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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두 번째 탐방으로 언양읍성 전모를 살펴보기

by 즐풍 2023. 6. 2.

2023_77

 

 

 

2023.5.8. (월)  영남알프스인 천황산, 재약산 산행 후 탐방

 

 

올해 치러야 할 영남알프스 8봉 인증을 하는 첫날이다.

오전에 고헌산을 끝내고 곧바로 천황산과 재약산까지 세 산을 섭렵했다.

세 산이라고 해 봐야 고헌산은 덩치가 작고, 천황산 재약산을 얼음골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끝냈다.

혹자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으니 진정한 산행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알 8봉 인증은 지역경제 활성화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 것이라 본부에서 원하는 방식이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알아서 자진해 비용을 부담하며 케이블카 운영비용을 보전해 주면 좋지 않겠는가.

 

산행을 끝내면 곧이어 지역 명소를 탐방해야 한다.

아직은 젊으니 하루 산행했어도 걸어 다닐 힘은 남아 있다.

작년에 언양읍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언양읍성을 탐방했다.

그때 시간 상 전체를 보지 못하고 남문인 영화루부터 북문 일대를 둘러봤다.

이번엔 나머지 구간부터 전체를 둘러보며 언양읍성을 완벽히 탐방할 생각이다. 

 

 

 

 

ㅁ 울주 언양읍성(蔚州 彦陽邑城)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에 세워졌던 읍성은 객사와 동현을 핵심시설로 각 군현의 주민과 관리를

보호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언양읍성은 1390년 (공양왕 2)에 처음 토성으로 축조된 것을, 1500년(연산군 6)에 현감 이담룡이 석성으로

고쳐 쌓으면서 확장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3,064척(약 1,500m), 높이는 13척(6.3m)이었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의 일반적인 형태로 하부는 비교적 큰 돌을 세워 쌓거나 눕혀쌓되 성돌 사이의 빈 

공간에는 잔돌로 채운 형태이며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4면에는 각각 문을 내었으며, 성문 위에는 정문인 영화루(남문), 망월루(동문) 등의 누각을 두었다. 

성벽 모서리에는 보초병이 망을 보던 각루(角樓)를 세웠고, 

성문 주위에는 문을 보호하기 위한 반원형으로 옹성(甕城)을 쌓았다.

성문과 각루 사이에는 총 12개의 치성(雉城)을 두었다.

치성은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병을 쓰기 위해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성벽에서 7m 정도 바깥으로는 너비 3~5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가 있었으며,

해자 바닥에는 목익(뾰족한 꼬챙이)이 촘촘히 박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 안에는 각종 관아가 있었으며, 동쪽에 동현이, 서쪽에 객사(구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있었다.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와 동문과 서문을 가로지르는 수로(水路), 그리고 성내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
                                                                                                                     (안내문)
                

 

차량을 북문지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서성벽에서 반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 생각이다.

 

서성벽은 남아 있는 성벽 중에 가장 허술하게 관리되는 구간이다.

성벽의 대부분은 사라지고 크고 쓸모없는 돌만 남았다.

 

치성이 밖으로 나온 곳은 해자처럼 성벽을 감싼 물길이 돌아간다.

 

성벽은 이가 빠진 듯 들쑥날쑥하다.

 

그 많던 바위와 돌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서문지를 지나면서부터 성벽은 남아 있지만, 대부분 주택의 담장으로 쓰인다.

성벽을 담장으로 쓰라고 있는 건 아닌데...

 

언양읍성은 서성벽의 중간부터 남성벽의 중간까지 민가가 들어서며 성벽을 담장으로 많이 이용했다.

이 민가는 성벽은 담장으로 이용하고 치성은 창고의 담장으로 이용해 온전히 성벽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나라를 잃고 갈 데 없는 백성이 성안으로 들어오며 벌어진 폐단이다. 

 

 

 

서성벽과 남성벽이 만나는 지점엔 아예 성벽은 무너지고 민가가 들어섰다.

그 골목에 이곳의 문인인 난계 오영수 작가 등이 소개된다.

 

중학교 때 배운 오영수의 '요람기'에 나온 범버꾸 얌냠이 이분의 작품이란 걸 여기서 알게 된다.

소설가 오영수는 낚시에 진심이라 1963년 서울 낚시회장이 수여하는 1등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ㅁ 울주 언양읍성(蔚州 彦陽邑城)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의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축성된 석축 성으로 경주읍성이나 남원성과 같이 매우 드문 형태의 평면 방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처음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며 군창과 우물이 2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문종 원년(1451)에는 원래의 읍성에 1,000척을 더 늘려 쌓으며 토성을 대규모 중축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석성은 연산군 6년(1500) 당시 현감이었던 이담룡(季將龍)이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이다.

