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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홍성 홍주읍성과 여하정 안회당 탐방

by 즐풍 2022. 12. 12.

2022_219

 

 

 

2022.11.13. (일)  15:20~16:20, 1시간 동안 탐방

 

 

지난여름 안면도에서 잠시 생활할 때 하루 놀러 온 아내와 함께 회를 먹었다.

현지 가두리 양식장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여느 바다와 달리 횟감이 쫄깃쫄깃하고 맛이 좋다.

그 맛을 잊지 못한 아내와 이번엔 작은딸까지 데리고 안면도에 간 김에 파도리 해식동굴까지 봤다.

모처럼 날을 잡아 왔으나 날씨가 흐려 사진이 별로이다 보니 사진을 과하게 편집했다.

 

120km가 넘는 거리다 보니 편도만 두 시간이 넘는 거리라 잠깐 바닷가 보고 식사하기 바쁘다.

귀갓길에 홍성군의 홍주읍성에 들려 읍성을 한 바퀴 돌며 여하정과 안희정까지 탐방한다.

서산 해미읍성을 생각했으나 아내는 이미 봤던 곳이라 새로운 홍주읍성으로 변경한 것이다.

즐풍은 벌써 두 번째인 데다 가끔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질 만큼 날씨가 흐려 미진한 느낌이 든다.

 

 

□ 홍성 홍주읍성 (洪城 洪州邑城)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2012년에 남문인 홍화문을 복원하였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출처_문화재청)

 

 

홍주읍성이라 하면 외지인 대부분은 어딘가 의아해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문화재청에선 「홍성 홍주읍성」이라고 앞에 지역명을 특정했다.

 

홍성 홍주읍성도 대부분의 읍성처럼 밖은 석성이고 안쪽은 토성으로 만들며 안정적인 성벽을 만들었다.

 

 

홍주읍성과 불과 3.5km 거리에 내포신도시가 있고, 이 중심지에 충남도청이 있다.

내포(內浦)지역은 오래전부터 홍성, 예산, 당진, 서산 지역에 해당하는 가야산 일대 10개의 고을을 말한다.

넓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는 데다 바다를 끼고 있어 각종 곡물과 해산물이 넉넉했다.

가야산 자락이 흘러내려 산세 좋고 지세가 좋아 사람 살기 좋은 곳이다.

내포의 중심지에 옛날의 홍주읍성이 있고, 지금은 충남도청이 들어선 곳이니 명당이 틀림없다.

 

 

 

홍주읍성 비석 군은 원래 홍주읍성의 동문인 조양문 앞에 있던 것이다.

이 비석군은 동문인 조양문 앞에 있던 걸 홍주의 입구인 금마총 앞으로 이전했었다.

이후 금마총주변이 개발되면서 다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경섬(1562~1620)은 1607년 임진왜란 이후 첫 번째 사절로 일본에 가 포로 1,340명을 데리고 왔고, 

후에 홍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유의가 1782년까지 홍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공적비도 있다.

다산은 홍주목(洪州牧·오늘의 홍성) 예하 금정 도찰 방으로 있을 때 홍주목사 유의가 빈민에게 베푼 훌륭한 처사를

목민심서에 가감 없이 기록했다.


“참판 유의가 홍주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흉년을 만났는데, 유리걸식자 5~6명이 읍내를 돌아다녔다.

유의는 이들을 가련하게 여기고 군청의 마방(馬房·마구간)에 있게 해 죽을 먹이고 불을 때 줬다.

향승(鄕丞)과 아전들이 간하기를 ‘유리걸식자를 이같이 편안하고 즐겁게 해 주면 그 패거리가 장차 구름같이

몰려들 테니 누가 이것을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유리걸식자가 수십 명이었다.

유의는 좌우 만류를 뿌리치고 이들을 모두 수용했다.

유의는 ‘유리걸식자는 그 수에 한도가 있는 것인데, 구름같이 모여들 것이라고 미리 말하는 것은

모두 착한 일을 막는 말이다.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우선 받아들일 것이고 힘이 다 되면 보내는 것이 옳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 말에 지금까지 마음으로 감복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홍성이 지방 거점도시로 전면에 부각되는 계기가 된 것은 고려 초 후백제와의 운주 전투이다.

서기 918년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고 통일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후백제와 고려 왕건이 홍성(운주) 

지역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925년 후백제와 첫 교전이 이루어진 이후 928년 4월에는 운주 옥산에 성을 쌓고 수비군을 두었다. 

화평과 전투는 934년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드디어 934년 9월 운주에서 견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면서 후백제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운주가 바로 지금의 홍성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조 즉위 직후 진관 체제가 시행되면서 홍주의 지역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목사가 겸임하는 첨절제사를 두게 되었다.

그 결과 홍주 진관은 이전 시기보다 확대된 면적을 관할하게 되었다.

서천군·서산군·태안군·면천군·온양군 등 5개군과 홍산현·덕산현·청양현·대흥현·비인현·

결성현·남포현·보령현·아산현·신창현·예산현·해미현·당진현·평택현 등 14개 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홍성에서는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1906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3월 20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다가 1949년에 항일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져 홍주의사총에 모셔졌다.

                                                                           (출처_국립문화재연구소 발간 「문화재지 제51권 3호」 발췌)

 

 

안회당과 성벽 사이에 조그만 연못을 만들고 다리로 연결했다.

작은 정자인 여하정은 느티나무 뒤로 숨듯 보이지 않는다.

 

 

작은 연못 안 여하정과 느티나무의 조화가 아름답다.

