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012
2023.2.3. (금) 오후에 잠시 탐방
충주에 온 김에 충주읍성을 봐야 하는 데, 읍성은 사라지고 관아만 남았다.
예로부터 충주를 장악하는 나라는 이곳의 지리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고구려가 점령했을 땐 국원(國原), 신라는 국토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중원(中原)이라 했다.
옛날의 충주는 남쪽으로 내려오려는 북방세력과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남방세력이 부딪치는 곳이었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충주에는 많은 산성이 있어고, 도심에는 충주읍성이 존재했다.
충주에는 충주산성(남산성), 충주읍성, 장미산성, 대림산성, 탄금대토성 등 역사적으로 15개의
산성이 확인될 만큼 성곽의 역사적·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조선의 영·정조 시대인 충주의 인구가 10만 명이 넘어 한양, 평양에 이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충주읍성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아있는 충주관아와 자료를 통해 규모를 알아보고자 한다.
□ 충주읍성(忠州邑城)
충주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던 고려~조선시대 충주의 읍성지로 충주의 중심 시가지에 위치한다.
충주읍성은 동북쪽 부분이 타원형을 이룬다.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 형태로 읍성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을 비롯하여 야문夜門과 수구문이 있었다.
성내에는 객사 44칸, 아사衙舍 60칸, 남별당南別堂 17칸, 후영아사後營衙舍 24칸, 훈련청訓練廳 17칸,
향청鄕廳 24칸, 군관청軍官廳 9칸, 기패관청旗牌官廳 9칸, 양진창楊津倉 17칸, 사창司倉 103칸,
관청官廳 53칸, 주사고州司庫 8칸, 군기고軍器庫 27칸, 화약고火藥庫 2칸, 고마청雇馬廳 7칸,
실록각實錄閣 등의 건물과 3개소의 우물이 있었다.
충주읍성은 1978년 발견된 심방석을 통해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충주성을 다시 쌓았고
예성蘂城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는데,
고종 3년(1866) 병인양요를 치른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라는 조칙에 따라
고종 6년(1869) 2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개축하였다. 이때 성의 둘레가 3,950척, 두께 25척, 높이 20척,
치첩(여장) 415칸이었다.
1896년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군의 충주성 탈환 전투 중에서 4개의 문루와 수문청守門廳이 소실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시가지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모두 헐렸다.
현재는 성의 현황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다만 성의 내부 관청 건물인 청녕헌淸寧軒과 제금당製錦堂,
그리고 충주성사적비가 남아있다.
(출처_충주시사편찬위원회, 2001)
충주시 문화회관에 주차하고 솟을대문을 통해 충주관아로 들어선다.
□ 제금당(製錦堂)
동헌의 동쪽에 위치한 제금당은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 왔을 때 머물던 별관으로 단청이 화려하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출입문인 내삼문은 1871년(고종 8)에 솟을대문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예성별관'이란 현판이 걸려있어
제금당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뒤쪽에는 수직청으로 사용되던 산고수청각이 있다.
* 수직청: 지금의 비서실처럼 사용된 건물
(안내문)
제금당
충주읍성에 있던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선화당은
도내의 일반 행정·군사·조세 및 중요한 재판이 행해지던 곳이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에 공주로 옮겨가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충주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 충주 청녕헌 (忠州 淸寧軒)
동헌은 옛 관청인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건물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충주목 동헌으로, 당시 충주 목사가 이곳에서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고종 7년(1870) 화재로 타버린 것을 같은 해 조병로가 다시 세웠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중원군 청사로 개조하여 사용하다가 1983년 군청 자리를 옮기면서 원형으로 복원했다.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마루방, 대청 왼쪽 2칸은 온돌방, 왼쪽 끝 1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었다.
(출처_문화재청)
충주읍성이 헐러기 시작한 것 일본 강점기인 1911년의 읍성철거령이었다.
이후 폐허화가 진행되면서 이전의 읍성은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고, 새로운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동헌인 청녕헌 대청에 옛날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느티나무 고목으로 충주관아가 오랜된 관청이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충주읍성의 외삼문인 예성별관
밖에서 보는 예성별관
창녕헌 서쪽 측면에는 아궁이가 2개 보여 온돌방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충주읍성 안에서 보는 정문인 중원루
밖에서 보는 중원루는 충청감영문이란 편액이 걸렸다.
밖에서 보는 충주 관아의 느티나무
중원루
충주 축성사적비 (忠州 築城事蹟碑)
사적비는 어떤 사건이나 사업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로,
이 비는 충주읍성을 수리·복원한 사실에 관해 적고 있다.
형태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비몸 위에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에는 성의 수리에 관한 내용들을 새겨 넣었다.
비문에는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후 성과 군용 기구 등을 수선하였고,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고종 6년(1869)에 전면적인 수리를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_문화재청)
간악한 일제에 의해 충주읍성은 도시화가 되면서 관아만 남은 상태다.
주변으로 도시가 들어서며 복원할 방법도 없으니 충주관아로 만족해야 한다.
남한에 109개나 있다던 읍성은 현재 1/3도 안 남은 상태다.
한국을 둘러싼 가까운 나라는 모두 철천지 원수만 남았다.
이런 일본에 앙금도 풀지 못했는데, 이 정부도 줄 건 다 주면서도 얻는 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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