읍성 둘레 3,064척, 높이 13척이었던 것으로 보아 개축하는 과정에서도 중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도 편찬된 언양읍지(彦陽邑誌)에 의하면

“고을의 규모에 비하여 성이 견고하고 누각(樓閣)이 장대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읍성은 평면이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4방의 중앙에는 옹성(甕城)을 두른 문지를 갖추고 있다. 

체성 바깥에는 해자(核字)와 목익(木杙) 등이 모두 갖추어져 조선시대 성곽 구조를 이해하는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규모는 둘레 1,559.7m, 석축의 폭 5m이며,

잔존 최고 높이는 북문지 서쪽의 적대에서 4.6m 정도로 확인되었다. 

동서남북 사방의 체성 중간 부분에 옹성을 두른 문지를 배치 하였고 치성(雉城)을 배치하였으며,

체성 바깥에는 다시 해자(垓子)를 두른 구조이다.


문지는 동[望月權], 서[愛日樓], 남[映花植], 북[啓乾門] 사방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동문지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모두 조사되어 대략적인 구조 파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중 남문지의 경우는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체성과 동시에 축조되었으나 나머지 서문지와 북문지는

체성이 먼저 축조된 후에 덧붙여 축조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기록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읍성이 우선순위에 따라 순차적으로 축조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문인 남문 지는 옹성을 비롯한 체성이 양호하게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언양읍성의 조사 과정에서 성 밖에 해자가 둘러져 있고 목익 시설이 그 중앙에 설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해자의 중앙에는 끝이 뾰족한 커다란 나무 꼬챙이인 목익을 박아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 


한편 읍성 내부에는 각종 관아 시설이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1411)의 기사에 의하면

언양(彦陽) 객사(客舍)가 불에 타 수조(修造)한 내용이 나타나며, 『언양읍지(彦陽邑誌)』에 의하면

“객관은 동헌(東軒) 서쪽에 있고, 중대청(中大廳) 9칸, 동상헌(東上軒) 8칸, 문 3칸의 합계 28칸으로 되어있다”라고

나타나며, 숙종 무인년(1698)에 현감 김헌조(金憲祖)가 중수하였는데 후에 훼철되었다고 한다.

 

갑오개혁(1894)에 따라 본래의 기능은 없어지고 객사지기 1명이 관리하다 후에 언양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현대식으로 고쳐진 후 현재의 언양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동헌에 관한 기록은 성종 21년(1490) 6월 7일 자 기록에 의하면 언양현 관아가 불에 타버린 내용이 나타나며,

명종 4년(1549)에는 언양의 관사를 신축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 외 『언양읍지(彦陽邑誌)』(1919)에는 읍성 내 건물지 명칭과 위치 등이 개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남문인 영화루를 둘러싼 옹성

 

 

ㅁ 울주 언양읍성 남문지 해자  蔚州 彦陽邑城 南門址 垓字
Moat of the South Gate Site, Eonyangeupseong Fortress in Ulju


해자는 성 바깥쪽으로 일정 거리를 떡워 성벽과 나란하게 판 도량의 일종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2012년 언양읍성 남문지 발굴 조사 결과, 

해자는 성벽의 바깥 면으로부터 9~9.6m 정도 떨어진 곳에 조성되어 있으며, 

그 규모는 폭 3.5~5m, 깊이 90m 정도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해자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흙이 무너지지 않게 굵은 강돌을 한 줄로 쌓았다.
일반적으로 해자의 내부에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창 모양의 말뚝인 목 익을 세워 두는데,

언양읍성 남문지 일원의 해자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 조사 뒤 해자 부분은 다시 흙으로 덮고, 그 위에 해자의 너비만큼 돌을 깔아 해자의 위치와 규모를 표시하였다.

                                                                                                                      (안내문)

 

 

언양읍성을 둘러싸고 해자가 설치됐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해자 안엔 뾰족한 나무 꼬챙이가 드러나게 설치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1차 보루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야구에서 1루, 2루, 3루라고 하는 건 적진을 하나씩 깨트리고 만루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야구가 야전의 형태에서 어른들 놀이로 변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포를 던지고 방어하는 그럴싸한 전쟁놀이다.

 

기왕에 난 도로이니 복원한 성벽도 그에 맞춰 길을 터준다.

