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59
2023.5.2. (화) 09:29~11:21, 한 시간 52분 탐방. 5km 이동
'21년 12월에 상당상성을 갈 때는 기차를 타고 조치원역에서 환승했다.
이번엔 시외버스를 타고 한 번에 청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승차 시간도 짧고. 터미널이 시내 중심에 있어 이동에 시간 절약이 많이 된다.
갈수록 요령이 생기며 비용도 적게 든다.
평택발 청주행 버스 시간표와 청주의료원에서 상당산성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함께 게시한다.
상당산성 탐방코스
□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산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상당산성은 충주시 동쪽에 솟은 상당산을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가 4.25km에 달한다.
현재 상당산성은 동문 섬은·서문·남문의 3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남아 있다.
산성이 처음 건축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상당'이라는 이름은
백제 시대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上黨縣)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유신의 아들 김원정이 쌓은 서원술성(西原述城)과 연계하여 통일 신라 초기에 건축되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로, 선조 29년(1596) 임진왜란 중 원균이 산성을 급히 고쳐 쌓았으며,
숙종 42년(1716)부터 영조 23년(1747)까지 대대적인 수리와 복원이 진행되었다.
청주읍성에는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가 머물고,
상당산성에는 종 3품의 무관 병마우후**가 3,500여 명의 병사와 함께 머물며 청주읍성의 배후를 방어하였다.
성안에는 병마우후가 근무했던 관아 건물을 비롯하여 포루, 군기고 등 300칸이 넘는 건물들이 있었으며,
성을 유지 보수하는 승병(僧兵)을 위한 사찰도 있었다.
당시 상당산성의 모습은 영조 40년(1764)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구래 운조루 소장
<상당산성도>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상당산성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는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통일신라 석축산성 문화의 기술적 총체를 보여 주는 문화재이다.
**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 성벽이 계곡을 감싸며 산지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는 성
** 암문(暗門): 성벽에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 놓은 문으로 평소에는 돌로 쌓아 막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비상구로 이용한다.
** 치성(雉城):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한다.
** 수구(水口): 성벽 위에 흐르는 물을 흘려 내보내는 곳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선 시대,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 2품의 무관직
** 병마우후(兵馬虞候): 조선 시대 각 도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 3품 외관직
(출처_남문 안내문)
상당산성 안내도
옛날 상당산성도로 문루와 관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상당산성도는 위 안내도와 함께 보는 게 좋다.
남문을 바라보면 우측에 치성이 있다.
이 치성은 남쪽 성벽의 남문까지 관리하고 우측인 동성벽으르 함께 경계한다.
치성이 없다면 유사시 관리 인원이 더 필요하다.
역사기록
상당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이후의 기록은 다른 성곽에 비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이들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통하여 성벽의 개축 및 문루의 개보수에 대한 대략적인 시기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성벽이 처음 축성된 시기나 그 목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로 나뉘는데,
크게 신라, 백제, 궁예의 축성설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백제의 축성설은 청주가 본래 백제의 상당현이었음을 알려주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의 낭비성 또는 낭성이 상당산성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다음 신라의 축성설은 7세기 후반 정주에 설치된 신라의 서원소경西原小京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대(661~681년)에 김유신의 아들인 원정이 서원술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통일 후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9년(689)에 서원경성을 축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상당산성에서 발견된 「사랑부속장지일」명 기와에서 보이는 사랑부는 신라의 6부 중 하나로,
당시 왕경인이 서원소경에 이주해 온 사실과 상당산성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상당산성의 승장이었던 영휴가 1744년에 지은 아래의 상당산성 고금사적기(山城古今事蹟記 )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또한 930년에 왕건이 고창전투에서 후백제에게 승리한 후 천안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청주에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시기에 청주는 궁예와 왕건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산성의 조선 전기 상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즉, 상당산성은 청주의 율봉역 북쪽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7,773척이며
성안에 12개의 우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조 29년(15%)년에 충청도병미절도사로 부임한 원균이 상당산성을 수축하고 있다는 내용이
「선조실록」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 폐허로 있던 상당산성이 임진왜란 때 충청도지역의 방어와 관련하여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당성(古上黨城)은 율봉역의 북쪽 산에 있다.
돌로 쌓았고 주위가 7,773척이며 성안에 12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숙종 42년(1716)에서 46년(1720)에 걸쳐 실시된 대대적인 성벽 개축공사에 대해서는 숙종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때 운주루와 구룡사를 비롯하여 동북암문과 영사 및 창장고, 연못 등이 조성되었다.
이후 체성 및 관련시설에 대한 수리,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영조와 고종 때에는 대대적인 개축이 실시되었다.
