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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잘 복원된 담양 산성산의 금성산성

by 즐풍 2022. 11. 29.

2022_210

 

 

 

2022.10.21. (금)  10:20~16:15(5시간 55분 산행, 20분 휴식,  11.8km 이동, 평속 2.2km/h)  다소 흐림

 

 

강천산은 날머리를 달리해 두 번을 다녀왔다.

주소지에선 먼 곳이나 요즘 생활하는 고창에선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이 기회를 이용해 다녀오기로 한다.

강천산은 애기단풍이 유명하지만, 아직은 단풍철이 아니니 금성산성 위주로 둘러볼 생각이다.

금성산성을 타려면 담양의 금성산성 주차장에 주차하고 원점 회귀하면 된다.

 

 

□ 담양 금성산성(澤陽 金城山城)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조선 태종 9년(1409)에 고쳐 쌓은 후 

광해군 2년(1610)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성도 함께 만들었다. 

광해군 14년(1622)에는 내성 안에 관청을 건립하고 효종 4년(1653)에 성 위의 작은 담(여장)을 수리하면서, 

전반적으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외성은 2㎞, 내성은 700m 길이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동학운동(1894) 때 건물이 많이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동·서·남·북문의 터가 남아 있다. 

내성 앞에는 국문영 장군의 비석이 남아 있다.  
                                                                                                (출처_문화재청)

 

단양 금성산성 등산코스

 

 

담양은 어느 지역을 가든 메타쉐콰이어 숲이 많다.

많은 도로에서 쭉쭉 뻗은 나무를 볼 땐 좋은 데, 나무 그늘도 길게 져 농작물엔 별로 좋지 않겠다.

 

전국에 금성산성이란 이름을 가진 산성은 무던히도 많다

한자는 금성(金城)이거나 금성(錦城)으로 쓰며 경산, 금산, 나주, 담양, 부여, 영동, 의성, 함평, 합천, 해남에 있다.

물론 역사에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만 있는가 하면 담양처럼 실물이 존재하는 곳도 있다.

 

 

□ 금성산성

 

금성산성은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에 2개의 작은 마을로

둘러싸인 금성산(603m)에 위치하고 있다.

담양의 금성(金城)산성은 장성의 입암(笠巖)산성, 무주의 적성(赤城)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이다. 

금성산성은 철마봉, 운대봉, 장대봉을 이어주는 두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외성의 전체 길이는 6,486m, 내성은 859m이다.

성벽 주변의 훼손된 흔적을 토대로 삼국시대(기원전 57~676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금성산성은 1409년에 재건되었으며, 임진왜란(1592~1598) 후 1610년에 복원되었다.

그 후 주요 병영 기지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안내문)

 

 

금성산성은 동학혁명군 전적지이다.

전봉준 장군은 금성산성 전투를 지휘하다가 옛 전우를 찾아 식량 지원을 요청했으나,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친구 김경대의 밀고로 1894.12.2. 관군에게 체포됐다.

담양, 광주, 장성, 순창 지방의 1천여 명에 달한 동학농민군은 쫓기고 밀리면서,

전봉준의 뒤를 따라 20여 일간 피비린내 나는 격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모두 희생 또는 체포되고, 금성산성 내 모든 시설이 이때 전소되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금성산성 보국문

 

 

축성시기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우왕 6년 기사에 왜구가 남원을 공격하고자 할 때 

금성산성에서 전마(戰馬)를 배 불린 뒤에 북상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우왕 6년(1380)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속전에는 삼한시대에 축성되었다고 하나 근거가 없으며,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초축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개 • 수축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 태종 10년에 담양 금산에 산성을 수축하였다는 기사가 있고,

선조 26년 정철이 담양의 금성에 성을 수축하자는 상소가 있다. 

