국제화시대에 한발 더 다가선 느낌이다.

 

 

산성 아래에 있던 풀은 뜨거운 열기를 자양분으로 보는 동안에도 클 만큼 쑥쑥 자라 물밀듯 올라온다.

6·25 전쟁에서 압록강까지 진격하며 통일을 앞둔 시점에 중국이 개입하며 밀려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보는 듯 하다.

 

 

 

이곳은 그저 성벽이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또 하나의 암문이 숨어 있는 곳이다.

 

 

서문  西門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정조 14년(1790)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이 문은 순조 4년(1804)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83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으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안내문)

 

West Gate

 

The West Gate, along with the South Gate, served as the main entrance to Doksanseong Fortress.

In 1790, King Jeongjo used this entrance when visiting the fortress.

This gate was closed in 1804 to create a nicer view of the Hyeollyungwon.

The current gate is a result of restoration work carried out in 1983.

Two base stones used to support the wooden gate support remain.

 

 

 

 

 

 

이 암문은 서문과 달리 상단에 돌을 가로지르며 성벽을 냈다.

 

 

 

자연석과 어우러지게 치성을 쌓아 일부 여장처럼 만들었다.

몸을 은폐하며 활쏘기 좋은 장소다.

 

독산성은 규모가 작아 어느새 세마대가 가까워졌다.

더 돌지 않고 세마대로 방향을 돌린다.

 

 

 

세마대는 누각 양쪽에 편액을 달았다.

북쪽 편액의 한자는 누구 글자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지역의 명망 있는 서예가 작품일 것이다.

 

 

세마대  洗馬臺

 

세마대는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의 승전과 관련하여 성 안 꼭대기에 세워진 장대將臺로,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가 1957년 8월 15일 민관으로 구성된 '세마대 중건 위원회'에

의해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북쪽에는 세마대洗馬臺라는 현판이, 남쪽에는 세마대洗馬坮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중 남쪽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썼다.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에는 세마대와 관련하여

'도원수 권율이 독산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샘이 적어 오래 지키기에 어려웠다. 

적이 염탐하여 그것을 알고서는 급히 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권율은 군사에게 적을 향하여 말을 세우고 쌀을 흩날리게 부어 씻게 하였다. 

그것을 본 왜적이 성안에 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포위를 풀고 갔다.

훗날 그곳을 세마대라 일컬으니 곧 지금의 장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Semadae (Command Post)

 

Semadae is the command post erected at the highest point of the fortress in association

with General Gwon Yul's victor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t was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the Korean War,

but restored in August 15, 1957.

There are two hanging boards with the word Semadae inscribed in Chinese characters,

one board was handwritten by former President Rhee Syngman.

Hwaseongji, a local journal compiled in 1831, says the following about the site:

"As Doksanseong Fortress did not have sufficient drinking water,

the invading troops tried to take advantage of the situation.

But the commander of the defenders, Gwon Yo, had his men pour rice over their horses to trick

the Japanese invaders into believing that they were washing them with water,

and thus that they had plenty of water.

Finally, the enemy gave up attacking the fortress and left the area."

The name Semadae literally means "aiplace for washing horses."

 

 

독산성은 산 정상부를 두른 테뫼식 산성이라 우물이 하나 밖에 없는 게 흠이다.

임진왜란 때 이런 사실을 간파한 왜적은 성밖에 주둔하며 장기전에 돌일할 생각이었다.

이를 눈치챈 권율 장군은 그들이 보이는 장소에서 쌀로 말을 목욕시키는 흉내를 냈다.

이 광경에 독산성엔 우물에 물이 잘 나오는 줄 알고 포위를 풀고 갔다고 한다.

장군의 기지로 많은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안내문을 보면 세마대가 설치된 장소가 말을 씻기는 장소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 바위 왼쪽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밑에서 보면 세마대는 보이지 않고 이 바위는 보이기 때문이다.

 

성벽은 지그재그로 돌며 이렇게 활처럼 휘었다.

이런 산성이야말로 양쪽 끝에서 활을 쏘며 공격과 수비하기 좋은 곳이다.

거대한 느티나무와 한옥으로 지은 화장실이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사찰은 역시 뭐든 한옥으로 지어야 한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1,095m의 테뫼식 산성과 산 정상부에 복원되어 있는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장대를 말한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오산과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독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권을 장군의 승건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여주파사성, 용진 토성 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께 4일 만에 고쳐지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이 석성으로 다시 지었다. 

정조 16년(1792)에는 약 70일간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를 했고, 

정조 20년(1796) 수원수원 화성이 완공된 이후 협수 체제協守 體制를 구축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세마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동문 안에 보적사가 있다. 

