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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경주읍성은 야간 탐방이 더 멋져

by 즐풍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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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31. (금) 일몰 후 잠시 탐방

 

 

즐풍은 선천적으로 술은 못 마시고, 가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간활동은 거의 할 일이 없어 땡 하면 바로 퇴근이다.

어쩌다 직장에서 갖는 회식이 끝나면 2차는 가지 않고 바로 귀가한다. 

남들 다 하고 지내는 밤문화가 없으니 산다는 게 무미건조한 편이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이런 습관은 계속되어 해 떨어지면 바로 숙소로 직행한다.

야간의 활기찬 풍경도 화면에 담으면 좋겠지만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경주에서는 동궁과 월지, 첨성대, 월정교, 교촌마을 등이 보기 좋은 야간 명소로 꼽힌다.

이 모든 명소를 포기하고 경주읍성을 보러 나선다. 

 

 

 

ㅁ 경주읍성 (慶州邑城)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였다. 

주로 중심이 되는 지방도시에 읍성을 쌓았으므로 경주에도 읍성을 쌓았다.
다만, 경주읍성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즉 고려 우왕 때 개축했다는 기록과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게 이 성을 빼앗겼을 때 

당시 이장손이 만든 일종의 포인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다시 찾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 세종, 선조, 영조, 고종에 이르기까지 경주 읍성에 많은 증·개축 과정과 내·외부의

구조 변경이 있었음을 문헌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 따르면 문종 원년(1451년)에 둘레 4,075척(약 1,904m), 높이 11척 6촌(약 5.4m) 등

비교적 정확한 성곽(城廓) 제원과 구체적인 구조가 잘 기록되어 있다.
읍성의 성문은 동서남북에 향일문, 망미문, 징례문, 공진문의 4대문이 있어 이들 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특히 남문인 징례문에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종각에 걸려있는 신라 성덕대왕 신종이 매달려 있었다고 전한다.

읍성은 경주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와 이후 대부분 헐려나가고 동벽만 약 50m 정도만 옛 모습을 남기고 있었다. 

현재 경주읍성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하여 2009년 “경주읍성 정비복원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2018년 동성벽(324m), 동문(향일문) 복원 및 주변 탐방로 정비를 완료하고, 

앞으로 주변의 노후 불량주택을 매입 정비와 북쪽 성벽 등의 복원정비를 추진할 계획이다.

                                                                                                                 (출처_문화재청)

 

 

일제강점기인 1907년 읍성철거령이 내리며 전국 대부분의 읍성이 철거되었다.

왜놈들 눈에는 읍성의 도시의 중심에 있어 주민들의 의견이 모아지는 곳이라 파괴하면

지역 주민을 끌어모으는 구심점이 사라진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바람에 1,900m가 넘던 경주읍성은 철저히 파괴되고 겨우 50여 m만 남았다.

 

2018년에 되어서야 동성벽과 향일문을 세우며, 324m가 복원되었다.

나머지 구간은 도로가 생기고 상가나 주택이 들어서며 거의 손쓸 방법이 없다.

자료에 의하면 남한지역에 109개의 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읍성인 서산 해미읍성, 고창의 고창읍성, 순천의 낙안읍성이 온전한 편이다.

고창군은 무장현읍성도 거의 복원을 끝내 3대 읍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읍성은 왜놈들의 출몰이 많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늘 왜놈들이 문제란 걸 알 수 있듯 경주읍성도 그런 역사적 현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에 미국에 가서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 꿇어야 한다? 동의 못한다”며 연일 입에 똥칠을 하고 다니다.

같은 시기에 유럽을 파탄 내다시피 한 독일은 여전히 상대국에 무릎 꿇고 사과에 진심이다.

친일파인 윤석열이 이 나라 대통령이란 게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이 자가 대통령이 된 후 나라가 망해간다는 느낌은 즐풍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향일문이란 편액을 보고 그 의미로 미루어 이곳이 동쪽이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밤이라 방향을 확인할 수 없어서 폰에 내장된 나침반으로 확인하니 정동향이다.

 

 

정문을 거의 반 바퀴 돌아 밖으로 옹성을 쌓았기에 옹성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

불과 5년 전에 쌓은 향일문이라 기계로 찍어낸 듯 면도칼 날도 들어갈 틈이 없이 성벽은 깔끔하다.

성문치고는 너무 기성품 같다는 생각에 씁쓸한 웃음이 흐른다.

성문 돌담도 성벽처럼 돌을 가다듬어 만들었으면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든다.

 

 

그나마 나머지 동성벽은 기계로 다듬었어도 진짜 돌로 쌓아 그나마 봐줄 만하다.

 

 

 

향일문 누각 안쪽 

 

읍성 안쪽 성벽 위 여장

 

밖에서 보는 향일문과 옹벽 

 

 

 

 

 

요즘에 복원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기계로 돌을 자르다 보니 주변 돌에 맞춰 재단하므로 거의 빈틈이 없다.

보기엔 멋지나 옛날 성벽에 비해 고풍스러운 멋은 없다.

50년이고 100년이고 세월이 흐르며 돌은 변색되고 이끼가 껴야 겨우 고색창연한 멋이 생기려나...

 

 

 

 

 

옹성과 머지않은 곳에 치성을 쌓아 옹성으로 몰려드는 왜적을 치성에서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옹성과 치성, 양쪽에서 공격하면 섣불리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구조다.

향일문 주변에 만든 여장은 이 치성에서 끝난다.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건 옛 자료의 고증을 거쳐 사실에 맞게 복원한다.

현대의 기술로 복원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옛것을 살려낼 수 있다. 

 

 

 

 

읍성이 철거된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주읍성처럼 이렇게 일부만이라도 복원하려는 노력이 잇따른다.

고창의 무장현읍성은 거의 대부분을 완벽하게 복원했는데, 이런 복원에는 자치단체장의 결심이 중요하다.

석조문화가 발달한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는 고대 유적지로 후손의 생계가 유지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야 이런 문화재로 생계를 마련할 정도는 아니지만 문화재 복원은 미래를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