이성의 수축은 광해군 2년(1610)에 부사 최동이 개축하고,

광해군 14년(1622) 순찰사 황근중이 별장 정계숙에게 명하여 내성에 대장청을 건립케 하였으며,
효종 4년(1653)에는 관찰사 심택이 내성을 수축하였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금성산성은 바로 위 사진과 이 사진이 가장 아름답다.

단풍이 들고 안개가 기면 더욱 환상적인데,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

 

보국문에서 충용문까지는 외성을 두른 형태로 충용문은 내성의 성격을 갖는다.

 

 

1995년에 서문 옹성, 1996~7년에는 외삼문, 내삼문 복원과 문루를 신축하였고,
2001년에는 동문 복원과 내성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며, 연차적으로 복원공사를 계획하고 있다.
2008년 내성의 일부를 조사하여 건물지 4개소, 담장시설, 배수시설 등을 확인하였다. 
건물지는 2~3번에 걸쳐 중복이 이루어져 있어 오랜 기간 동안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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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1908년 호남창의 회맹소 본진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투를 치른 곳이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결성한 연합의병 지휘부로 기삼연이 대장이었다.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 본진은 1908년 1월 혹한을 피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금성산성에 머물렀다.

이때 의병부대의 동향을 탐지한 일제 군경의 습격으로  의병 30여 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하였다.
기삼연은 인근에 몸을 숨겼으나 일본군의 추격으로 붙잡혔고,

의병들의 구출 작전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총살, 순국하였다.
금성산성은 임진왜란 때도 의병의 활동 거점이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금성산성 안내도

 

 

 

충용문을 지나며 산성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돈다.

 

 

 

서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산성은 비교적 상태가 좋다.

잘 관리는 되는 것으로 보아 복원한 게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느낌이다.

성벽엔 여장까지 잘 갖춰지고 이동하기 좋게 바닥은 돌로 잘 다듬었다.

 

담양호 건너편엔 추월산의 거대한 바위가 드러났다.

바위 우측엔 하얀 건물은 보리암이란 작은 암자도 보인다.

 

 

 

금성산성은 서쪽 당양호 방향으로 산세가 가파르게 떨어진다.

올라가는 길엔 바위가 많아 이런 바위가 자연적인 성벽이 되기도 한다.

 

이 정도로 여장을 잘 갖췄다면 현대전에서도 매우 유용한 성벽이다.

 

5~6m 정도의 높은 성벽 

 

이렇게 높은 성벽이라면 적군이 성벽을 타고 넘을 수 없는 높이다.

아군은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여장이 잘 갖춰줘 방어하기 좋은 성벽이다.

 

금성산성의 계곡이 지나가는 곳은 성벽이 뚫렸으니 포곡식 성벽이다.

수문 위로 예전엔 서문이 놓였으나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서문을 둘러싼 옹성이 조망된다.

 

 

 

수문이 지나가는 통로는 뚫렸고, 산으로 올라가는 성벽은 계단식으로 쌓았다.

보수한다고 제법 높은 층을 지게 계단식으로 만들었다.

워낙 층이 높아 위칸으로 이동할 수 없게 복원했다.

중간에 계단이 없어 유사시 협업을 할 수 없는 구조로 복원했으니 잘못된 복원이다.

 

□ 서문터 

 

금성산성의 외성에는 4개소의 문루가 있었는데, 이곳은 서문이 있던 자리이다.
계곡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양옆으로 축단을 쌓고 그 사이에 성문을 배치하였다.
축단 상부에는 주초석이 일부 드러나 있어 문루가 정면 3칸, 측면 1칸인 것을 알 수 있다.
적의 공격 시 문을 보호하고, 적 퇴치가 용이하도록 규모가 큰 옹성이 S자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옹성의 끝 부분은 단이 진 성벽과 연결되어 있다.
성벽의 너비는 3.5~4.0m이고, 내.·외부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1~3단 정도의 보축을 쌓았다.
성문 오른쪽 축단에는 "光州"라는 글씨가 있어 성의 정비를 할 때 
인근 고을인 광주에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1995년도에 서문지와 옹성을 함께 보수하였다.  (안내문)

 

 

 

서문터에서 북문터로 올라가는 성벽 구간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성벽을 쌓거나 보수할 때 이 많은 돌을 어디에서 채취했을까?

