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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안성 마이산에 망이산성이 있었네...

by 즐풍 2023. 4. 7.

2023_029

 

 

 

2023.3.13. (월) 14:55~16:25, 1시간 30분 탐방

 

 

생각 같아선 안성의 칠장사와 철당간, 마이산의 망이산성, 죽주산성을 끝내고 

귀로에 용인 조비산과 처인산성을 함께 돌 생각이었다.

아침나절 일찍 집을 나섰다면 가능한 일이나 오후에 집을 나서는 바람에 용인 지역은 포기한다.

마이산은 높지 않은 산으로 시작 고도가 177m로 200여 m만 더 오르면 되는 낮은 산이다.

그런데 산 이름과 산성 이름이 틀리는 재미있는 산성이다.

 

 

 

ㅁ 망이산성 (望夷山城)

 

안성시 일죽면과 이천시 그리고 충청북도 음성군의 경계지점에 있는 해발 472m 높이의 망이산에 있다. 

이곳은 경기도 남동부와 충청도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다.
백제 성곽은 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며, 둘레는 250m 정도다. 

성벽은 영정주를 사용하여 판축공법으로 구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내에서는 다량의 토기류와 철제무기류가 출토되었다. 

한성백제 시기인 4세기부터 5세기 대에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성벽은 백제토성을 감싸며 능선을 따라 구축된 포곡식 산성이다. 

전체 둘레는 2,080m로 대규모에 속하는 산성이며, 장방형이다. 

4개의 문지와 5개의 치,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정교하게 가공하여 쌓았다. 

대형의 지대석을 놓고 들여쌓기 방식으로 경사가 완만하게 쌓았다. 

외벽만 석축으로 쌓은 편축식 성벽이다. 

성내에서 8각 건물지와 장방형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건물지에서는 다수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고려 초기에 망이산성이 집중적으로 운영되었음을 말해 준다.

망이산성은 여러 시기의 군사시설이 중복된 복합 군사유적이다. 

특히 백제 판축토성의 축성기술의 확산과정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화강암 가공석과 지대석 사용이 사용된 점, 편축공법이 도입되는 통일 신라의 축성법이 적용된 점 등에서 

축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_안성시청)

 

 

 

 

 

ㅁ 음성 망이산성 (陰城 望夷山城)

망이산성은 충북 음성군, 경기도 안성시·이천시의 경계에 있는 마이산 정상에 축조된 성이다.
망이산성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주목 봉수조에 망이산성 봉수라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 망이성 봉수로 기록되어 있어 산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망이산성은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의 총길이는 약 2,080m이며, 외성의 안쪽에는 전 구간에 걸쳐 일정한 너비의 성벽 안쪽 통행로가 마련되었다. 

내성의 확인 가능한 길이는 약 250m이며, 내성의 중앙부에는 봉수대가 있다.
성벽을 돌출시킨 치성(雉城)은 서북·북·동·남·서남쪽의 5곳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문 터는 서남·서북·동남·서문·내성문 터 등 5개 문 터가 남아 있다.
출토유물은 철제단갑(鐵製單甲)·주조철부(鑄造鐵斧)·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성문 구조가 특이한 성으로, 하나의 산성에 서로 다른 형식의 성문이 시설되었다. 

봉수대는 소백산맥을 넘은 봉수로서 단양 죽령과 충주 조령을 넘은 봉수로와 추풍령을 넘은 봉수로가 

최종적으로 합쳐지는 가장 중요한 봉수대였다.
망이산성은 성터와 봉수에 대한 귀중한 가치를 지닌 성으로서,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구성된 역사적 중첩성과 고구려 양식의 치성이 잘 남아 있는 석축산성이다.

특이한 성문 구조와 봉수대의 중요성 등은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출처_음성군청)

 

 

2001년 음성군에서 등산객을 위한 휴식처 및 우물을 정비하던 중 철제단갑이 수습되었다.

이 정도의 철제단갑을 차고 전쟁에 임했다면 대장이나 부장 정도의 지위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망이산성은 안성시에서는 「망이산성」으로, 음성군에서는 음성 망이산성 (陰城 望夷山城)으로

각각 등록했다.

