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66
2023.5.24. (수) 18:50~19:34, 44분 탐방, 1.7km 이동, 이날 단양지역 일몰 시각 19:34
올해는 소백산 철쭉꽃 상태가 유난히 좋다는 뉴스를 보고 소백산을 종주했다.
죽령휴게소에 주차하며 산행을 시작하지만, 차량을 어떻게 회수할지 고민이 시작된다.
연화봉과 정산인 비로봉을 찍고 어의곡리로 하산하면 거리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어의곡리 하산길은 가파르게 떨어져 유순한 천동리로 방향을 잡았으나 거리가 훨씬 멀다.
천동리에 도착하니 이미 버스가 떠난 뒤라 택시를 이용해 단양읍내로 나왔다.
죽령행 버스를 한 시간 넘게 기다란 후 차량을 회수해 먼저 단양 팔경인 사인암을 다녀왔다.
다음 여정인 단양 신라 적성비와 적성산성을 탐방하기 위해 단양적성 주차장에 주차했다.
신라 적성비를 오르려는 데 마침 그곳을 오른다는 여성분과 동행하게 됐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춘천 방향인 단양팔경휴게소에서 내리면 된다.
뒷문을 따라 신라 적성비까지 500여 m를 산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일반 도로를 이용할 경우엔 내비에 단성면 하방리 52-1을 찍고 오면 된다.
다만, 마을 입구에서 들어오는 농로는 차량이 겨우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으니 이점 유념하시라.
단양 신라 적성비와 적성산성 탐방코스
신라 적성비를 함께한 중년의 여성분은 즐풍과 같은 시기에 소백산을 오른 분이다.
그분은 희방사에 주차 후 비로봉 정상을 찍고 다시 희방사로 하산하며 27km를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역사에 관심이 많아 귀로에 신라 적성비를 찾는 열정을 보인다.
역사를 안다는 건 과거의 역사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이런 분은 현실에 대한 비판도 강하다.
공교롭게도 소백산 구간을 동 시간대에 걷고,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 우연이 겹쳤다.
대전에서 생활한다는 그분은 역사 강의나 전시도 소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열정이 즐풍에게도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ㅁ 단양 신라 적성비 Jeokseongbi Monument of Silla, Danyang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는 신라가 고구려 영토인 적성을 점령한 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기록과 「삼국사기」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전흥왕 6~11년(545~550) 사이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신라의 새 영토를 확인하며,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신라 국민으로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드러난다.
진흥왕이 이사부 등 고관 열 명에게 명령을 내려 신라의 국경을 넓히는 사업을 돕고,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다한 적성 사람 야이차에게 상을 내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와 같이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하겠다는 국가 정책도 적혀 있다.
비문에 진흥왕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없고, 비문 첫머리에 교사라는 부분이 있는 것을 보면
진흥왕의 명을 받아 세운 석비石碑이지 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순수비는 아니다.
하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은 척경비라는 점과 적성이라는 글자가 여러 번 등장한다는 사실은
지금의 단양이 당시에는 적성으로 불렸음을 밝혀 주기 때문에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 교사(敎事) : ~이유신 일, ~하옵신 일을 의미하며, 임금의 명을 받들어 행하는 일을 뜻함.
* 척경비(拓境碑): 영토 편입을 기념하며 세운 비 (안내문)
ㅁ 단양 신라 적성비 丹陽 新羅 赤城碑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는 삼국시대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 일대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여 국경을 넓히고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국민이나 점령지 주민에게 본국의 시책을 이해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한
표적으로 세운 것으로, 1978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발견 • 조사하였다.
진흥왕의 명에 따라, 신라의 국경 개척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 사람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이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을 알리는 내용이다.
이 비문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고관 10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이사부, 비차부, 무력 등
진흥왕 때 공을 많이 세운 인물이 있다. 이러한 인물들이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이 비의 건립 연대는 신라 진흥왕 6~11년 (545~550) 경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최근 안내문을 사진 찍고 문자를 그래그로 복사해 워드패드에 붙여 넣으면 문자로 전환된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는 음성으로 녹음하며 문자로 전환할 때 싱크로율은 80% 전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사진 문자는 99% 이상 일치하는 경이로움을 보인다.
앞으로는 사진 안내문을 게시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구글폰은 어떤지 모르나 아이폰 유저에겐 이런 포스팅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ㅁ 단양 적성 | Jeokseong Fortress, Danyang
사적 제265호
산성에서 발견된 단양 적성비의 내용을 보면 단양 적성은 진흥왕 15년(554) 신라가 죽령을 넘어
한강의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데 필요한 요충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가 1,768척이며
성내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단양 직성이 고려시대까지 단양 지방을 다스리는 읍성 구실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유물도 발견되고 있다.