어찌 된 영문인지 느티나무는 쓰러지듯 눕다가 기운을 차리고 일어섰다.

이젠 받침대로 지지한 채 홍성 홍주읍성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안회당(安懷堂)
현재 홍성군 청사 뒤에 위치해 있는 안회당은 홍주목의 동헌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 건물로, 관찰사병사·수사·수령들의 정청(政廳)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안회당이라는 이름은 논어의 “노자안지(老者安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들과 젊은 사람 모두를 위해 정사를 펼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홍주아문(洪州衙門)
홍주아문은 홍주목 관아 건물 중에서 동헌으로 쓰이던 안회당과 함께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다.

홍주아문은 홍주목의 외삼문으로 고종 7년(1870)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훼손된 관아 건물을 개축하면서 아문도 함께 개축한 것이다.

                                                                           (출처_국립문화재연구소 발간 「문화재지 제51권 3호」 발췌)

 

 

 

 

 

 

홍주읍성의 성곽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사용되었지만,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남문(홍예문)과 북문의 문루가 소실되었다.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여 발생한 병오 항일의병에서는 의병 1천여 명이 홍주읍성을 점령하여 수비하였으며, 

일본군의 공격 과정에서 조양문의 철비가 폭파되고 성문의 쌓은 돌들이 손상을 입었다. 

일제강점기 내각령 제1호 <성벽 처리에 관한 안건>가 1907년 발효되면서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 등 

4동의 건물과 일부 성벽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간이 훼철되었다.

1972년 10월 14일 사적으로 지정되면서부터 조양문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보수정비가 진행되었으며,

2006년부터 시작한 학술조사를 통해 훼철된 구간의 실체를 파악하였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2013년 남문인 홍화문을 복원하였고, 

2015년 수구지 발굴 및 성벽 정비를 통해 현재와 같은 상태를 갖추게 되었다. 

                                                                                (출처_국립문화재연구소 발간 「문화재지 제51권 3호」 발췌)

 

 

홍주 읍성은 근대시기 동학농민 운동과 2차례의 항일의병으로 읍성의 성곽 등 관련 시설의 훼손이 이루어졌는데

남문이 훼손되고, 서문과 북문의 문루가 모두 소실되어 성첩(城堞)만 일부 남았으며,

문루가 무사했던 동문도 편액이 소실되었다.

이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홍주에 이주한 일본 교민이 1913년에 서문을 철폐하였고,

1915년에는 북문을 철폐한 다음 동문마저 철폐하려 하였으나 강경한 읍민들의 반대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홍주읍성의 성벽은 1920년에서부터 1933년까지 10여 년 동안 순차적으로 해체되어

최장 1,772m에 달하던 둘레가 810m의 구간만이 남아 있다.   

                                                                        (출처_홍주읍성 역사문화환경 조성 관리계획_원광대학교 산업협력단)

 

홍주는 지세가 산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큰 길목이 아니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난리도 비껴갔다고 한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이후 홍주는 ‘홍성(洪城)’으로 이름이 바뀌고 일개 군으로 전락하게 된다.

홍주와 공주의 일본식 발음이 비슷해서 ‘홍주’를 ‘홍성’으로 바꿨다고 하나,

실은 홍주의병으로 항일의식이 높았던 지역의 기를 누르고자 일제가 지명을 바꾼 것이다.

일제는 홍성으로 개명하는 한편 홍주성의 성곽을 부수며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동문인 조양문 마저 철폐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홍성군민들이 들고일어나 조양문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성곽이 완전히 훼손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동문인 조양문이 무너진 것을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출처_최병화(가경고고학연구소 연구원))

 

 

일제강점기에 일부 성벽이 훼철되면서 오늘날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홍성은 지구조적으로 지진의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역사지진 기록이 남아있으며,

1978년과 1979년에 각각 규모 5.0과 4.0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벽 일부가 붕괴된 바가 있다.

2010년에는 집중강우에 의해 성벽이 붕괴되기도 하였다.

                                                                     (출처_국립문화재연구소 발간 「문화재지 제51권 3호」)

 

이렇게 지진이나 강우 등으로 붕괴된 성벽을 복원한 게 사진으로 뚜렷이 구분되기도 한다.

 

 

 

성을 한 바퀴 돌아 처음 성벽을 오르던 홍화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625 전쟁 이후 나라 살림이 좋아지자 전국에서 읍성이나 산성의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고창읍성의 경우엔 성 안에 있던 고창여고가 밖으로 나갔고, 무장읍성도 거의 복원 단계에 들어섰다.

홍성의 홍주읍성은 성 안에 도로와 주택, 상가가 너무 많이 들어서며 이들을 전부 밖으로 내 보낼 만큼

예산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절반 정도 남은 성벽을 잘 복원하며 보존하고 있다.

 

밖에서 보는 홍화문

 

 

성 안의 쉼터인 정자각

 

 

 

 

홍주읍성의 주요 보수구간 현황 요약

                                                               (출처_국립문화재연구소 발간「문화재지 제51권 3호」)

 

 

산성이나 읍성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찾다 보니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된다.

1907년 일제강점기 때 그들이 우리나라 읍성을 훼손하던 법령은 단순히 「폐성령」으로 알던 것을

이번에  내각령 제1호인 「성벽 처리에 관한 안건」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왜놈들은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때 수없이 많은 문화재를 약탈한 것도 모자라

우리나라 궁궐은 물론 지역의 읍성까지 이렇게 난도질했다.

이런 일본을 찬미하고 심지어 해군을 파견해 일본 군함에 경례까지 시키는 현 정부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