망이산성은 하나인데 지자체별로 부르는 이름이 다르니 하나는 의붓아버지인가?

국보나 보물만 문화재청에서 명칭을 관리하고, 시도 지정 및 문화재 자료는 각 지자체 담당부서에서 문화재정보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입력·수정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 같은 이름을 두고도 다른 이름으로 등록하는 불상사가 파워게임 양상으로 번지는 셈이다.

하긴 산 이름만 해도 안성시에서는 망이산, 음성군에서는 마이산이라 했으니 같은 산을 두고 부르는 이름도 다르다.

뭐, 카카오맵엔 마이산으로 되어 있으니 일단 음성군 승이다.

즐풍의 견해로는 산성 이름을 두 지역 모두 망이산성이라 했으니 산 이름도 통일시키는 게 맞다고 본다.

 

 

 

마이산 정상도 아니고 해발 고도 300여 m 지점에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어리둥절하다.

 

 

 

 

 

작은 우물이 있어 밑으로 물이 빠지는 시설을 만들었다.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물은 필수이므로 산성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렇게 풍부한 우물이다.

 

 

망이산성이 있는 성벽으로 내려왔다.

느티나무가 있는 곳은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이라 성벽 아래로 물을 빼는 수구(水口)가 보인다.

석성을 최근에 복원한 듯 정교하고 바위를 가른 석재인 듯 흰색도 많이 보인다.

 

마이산 북쪽으로 난 물길은 여주를 거쳐 남한강으로 흐르고,

이곳 우물은 미호천 발원지로 진천과 청원군을 거쳐 서천 군산 사이의 금강을 지나 서해로 빠진다.

 


망이산성은 충북 음성과 경기도 안성, 이천에 걸쳐 있는 해발 472m의 망이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차령산맥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망이산(마이산)에서는 주변의 조망이 좋은 편이고,

특히 남쪽의 미호천을 따라 진천, 청주를 거쳐 금강 상류로 이어지는 남북 교통로를 통제하기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망이산 봉수가 있는 산봉우리를 감싸는 작은 토성이 먼저 축조되었고,

이후 북쪽 외곽의 능선과 계곡에 걸쳐 넓게 포곡식의 석축성이 구축되어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내성에 해당하는 토성은 판축 기법에 의해 둘레 250m 정도로 축조되었고, 

내부에서는 축성시기를 짐작케 하는 백제 한성기의 토기편 외에도 청동기시대 마제석기 등이 수습되었다.

한편 둘레가 2,080m에 달하는 석축 외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초 광종 때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모두 4개의 성문과 5개의 치성을 갖추고 있으며, 성의 안쪽을 따라 통행로를 길게 설치하였다.

성벽은 경사면을 이용한 내탁 방식으로 축조하였으나, 성문 주변에는 돌을 안팎으로 쌓는 협축의 흔적도 확인된다. 

성곽은 지형조건에 따라서 굴곡을 이루고 있는데, 바깥으로 돌출된 성벽의 회절부에 치성을 설치하고 

성문은 안쪽으로 굽은 곳에 배치하였다. 

내부 평탄지에서는 수혈 유구와 함께 제사나 특별한 의식장소로 여겨지는 팔각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특히 고구려의 석축산성에서 주로 보이는 굽도리양식의 치성이 확인됨에 따라 망이성이 고구려 남하시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출처_「중원의 산성」에서 발췌)

 

 

 

이 성벽 우측에 돌출된 건 치성이다.

저 치성을 지나며 산성은 다시 위쪽으로 올라간다.

 

산성 주변으로 전망 좋은 정자도 마련되어 있다.

 

 

망이산성 1차 조사에서 확인된 남문지는 통로부 규모 길이 550cm, 너비 410m이다.

바닥에 정연하게 석재를 깔았으며 중심선 우측으로 배수구(너비 30cm, 깊이 20cm, 경사도 8°)를 설치하였다.

유물로는 여러 종류의 명문 기와들과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토기류 둥이 출토되었다.
2차 조사에서는 서문지와 배수시설이 발굴되었다. 

서문지는 통로부 규모 길이 5.6m, 너비 4.8m로 통일신라시대에 초축되었으며,

고려시대 전기 및 중기에 각각 규모를 달리하여 개축되었다. 

