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_215
2022.10.22. (토) 오후에 잠시 탐방
오늘 일정도 참 빡빡하게 진행된다.
순창의 용궐산과 채계산에 이어 남원의 광한루원과 남원읍성을 둘러보고 교룡산성으로 넘어왔다.
사실 교룡산성이 있는지도 몰랐으나 남원의 관광안내도를 보고 교룡산성이 있다는 걸 알았다.
시내에 있는 다른 명소는 남원에 들리면 언제든 방문할 수 있지만 산성은 오늘이 아니면 안 되기에 바로 이동한다.
남원읍성 탐방을 끝내고 교룡산성까지 가는 데, 2.5km에 불과해 5분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교룡산성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산성 안에 있는 은적암에서 동학의 이론의 정립한 곳이기도 하다.
사료에 기록된 남원의 산성은 27개에 장수 지방까지 걸친 산성 10개를 더하면 37개나 되는 산성의 보고다.
그 많던 산성은 거의 사라지고 교룡산성 외에는 비홍산성과 척문리산성에서 겨우 흔적만 남았다.
□ 남원 교룡산성 (南原 蛟龍山城)
남원 교룡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3,120m이다.
현재 무지개 모양으로 입구가 표현된 동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작은 성인 옹성,
그리고 군데군데 성벽이 남아 있다.
온전하게 남은 동문터와 수문에 보이는 성벽의 구조는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서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전기에는 군대의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
산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성을 쌓은 입지나 형식으로 볼 때 백제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출처_문화재청)
교룡산성 등산코스
교룡산성 안내도
교룡산성 입구에 차량 예닐곱 대 댈 주차 구역이 있다.
교룡산성이나 선국사를 다녀갈 사람들이 주차할 수 있으나 주차 공간은 좁은 편이다.
차에서 내리면 바로 동문인 홍예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봉수대처럼 보이는 옹성이 먼저 반긴다.
산성의 계곡을 지나는 성벽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게 물길을 내준다.
교룡산성은 이렇게 계곡을 감싸고 정상인 교룡산을 한 바퀴 돌아오는 포곡식 산성이다.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1894년 2월에 봉기한 동학농민전쟁은 고부관아를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해 전라도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라 부임해 오는 탐관오리마다 농민을 수탈하기 급급했기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지나친 가렴주구는 민란이 일어나는 데 불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동학농민전쟁은 부안 관아를 점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세력이 기세 등등했으나
군사 훈련이 안 된 농민군에 지나지 않았다.
동학농민전쟁은 결국 일본군까지 끌어들이며 고전을 면치 못한다.
동학농민군의 주력은 노비, 백정, 승려, 재인 등 천민 부대의 대장이었던 김개남이 한 때 이곳에 주둔하기도 했다.
동문 안 기적비나 중수비 등에서 숙종 39년(1713)에
"서문을 개조하고 동문을 홍예문으로 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인조 14년(1636)에 동문초로(東門譙樓)가 중건된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초루는 홍예문 위에 쌓은 누각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러나 홍예문 아래에 문을 설치할 수 있는 지도릿돌이 보인다.
계곡의 수문에서 올라오는 성벽길
홍예문을 들어서면 바로 선국사가 있으나 이미 날이 저물 기세라 바로 왼쪽 성벽으로 길을 낸다.
성벽 밖은 3~4m의 높이고, 성 안쪽의 성벽은 무릎 높이로 낮다.
성벽이 높은 곳은 5~6m나 되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은 적군이 올라오긴 힘드니 한두 명이 지켜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곳이다.
이곳 여장은 반무릎으로 몸을 낮춰 활을 쏜다 해도 겨우 얼굴만 나올 정도의 높이니
공세는 쉽고 몸을 은폐하기도 좋은 위치다.
이 정도 높이라면 성을 지켜내기 좋은 곳이다.
기세 좋던 교룡 산성도 홍예문에서 약 450여 m 정도 오르면 성벽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남원읍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선국사가 있는 지점이 가장 낮아 이곳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은 것이다.
이곳은 평지를 걷는 느낌이 날 만큼 온순한 오솔길이다.
이렇게 성벽이 없는 길은 한동안 이어진다.
일부 토성으로 만든 듯 보이지만 왼쪽으로 석축이 조금 있는 곳도 있다.
토성은 우측으로 계속 연결되지만 이곳에서 잠시 끊긴 걸 보면 이동통로인 암문일 것이다.