수문은 영조 23년(1747)에 처음 축조된 후 영조 41년(1765)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동문과 남문의 문루는 영조 35년(1759)에 보수되었으며, 서문은 영조 41년(1765)에 수문과 여장의 수축과 함께
개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장대와 포루의 축조, 남악사 건립, 문루와 여장, 연못의 개보수에 관한 많은 기사가 확인된다.
영조 때(1757~1765) 편찬된 전국읍지인 여지도서에는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추게 된 당시 상당산성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남아 있다.
(출처_중원의 산성)
숙종은 안으로는 장희빈에게 많이 시달렸어도 북방정책에 많은 공헌을 했다.
서울 북한산에 북한산성과 행궁을 짓고, 부산 금정산에 금정산성을 쌓았다.
개성의 대흥산과 용강의 황룡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고,
최근 BTS 방문으로 인기를 끈 완주의 위봉산성은 숙종 때 새로 쌓은 성이다.
또한 강화도에는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49곳에 돈대를 설치했다.
자료를 찾아보면 더 많은 산성을 증개축했는데, 이곳 상당산성도 숙종대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있었다.
남문을 지나면 치성이 밖으로 살짝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치성의 역할을 알아봤듯이 성벽이 곧게 뻗어 있어 치성을 설치함으로써
방어와 공격에 유리하도록 거점을 만든 것이다.
상당산성은 소나무가 많고 관리가 잘 돼 성벽까지 가지를 뻗었다.
여름엔 햇볕을 막고, 비나 눈이 내려도 얼마간 우산 역할을 하겠다.
암문 상부와 하부 바위에 구멍이 있는 걸 보면 두꺼운 나무 문을 달게 되어 있었다.
문을 닫지 않고서야 방비가 될 리 없다.
서남암문 옆에도 방어가 불리한 코너에 치성을 둠으로써 양쪽 모두 쉽게 방어할 거점을 만들었다.
안쪽에서 보는 암문 구조
이런 성벽에 담장 구실을 하는 여장을 세웠으면 훨씬 방어와 공격에 유리하다.
그런 여장이 남문 주변에만 설치된 게 아쉽다.
오른쪽 담쟁이넝쿨 아래 수문이 설치된 게 보인다.
비가 오면 안쪽에 있는 물이 빠지도록 만든 하수시설이다.
이 나무데크는 탐방객이 밖에서 드나들 수 있도록 설치한 구조물이다.
이곳은 최근에 여장 비슷한 걸 무릎 높이 정도로 올렸다.
서문 쪽으로 성벽이 안쪽으로 깊게 들어와 치성 없이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성벽 안에서 보는 서문인 미호문이 성벽 밖에서 보는 느낌이 든다.
미호문 밖에 성벽을 돌출시켜 방어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뒤돌아 본 미호문
성벽을 이렇게 꾸불꾸불하게 쌓는 게 방어와 공격에 유리하다.
이곳에 포루가 있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청주공항 활주로가 보인다.
성벽 안쪽에 있는 저지대에 물이 빠질 수 있도록 수구를 설치했다.
동북암문이다.
찍은 모든 사진이 그렇지만, 이 사진도 수직과 수평을 맞춰 찍은 것이다.
산성은 급하게 떨어지며 급경사가 시작되기 전에 암문을 만들었다.
암문 안쪽에 새긴 명문으로 검은 돌에 새긴 글은 쉬게 볼 수 있으나
오른쪽 화강암에 새긴 명문을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건 모두 탁본을 떴을 것으로 믿는다.
진동문 밖은 성벽 밑으로 과수원인지 모를 식물 관리로 너저분해 보인다.
지자체에서 토지를 매입해 산뜻하게 정비하면 좋겠다.
밖에서 보는 진동문
진동문과 연결된 성벽
성안 마을과 가까운 보화정은 동장대 역할을 한다.
장대는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 보, 둔 따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를 말하며
동쪽에 있다 하여 동장대, 서쪽에 있으면 서장대이다.
보화정 건물이 위험한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줄을 쳤다.
이 성벽 가운데로 마을로 들어가는 동로가 개설되었다.
마을 안 조그만 저수지
탐방객을 위한 주차장
원점 회귀하며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았다.
산성이라고 하지만 높이가 고만고만해 크게 힘들이지 않고 탐방하기 좋은 곳이다.
남문 동기둥에도 명문이 새겨진 걸 보면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겠다.
기관에서 글자에 붉은색을 다시 입히면 글을 읽는 데 도움이 되겠다.
이번에 청주 방문은 상당산성과, 정북동토성, 부모산성, 청주읍성, 용두사지 철당간을 보러 온 것이다.
상당산성을 시작으로 첫 번째 미션을 끝냈다.
다음 장소는 정북동토성인데, 버스를 한 번 환승해야 하는 만큼 차 시간이 잘 맞으면 좋겠다.
정북동토성에 대한 기대를 갖고 다음 여정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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