성문 바깥쪽으로는 상하 2단에 걸쳐 석축을 조성하였으며, 

성문 내부는 출입을 위하여 체성벽에서 이어지는 옹벽시설을 축조하였다. 유

물로는 많은 양의 기와류가 출토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 격자문 기와류와 고려시대 전기의 명문기와류 • 어골문

기와류 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망이산성에서는 1·2차 발굴조사를 통하여 많은 양의 명문을 가지고 있는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연호와 간지명 등을 가지고 있어 문헌기록이 충분하지 않은

당시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주로 고려시대 전기광종·현종대에 제작된 기와들로 명문의 내용은 연호, 간지, 인명, 지명 등이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峰豊四年王成大介山竹’, ‘太平興國七年……’이다. 

‘준풍(峰豊)’은 고려 광종 11년(960)~14년(963)에 걸쳐 사용한 독자적인 연호이다. 

고려 광종은 혼란스럽던 나말여초기의 상황에서 호족세력 척결을 통한 중앙집권화 정책과 과거제도 시행, 

자주외교 정책 등 개혁정책을 표방하여 집권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 편)

 

 

 

 

 

망이산성은 산성으로의 역할뿐 아니라 봉수대의 역할도 중요했다.

 

 

 

망이산은 중부지방을 가로지르는 차령산맥의 중간지점으로 서쪽 안성시 일대, 동쪽으로 이천, 음성, 충주방향

남쪽으로는 진천 방향까지 사방의 시야 확보가 좋은 위치의 산이다. 

 

 

 

마이산의 남쪽 방향 산성은 비교적 잘 복원되었다.

 

 

 

이곳에도 작은 우물터가 있다.

아직 건조한 초봄이라 우물이 말랐다.

 

치성에서 보는 마른 우물터 방향의 성벽

 

 

 

 

 

석성을 복원한 산성이 외성이라면 내성은 흙으로 쌓아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토성인 내성의 성벽 주변에서는 간돌칼, 즉 마제석검이 발견되기도 했다니

청동기 문화가 정착되기 직전의 시기로 보인다.

 

 

 

이곳이 남문 터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돌담이 안쪽으로 공간을 낸 게 성문으로 보인다.

 

이 안내문 하단부에 특정한 시기가 982년이 맞다면 고려가 건국된 이후 60여 년이 지나서

이곳에 기와지붕의 전각을 지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려 초기에 이곳이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멋진 소나무 뒤로 흙으로 된 둔덕이 있는 곳에 봉수대 터가 있다.

사실상 이곳이 마이산 정상이다.

 

충청도의 산 정상은 어디든 이렇게 오석으로 만든 정상 표지석을 세운다.

앞서 산을 오를 때 중간 지점에 대리석기단에 오석으로 만든 마이산 정상석은 안산시에서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은 충북 음성의 땅이라 기세 좋게 음성군에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이곳은 일찍부터 망이성이란 명칭으로 인하여 학계에 고구려 산성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망이(望夷)란 지명은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라 하고 신라왕을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고 표현한 

중원고구려비의 표현과 같이 북쪽에서 신라 쪽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산성 이름으로 해석되었다.

주 방어선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

1980년대 지표조사에서 평양 지역 출토품과 유사한 고구려계 기와가 나오는 점,

충주 중원고구려비와 연결되는 교통로에 자리한 점 등이 고려된 해석이었다.

 

 

 

선조들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진보(鎭堡)나 성곽 등의 군사시설을 축조함과 동시에 산정(山頂)에 봉수(烽燧)를

설치하여 적침을 신속하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봉수는 근대적인 전기통신이 도입되기 전인 조선 후기까지 사용된 가장 빠른 군사 통신수단이었다.

봉수는 횃불[烽]과 연기[燧]로 변경이나 해안을 통해 침입하려는 외적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약정된

신호전달 체계에 의해 중앙 정부와 지방의 읍치(邑治) 등에 알려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마이산 정상인 봉수대 터

 

망이산성 탐방을 끝내고 하산하는 길에 만난 생강나무 꽃이 봄이 왔음을 알린다.

 

 

 

 

망이산성 탐방으로 오늘 세 번째 미션을 끝내고 마지막 여정인 죽주산성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