 

 

 

 

□ 북문터


금성산성의 외성에는 4개소의 문루가 있었는데, 이곳은 북문이 있던 자리이다.
북쪽에 치성(雉城)이 있고 운대봉과 연대봉을 지나 동문과 연결된다.
남쪽으로는 서문과 연결되는데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고, 급경사를 이뤄 성곽을 단이 지게 쌓았다.
북문은 성곽 전체로 볼 때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서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다.
외부의 인근 마을(담양군 용면 분통리)과 강천사(전북 순창)로 연결되는 좁은 산길이 있다. 
성문 바깥쪽 산길 좌우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유사시에는 외부로의 퇴각로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문은 외부에 드러난 주초석과 문지 주변 발굴조사를 통해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2012년 복원하였다. (안내문)

 

천왕문이란 편액이 걸린 게 사찰에 있는 천왕문과 같은 한자라 사찰에 온 느낌이 있다.

 

북문 위로 조그만 공터가 있어 휴식 겸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평일이니 오가는 등산객도 별로 없어 한적한 느낌이다.

 

송락바위로 내려가는 구간인데, 조금 내려가다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몰라 되돌아왔다.

단풍철에 다시 오면 그때 송락바위로 내려가야겠다.

 

아하~, 이곳에 금성산성이 있다고 쉽게 산성산이란 이름을 붙였구나...

 

능선을 성벽으로 돌출시키며 석성을 쌓아 쉽게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성벽이다.

 

옛날에 성벽을 쌓는다는 건 지금보다 훨씬 고된 작업이었다.

장비가 변변치 않을 때라 돌을 다듬기가 어려운 데다 석재를 이동하는 건 거의 지게에 의존했다.

큰 돌은 네댓 명이 이동했겠지만, 숲을 지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성벽 끝으로 보이는 바위가 북바위다. 

 

 

 

북바위를 내려오면 이렇게 거칠고 높은 자연 성벽이다.

운대봉이라고도 한다.

 

□ 동문터

 

금성산성의 외성에는 4개소의 문루가 있었는데, 이곳은 동문이 있던 자리이다.
계곡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양옆으로 축단을 쌓고 그 사이에 성문을 배치하였다.
축단 상부에는 주초석이 일부 드러나 있어 문루가 정면 3칸, 측면 1칸인 것을 알 수 있다.
협축의 성벽을 따라 형성된 옹성이 있고 그 끝 부분에는 높게 쌓은 망대가 있다.  

망대는 상부 평면이 가로 6.25m, 세로 2.5m의 긴 네모꼴이며 
바깥쪽 석벽은 2.7~3.8m 높이로 외곽의 성벽에 비해 높은 편이다.

돌 쌓는 방법은 성벽과 달리 아랫부분에 점판암 계통의 기다랗고 납작한 돌로 쌓아 올렸다.

자연암반과의 부착력을 높이기 위해 망대 아래에는 강회를 사용하였다.
1995년도에  옹성과 성벽을 함께 보수하였으며,

다른 문지보다 성벽이 높고 특이한 옹성 형태를 가지고 있다.  (안내문)

 

 

이 성벽 위로 문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내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왼쪽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옹성 아래쪽으로 성벽이 지나간다.

 

이제부터 암 암봉을 따라 시루봉으로 오르게 된다.

 

산성 서쪽으로 정읍에서 담양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고,

동쪽으로 전주에서 순창으로 통하는 길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원, 함양 등 내륙 산간지방 및 광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즉 산성의 위치는 전라북도 곡창지대의 동남쪽 끝부분과 전라남도 곡창지대의 

동북쪽 끝부분을 연결시키면서 경상남도의 서쪽 관문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다. 