내부 시설물로 성문 5개, 치雉 8개, 우물 1개, 수료 1개가 남아 있다. (안내문)

 

 

Doksanseong Fortress and Semadae Site, Osan

 

Doksanseong Fortress, also called Dokseongsanseong Fortress, consists of a soaring; 

1,095m-long fortified wall with a restored command post located in a strategically significant position 

with a commanding view of the surrounding area.

It is said that the fortress was built during the Baekje period and used continuously throughout

the Unified Silla and Goryeo periods. Its importance as a defense facility was proved

with General Gwon Yul's victor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there.

Along with Pasaseong Fortress in Yeoju and the Yongjintoseong Earthen Fortification,

i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defending Hanyang (present-day Seoul) from enemy attacks.

According to records, the fortress was renovated in 1594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by Gyeonggi-do Governor Yu Gun and local people, and was converted to a stone fortress

in 1602 by Defense Commander Byeon Eung-seong.

In 1792, the fortress underwent seventy days of major repair works.

With the completion of Hwaseong Fortress in Suwon in 1796, t

he two fortresses came to collaborate with each other as defense facilities. 

The Semadae (command post) on the summit has been restored, and Bojeoksa Temple

can still be seen in the East Gate, along with five main gates, eight bastions, a well,

and a water channel inside the fortress.

 

 

독산성에서 쉬기 좋은 곳은 세마대와 이곳 느티나무 아래 그늘이다.

바람이 느티나무를 훑고 지나갈 때 나뭇잎이 서로를 부대끼는 소리가 좋다.

 

지금은 제법 독산성을 찾는 사람이 많아 보적사도 많은 신자가 방문한다.

규모가 작아 산성과 더 어울리는 사찰이다.

 

 

 

여느 지붕과 달리 처마를 한껏 올린 대웅전의 모습이다.

 

차를 이용하면 이 성벽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암문을 통과하게 된다.

바로 동문이다.

 

동문은 암문으로 되어 있다.

 

밖에서 보는 보적사

 

 

동문 東門

 

동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각각 두 개씩 남아 있다.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와 이름이 없다. 

동문은 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가 있다. 

동문은 1982년에 정비하였다. (안내문)

 

 

East Gate

 

The East Gate was made by placing a large flat stone on two sections of the wall.

Two base stones and two top stones used to support the wood gate remain.

According to Hwaseongi, a local journal compiled in 1831, this entrance,

intended for people only, did not have a gate tower.

Bojeoksa Temple is located just inside the gate. The East Gate was renovated in 1982.

 

 

동문 보수 전인 1980년의 사진을 보면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어 동문을 통과하기도 어려웠겠다.

세월이 흐르면서 독산성은 지금 이곳 오산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보적사 寶積寺

 

보적사는 독산성 동문 안에 있는 사찰로 지어진 때를 알 수 있는 옛 문헌이나 유물은 없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고,

 용주사를 세울 당시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과 요사 3동이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에 따르면 보적사는 21칸 반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1902년 약사진을 허물고 새로 지었으며, 1987년에 고쳐 지으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을 바꾸였다. 

현재는 석가여래와 약사여래, 지장보살을 모신 대응전과 요사 2동과 3층 석탑이 있다.

보적사는 1978년 세마寺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가 1996년 다시 보적사로 바꾸었다. 

보적사라는 이름에는 전해져 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삶이 어려운 노부부가 쌀이 2되밖에 남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구차하게 사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기로 마음을 먹고 공양한 후 집에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안내문)

 

 

Bojeoksa Temple

 

So far no literature or relics have been discovered to reveal when Bojeoksa Temple was founded,

though it is known to have been restored many times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the

late sixteenth century.

It is said that, when nearby Yongjusa Temple was founded, Yaksajeon Hall and the monks'

quarters of Bojeoksa Temple were renovated.

According to Hwaseongji, a local journal compiled in 1831, Bojeoksa Temple measured 21.5 kan

when it was originally built.

In 1902, Yaksajeon Hall was rebuilt. In 1987 it was repaired and renamed as Daeungjeon Hall.

At present, the temple is composed of Daeungjeon Hall, which enshrines the statues of Sakyamuni Buddha, Bhaisajyaguru Buddha, and Ksitigarbha Bodhisattva, two living quarters for the monks,

and a three-story stone pagoda.

 

 

 

 

지하철 1호선의 철도노조원들의 태업으로 시간이 지체되어 관악산 대신 오산 독산성을 탐방했다.

독산성은 규모가 작아 누구나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명소이다.

차를 가져와도 거의 정상까지 댈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독산성 탐방을 끝내고 잠시 대화를 나눈 해설사님이 소개하신 오산 궐리사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