단양적성은 등서로 긴 타원형이다. 북서쪽은 경사가 급하고, 남동쪽은 비교적 완만하다.
성벽은 기초 부분을 돌과 진흙으로 다져 단단히 하였고, 성의 외벽은 자연석으로 쌓았다.
성의 안쪽은 말을 타고 병사가 다닐 수 있게 평평하게 다져 쌓았다.
성을 쌓는 방법이 매우 견고하여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문화재청의 단양 적성 복원도이다.
약 절반 정도가 복원되었는 데, 나머지 구간도 복원되기를 바란다.
ㅁ 단양 적성 (丹陽 赤城)
단양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 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_문화재청)
저 큰 나무 뒤로 산성은 20~30m 정도 복원되었고, 나머지는 이 구간에 복원되었다.
이 구간의 산성은 아래쪽으로 성벽을 쌓으며 복원하였고,
위쪽은 그대로 남겨놓아 예전 산성이란 걸 알 수 있게 했다.
단양 적성은 소백산을 가로질러 단양과 영주를 잇는 죽령 고갯길이 남한강에 접하는,
해발 319.8m의 구릉 정상부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북쪽으로 멀지 않은 온달산성과 더불어 남한강의 물줄기와 소백산을 통과하는 고대교통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에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어 삼국의 주요 격전지로 알려져 왔다.
능선을 따라 길게 돌출된 곡성曲城 형태의 체성 구조, 현문식 성문과 성벽의 보축시설, 내환도內環道 등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정이다.
둘레가 923m인 성벽은 내외 협축의 방식으로 정연하게 축조되었고,
내부에서 신라토기 편이 고려시대 평기와들과 함께 수습되었다
산성의 입지 조건이나 구조, 그리고 출토유물에 있어 온달산성과 매우 유사하며,
성안에서 발견된 단양 신라적성비와 주변의 신라고분군의 분포 상황을 미루어,
단양 적성은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에 의해 집중적으로 경영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_중원의 산성)
선성의 안쪽에 누군가 묘를 썼다.
짧은 봄이 지나갔을 뿐인데, 성벽 안쪽엔 어느새 잡초가 무성하다.
예초기로 잡초를 밀어낸다고 해도 다시금 잡초는 자랄 것이다.
수많은 전쟁이 이 강토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우리네 민초는 잡초처럼 다시 일어서며 이렇게 나라를 지켜냈다.
단양 적성이 복원된 시기가 다름을 확연하게 느낀다.
이곳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산성을 복원했다.
가까운 쪽은 비스듬히 쌓고, 먼 곳은 직각으로 쌓는 새로운 방식이다.
바로 이런 모습이다.
이 성벽이 신라시대에 쌓은 건지 최근에 쌓았지만 시간이 오랜 된 건지 궁금하다.
쌓은 방법은 최근의 방식으로 위 복원도를 보면 복원된 것으로 표시했다.
멀리 보이는 저 뾰족한 봉우리는 단양의 천주봉이다.
단양군을 지나는 이 단양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충주호가 된다.
충주댐을 막아 이곳까지 제법 폭넓은 수계를 보인다.
서산에 걸렸던 해도 산이 높아 산 뒤로 넘어갔다.
사진은 더 검게 나왔으나 밝기를 조정해 겨우 볼만하다.
높게 쌓인 성벽이 단양 적성 동남문이다.
단양 적성은 단양 적성이지 적성산성이 아니다.
단양 신라 적성비의 기록에 따라 문화재청에서도 단양 적성으로 고시했다.
단양 적성이라고 해야 하는 데, 자꾸만 적성산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단양 적성의 동남문
ㅁ 단양 적성(丹陽 赤城)
단양 적성은 충청북도 단성면 하방리 산 3ㅡ1번지 일대의 성재산(해발 323.7m)에 위치한다.
이곳은 소백산맥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의 북단으로 동쪽의 죽령천(竹嶺川),서쪽의 단양천(丹陽川)이
북쪽의 남한강에 합류하여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형세로 자연적인 해자를 형성하고 있다.
산성에서 남동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공문성(貢文城)이, 서남쪽으로는 소이산 봉수(所伊山 峰燧)가
조망되고 남한강의 상류 방면으로 통하는 길과 하류 방면의 길, 그리고 동서의 벌령(伐嶺) 길이 트여 있다.
그러므로 남한강 수로를 따라 영월과 충주 방면으로 진출이 용이하고 강을 건너 제천 방면으로도
진출하기에 유리한 지점이다.