또한 산세와 지형을 잘 이용하여 쌓은 것으로 유사시에 즉시 입성할 수 있는 한편 

적으로부터 방어 또는 역습에 유리한 전형적인 산성에 속한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시루봉은 거대한 암봉이 여러 개 겹쳐진 봉우리다.

이렇게 크고 가파른 암봉이라 자연적인 성벽이 되는 셈이다.

 

안쪽에 내성의 성문이다.

내성은 금방 끝나며 더 이상 이동하기 힘든 곳이라 다시 외성을 따라 올라간다.

 

성벽을 따라가던 구간은 어느새 안쪽으로 길을 내며 작은 암자 주변을 지나게 된다.

암자만 통과하면 처음 오르던 충용문인 남문에 닿게 된다.

 

원점 회귀하며 충용문을 지나게 된다.

 

충용문과 보국문을 연결하는 외성

 

충용문을 지나며 다시 보는 보국문이니 금성산성 탐방도 끝나간다.

금성산성의 보국문을 지날 땐 늘 강천산 단풍을 염두에 뒀다.

이번엔 강천산은 생략하고 상성산 중심의 금성산성을 온전히 둘러보는 시간이 됐다.

 

 

 

 

금성산성을 지나며 동굴법당이 있다는 연동사가 불과 200m로 가깝다고 해 내려섰다.

제법 멀게 느끼며 도착한 연동사의 동굴법당이다.

 

이곳은 약 500여 년 전에 전우치가 업둥이로 들어와 이곳 동굴법당에서 제세팔선주를 훔쳐 먹던 여우를 잡아서

용서해주고 살려 보냈더니 여우가 은혜로 전우치에게 도솔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제세팔선주를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실제 연동사에서 스님들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빚어 마시던 곡차이다.

지금도 제세팔선주의 비법이 이어져서 추성주로 명맥을 이어간다.

전후치는 실존인물로 담양 전씨라고 한다. (안내문)

 

동굴법당

 

 

□ 연동사지 지장보살입상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에 위치한 이 석불은 금성산성 남쪽 높이 약 20m쯤 되는 암벽 바로 밑에 

석탑과 같이 보존되어 있다.
이 석불은 사각형의 돌기둥 앞뒷면을 약간 다듬어 머리 부분을 조각하고, 

신체에는 손과 형식화된 옷 주름을 표현했다. 머리는 민머리이며 얼굴은 둥글넓적하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며, 양팔을 걸쳐 내려온 한가닥의 옷자락이 특징적이다. 

가슴 아래에 장식된 띠 매듭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어진 양식이다. 

오른손은 팔을 구부려 위로 올린 상태에서 중지와 엄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신체의 균형에 맞지 않게 길게 내려뜨렸다. 

몸체 아랫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약간 앞을 향해 고개를 숙인 듯하다.
이 불상은 머리 부분과 얼굴에 사실적인 기법이 나타나고 있으나, 

신체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어깨를 움츠린 듯한 모습, 고개를 숙인 점 등에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_문화재청)

 

□ 연동사지 3층 석탑

 

연동사의 옛 터에 석불 1구와 함께 남아 있는 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윗면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네 모서리선이 목조 지붕의 지붕 선처럼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지붕돌 밑면에는 별도의 돌을 끼워 넣어 층급받침을 대신하고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 위로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 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무너져 각 부재들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담양읍 오층 석탑(보물 제506호)과 곡성 가곡리 오층 석탑(보물 제1322호) 등과 같이 

백제계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_문화재청)

 

연동사에서 금성산성 오토캠핑장을 지나 제법 오래 걸을 다음에야 금성산성 주차장에 도착했다.

굳이 들릴 필요가 없었는데....

 

 

담양 금성산성을 온전히 탐방한 날이다.

우리나라 남한에만 1,200여 개의 산성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중에 금성산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산성으로 비교적 복원도 잘 되었다.

담양의 메타쉐콰이어 등 여러 명소와 함께 둘러보면 좋을 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