한동안 안 성벽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위가 석성의 토대가 되고, 그 위에 일부 돌을 쌓았다.
바위에 새긴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안내문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교룡산성의 옛 이름인 고남(古南)이란 글자도 보인다.
일부 한글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근세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훼손된 교룡산성
때로는 성벽과 거리를 두며 산책로가 연결된다.
정상인 듯 보이는 바위를 지나게 된다.
다소 전망이 트인 정상에서 보는 남원시가지다.
1981년 7월 1일 남원읍에서 남원시로 승격되면서 남원군(16개 면)과 남원시(9개 동)로 분리된 이후
1995년 1월 1일 남원시와 남원군을 통합하여 도농 복합형 남원시가 발족되었다.
남원시는 시로 승격하기도 전인 1965년 187,965명을 최고로 매년 타 시·도로 인구유출이 심각해
올 11월 말 인구는 78,081명이라고 시청 홈페이지에 인구현황이 발표되었다.
57년 만에 109,884명이 빠져나갔으니 농촌인구의 감소는 지역 소멸론에 불을 댕긴다.
이런 추세로 인구가 빠져나가면 결국 군으로 격하되는 수난을 겪을 수 있겠다.
특단의 대책이 나오지 않고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점점 다가오는 교룡산 정상
교룡산 정상이지만, 특별한 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어느 상호신용금고의 표지판이 정상이란 걸 암시한다.
산 아래 골프장이 보이고 오른쪽엔 태양열 집열판이 검에 보인다.
동학(東學)을 세운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이 3년 6개월여를 머물렀었다는 은적암(隱蹟庵) 터다.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자리한 호국사찰 선국사(善國寺)에서 직선거리로 28여 m에 불과한 짧은 거리다.
선국사의 작은 암자였던 이곳은 덕밀암(德密庵)이었으나 최제우가 은적암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최제우의 은둔 포교지이자 수행지였던 이곳은 동학과 관련된 유적지일 뿐 아니라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에서는 남원 일대 농민군의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갑오년 당시 김개남은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는 남원성을 공략한 뒤,
이곳 교룡산성을 증축하여 남원의 외곽을 튼튼히 방비하였다고 한다.
은적암 한쪽 귀퉁이의 바위에 여러 개의 한자를 각인한 게 보인다.
그중 잘 보이는 한자만 찍어 보았다.
백용성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대각사를 창건하고 대각교를 창설하여 대사회적 실천 운동인 대각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1879년 16세 되던 해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화상을 은사로, 상허혜조율사로부터 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을 계기로 이제까지의 수행과 참선을 중심으로 한 삶에서 사바세계의 현실로 눈을 돌렸다. 1919년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에 불교 대표로 참가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불법에 귀의하여 민족의 위기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제창하면서 대각사를 창건하고 대각교를 창설했다. 대각이란 모든 중생이 갖고 있는 근본심성인 불성을 자기 스스로 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_다음백과) |
은적암 터
은적암 터를 지나자 이곳에서 비박하려는지 몇 명이 막 올라와 텐트를 친다.
그들을 지나 우측으로 길이 잘 난 곳으로 내려가면 선국사로 내려가는 길이나
거의 길이 보이지 않는 산성을 따라 길을 잡는다.
내려가는 길에 간혹 성벽이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한다.
성벽은 끊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며, 더러 이렇게 훼손되는 곳이 보인다.
이곳으로 길은 거의 끊어져 사람이 다닌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결국 숲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잡으며 겨우 내려선다.
드디어 교룡산성을 다시 만난다.
왼쪽 옹성 끝으로 큰 나무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동문인 홍예문이 살짝 드러났다.
평소 같으면 선국사에도 들렸겠으나 벌써 해가 떨어질 때라 그냥 홍예문을 나서며 교룡산성 탐방을 마친다.
예정에 없던 교룡산성 탐방을 끝냈다.
전라도 지역은 평야가 많아 어느 지역보다 풍요로운 곳이다.
물산이 풍부하다 보니 이곳에 발령받고 오는 정부 관리는 재산을 늘리는 방편으로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런 고혈을 짜 내는 벼슬아치들의 횡포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관리능력이 안 되는 정부를 대신해
사악한 일본군까지 나서며 농민군을 소탕하여 많은 피해를 양산했다.
이제는 광명정대한 세상이라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두 눈 뜨고 똑바로 지켜볼 일이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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