明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둘레가 1,768척이고 안에는 큰 우물 1개소가 있다.”라 하였으며,
원래는 성산(城山),성산성(城山城), 고성(古城) 등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따르면 주민들은 민보성(民堡城), 농성(農城)이라 불렀다.
1978년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가 발견되고,
비문에 나오는 이름을 따라 적성(赤城)이 되었다.
비문에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지역에 진출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팽창시킬 수 있는
요충지로 이용하였던 곳이 바로 적성임을 밝히고 있다.
산성은 능선을 따라 동서로 길쭉한 타원형의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중앙의 서단과 전체의 동단 사이가
말안장 모양을 한 마안형馬鞍形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북서쪽은 급경사이고 남동쪽이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서고동저(西高東底)·북고남저(北高南底)인데 북서에서 서남으로 돌아 동향하여 낮아지며
북동에서 동단으로 안부(按鞍)를 형성하고 회절 하여 동남향으로 낮아진 지세이다.
전체둘레가 922m로 성벽이 잘 남아있는 북동쪽의 경우 높이가 3m가량 되며,
출입시설과 수구시설은 남동쪽 가장 낮은 부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성재산 정상에서 낮아진 사방의 지형을 따라 화강암과 석회암 등의 할석과 다듬을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지형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우선 북벽에서 남벽으로 낮아지며 회절 하는 동단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외부에서 가장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있는 취약한 부분으로 북측에는 문구를 개설했다가 메워진 흔적이 남아있는
문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유구는 현재 복원되었으며, 문지 내측에는 투석용으로 추정되는 석환 무더기가 있다.
동단과 마찬가지로 반대편의 서단 역시 남벽과 북벽이 급하게 회절하고 있기는 하나 서향 한 능선이
매우 가파른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능선을 따라 곡성형태의 치성을 축조하였다.
치성 아래로는 낮은 기울기의 보축 석벽이 남아 있어 동단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남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남향한 경사면의 중간 부분을 다듬어서 외면을 석축 하였고
내측으로는 석재를 메워 축조하였다.
성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해당하는 남동부에는 상단에 이르러 내외협축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기울기는 75~80°정도이며 벽면이 정연하지 못하다.
성 내부로 진입하는 출입구는 모두 남벽에 위치하는데 지표상에서 문지의 혼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두 출입구 사이가 서에서 동으로 낮아지는 궁형(弓形)으로 성벽이 돌아가고 있으며 동·서단을
평지로 연결하는 가장 넓은 환도상(還道狀)을 이루고 있다.
북벽은 환도상의평탄한 서반부와 동향으로 경사진 동반부로 나누어지지만 대부분 붕괴되어 군데군데
남아있는 성벽이 확인된다.
적성은 대항하는 주방향이 북서쪽으로 판단되며 남한강 상류에서 죽령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차단하는 위치에 해당하고, 더욱이 적성비의 건립 연대가 늦어도 거칠부(居染夫)의 10군 공략이
이루어지는 진흥왕 12년(551) 이전인 점으로 보아 6세기에 신라가 제천, 영월 등남한강 상류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고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 편이 주로 확인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토기편도 보이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토기와 청자편도 출토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성벽을 방패로 삼아 묘를 쓴 어처구니없는 현실
단양 적성의 동남문
성벽 바깥쪽 모양
이곳 성벽은 고르지 못해 틈이 많이 발생했다.
무너지기 전에 복원해야 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성벽 상단에 여장은 없고 평면으로 만들었다.
동남문 밖으로 나가는 나무 데크
적성 북서쪽 성벽은 아직 복원 전이다.
이곳에서 성벽이 끝나므로 되돌아간다.
성벽은 산세를 따라 동남문에서 남쪽으로 급하게 회절 한다.
복원한 성벽의 모습
성벽 둘레가 923m라고 하지만 절반 정도만 복원되었다.
절반을 둘러봤어도 사실 절반인 460m가 안 되는 짧은 거리다.
나중에 전체가 복원되면 다시 둘러봐야겠다.
단양 적성에서 바라보는 춘천 방향의 단양팔경휴게소
서북쪽으로 돌아가는 성벽은 단양 적성비로 올라가는 길에서 서쪽으로 20~30m에 불과하다.
단양 적성은 단양 신라 적성비와 함께 탐방할 수 있다.
신라 적성비는 산성 안쪽에 있어 조금 더 올라가면 비각 안에 보호된 비를 볼 수 있다.
중앙고속도로의 단양팔경휴게소와 접해 있으니 이곳을 지날 때 잠시 들리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두 개의 역사적 문화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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