 

 

 

 

ㅁ 울주 언양읍성 남문 영화루   蔚州 彦陽邑城 南門 映花樓

언양읍성은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토성으로 처음 만들어졌으며,

효과적인 주민 보호와 군사적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조선 연산군 6년(1500)에 석성으로 새로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광해군 4년(1612)에 재정비하였으나 잦은 재해로 피해를 입었다.

근현대기 남천시의 제방 축조를 비롯한 여러 공사에 성에 있는 돌을 가져다 써서 훼손이 더 심해졌다

한편, 「언양읍지, 1919년 편찬」에는 동문은 '망월루望月樓, 서문은 '애일루愛日樓, 남문은 영화루映花樓,

북문은 계건문啓乾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언양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1800년대 초반 진남루鎭南樓에서 영화루로 이름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으며, 1900년 전후에 최종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차례의 언양읍성 남문지 발굴 조사 결과, 영화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구조이며,
성벽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서 있는 개거식開据式이었음이 밝혀졌다.

 

초석은 자연석 위에 둥글게 다듬은 높은 주초를 세웠고, 기둥머리 부분에는 날개 모양의 익공 2개를 포개 놓은

이익공을 두었으며,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봉이다.
영화루 앞에는 효과적으로 방어하려고 성문을 등글게 감싸 안은 반원형의 옹성을 두었다.
이 옹성은 성벽의 안팎을 세워 쌓은 협축식이다.

웅성 안쪽의 너비는 약 15m이고, 동쪽으로 난 옹성 개구부의 폭은 8.3m로 다른 읍성보다 넓은 편이다. 
                                                                                                                       (안내문)

 

 

 

 

 

성문의 종류를 파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성 안쪽 성벽은 토성으로 별 어려움 없이 성벽으로 오를 수 있다.

 

 

 

남쪽에 있는 읍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읍성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일본도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일제강점기 때 철도나 도로를 놓는다는 구실로 대부분 훼손했다.

남한에 약 109개의 읍성이 있었다고 하는 데,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건 몇 개 안 된다.

언양읍성은 그나마 상태가 좋은 데, 이곳에도 도로가 지나가고 민가가 들어서며 원형을 많이 잃었다.

 

그래도 이렇게 남문인 영화루를 새로 짓고 옹성을 둘러쌓았다.

 

이곳에 설치된 이정표는 모두 성고하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안에 있는 다목적 잔디광장이다.

 

동성벽도 남성벽과 연결되는 절반은 학교와 민가가 들어서며 사라졌다.

동문이 있던 곳부터 북성벽으로 이어지는 구간까지 성벽은 복원되거나 예성벽 그대로 남았다.

 

복원된 동성벽은 가슴 정도의 높이다.

도시화 과정에서 성벽 주변에 성토를 해 높이가 낮아진 건지 모르겠다.

 

성벽 끝으로 치성이 7~8m 정도 밖으로 나왔다.

저 치성에서 성벽을 넘으려는 왜적에게 화살을 날리면 맞는 족족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이곳부터는 치성을 따라 우측으로 북성벽이 연결된다.

 

 

1438년(세종 20)에 축성에 대한 새로운 도본인 '축성신도(築城新圖)를 반포하여 체성을 모두

석재로 쌓도록 하고, 토사로 이루어진 경사면의 내탁부도 석재로 계단을 이루도록 하여

읍성의 석축화가 시행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성의 방어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옹성과 치성, 해자를 시설하도록 명을 내렸다.

                                                                      (출처_읍성의 보존관리 매뉴얼 참고, 문화재청)

 

북성벽 중간에도 치성을 쌓아 동성벽의 치성과 연합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곳 치성은 성벽보다 월등히 높아 치성의 역할을 다 할 것이다.

 

북성벽의 치성부터 성벽은 북문에 가까울수록 조금씩 낮아진다.

 

 

 

북문은 터만 확인되고 성문은 복원되지 않았다.

언젠가 복원될 것이다.

북성벽은 서성벽 방향으로 또 하나의 치성을 쌓았다.

우측 주차장 뒤로 보이는 건물이 언양읍 성 관리소 건물이다.

 

 

 

성 안의 농경지는 곧 모내기라도 하려는 지 물이 들어찼다.

 

 

 

 

 

북성벽 안쪽에서 보는 동성벽 방향

 

 

 

 

 

 

작년에 제대로 보지 못한 언양읍성을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모두 봤다.

정방형의 언양읍성은 평지에 있어 평소엔 관청 역할을 수행하고, 전시엔 전쟁터가 된다.

읍내에 있다 보니 일제강정기 때 훼손되는 불운이 따랐다.

최근 유물조사와 함께 복원 과정에 있으니 언젠가 반듯한 읍성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