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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등등/해외 여행

명13릉 중 정릉 탐방

by 즐풍 2018. 12. 19.





2018.12.09. 일  오후




명13릉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천수산(天寿山)에 조성된 명나라 황제와 황후들의 무덤이 안잔된 곳이다.

40만㎢ 면적에 조성된 묘역은 뒤쪽에 천수산이 감싸고, 남쪽으로는 환하게 트여 있다.

앞쪽 땅을 파고 들어가 지하 궁전을 지은 것으로 보통 정릉을 둘러본다.
명나라는 17대 황제까지 이어졌는데 이곳엔 13명의 황제와 29명의 황후, 1명의 귀비가 잠들어 있다. 

초대 황제인 주원장은 당시 수도였던 난징의 효릉에 매장되었고, 2대 황제는 전란에서 실종되었고, 6대 황제와 8대 황제는 동일 인물이다.

명13릉은 난징의 효릉(孝陵)과 함께 2000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 관람객에게 개방한 것은 수도를 베이징으로 천도한 3대 영락제의 장릉,

묘역 조성에 가장 많은 국가 예산을 쓴 14대 만력제의 정릉, 아담한 규모로 조성된 12대 융경제의 소릉 등 3곳이다.



정릉의 묘비명엔 아무런 글씨가 없다.

별로 한 일이 없어서 안 썼다는 설과 쓸게 너무 많아 안썼다는 설 두 가지인데, 가이드 말은 별로 한 일이 없기 때문이란 설에 무게를 둔다. 









이 묘역엔 이런 어지러운 모양의 나무가 많은데, 용의 발을 닮아 용발나무라고 한다.

용을 황제로 의인화한 걸 나무에도 적용시켜 이곳에 심은 것 같다.



고압세척기로 쏴 주면 검은 색 먼지를 쉽게 제거되면서도 훼손될 거 같진 않은데, 내 생각이 잘못된 걸까?

중국엔 옥돌이 많은지 웬만하면 다 옥돌이다.



정릉(定陵)

명 정릉(明 定陵)은 만력제와 황후 효단현황후 왕씨, 태창제를 낳은 효정황태후 왕씨의 무덤이다.

1956년 5월, 1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무덤 내부의 지하궁전은 현재 문화유산과 관광 상품으로 민간에 개방되었다.

중국 황제의 능묘발굴로는 최초로 정릉이 발굴되었다.  

명나라 시대의 연구와 고고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당시 고고학술이 미숙한 가운데 발굴되어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이후 이러한 전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중국정부는 오늘날까지 황제 능묘의 발굴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문화혁명 때 무지한 홍위병들이 정릉 지하에 보존되어 있던 만력제의 유해와 효단현황후, 효정황태후의 유골을 모두 소각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참 대단한 규모다.

입구에서 십자가 모양으로 능이 조성되었는데, 십자가 모양의 맨 위가 황제의 무덤이다.

여긴 십자가의 양쪽 팔에 해당하는 곳으로 황후가 안장되어야 하는 데, 유골을 담는 관이 너무 커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관은 한 번 들어오면 뒤로 물러날 수 없다고 하여 결국 황제의 관 옆에 안치되어 이곳은 텅 비게 된 것이다.

이 평상에 관이 안치되고 그 아래쪽 공간에 유품이 보관된다.

현재, 저 위에 있는 치성용 돈은 주기적으로 모아 어려운 곳에 기증한다고...

우리나라 천마총처럼 벽에 벽화도 좀 그려놓았다면 더 좋았을 걸







황후의 텅 빈 안치실을 나와 이번엔 황제가 잠든 릉으로 들어가기 전 전실이다.

사후에도 무슨 정무를 볼 게 있다고 용좌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 명13릉 중에 명나라 말기로 갈수록 능의 규모나 화려함이 더해가 정릉이 가장 사치스러운 형태라고 한다.

장릉과 소릉, 정릉 세 곳이 개방되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정릉의 주인인 만력제 때 재정이 열악해 앞에 있는 큰 도자기는 할아버지 때 구입한 걸 갖다 놓았다니 측은한 생각이 든다.  




금년 3월 하순, 우리 네 형제 부부가 캄보디아의 왕코르왓 유적지를 다녀왔다.

캄보디아가 지금은 저개발국가이나 한 때 세계 최고의 영광을 누리던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나라엔 거의 없는 사암(sand stone)이라는 독특한 바위로 한 때 찬란한 석재문화를 꽃피운 나라였다.

사암의 바위는 처음 돌을 잘랐을 때 비교적 세공(細工)하기 쉬우나 이후 굳어지면 더욱 더 단단해지는 바위라고 한다.


그러니 앙코르왓 건물에 설치된 회랑의 부조는 여신의 목덜미에 난 주름까지도 묘사할 만큼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앙코르왓의 긴 회랑을 따라 설치된 부조는 당시 종교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지금도 인도나 주변국의 관련된 신도들의 성지 순례지로 특별한 부조는 그들이 만진 손때로 번쩍번쩍 빛이 난다.

그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 앞에선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런 종류의 바위는 지중해에서 발달한 대리석 문화도 사암과 같이 다루기 편하다고 한다.

우리의 석조문화는 화강암으로 대표되지만, 사암과 달리 칼만 대면 쩍쩍 갈라지니 워낙 다루기가 힘들다.

불국사에 있는 다보탑이나 석가탑은 직각 형태로 자르고 다듬어 끼워맞춘 것이니 어려울 건 없으나 균형미가 좋다.

석조문화의 대표작은 석굴암과 그 안에 안치된 본존불은 화강암인데도 사암으로 만든 작품처럼 정교하기 이를데 없다.


비록 캄보디아 앙코르왓 회랑에 조각된 부조만큼은 아니라도 이 용좌의 무늬 역시 정교한 솜씨임에 틀림없다.  




황제의 유골이 보관된 관인데 문화혁명 때 무지몽매한 선동꾼들이 소각하고 훼손했다.

지금이라면 첨단 과학기술로 당시 황실의 건강, 체질, 병력 등 다양하고 귀중한 자료를 많이 얻어낼 수 있는데, 아쉽다.



유해와 유물이 담긴 관과 사물함이다.



이곳이 워낙 넓은데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듯해 황제는 자주 이곳에 와 연회를 열고 휴가를 즐겼다고도 한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정릉이 묻힌 위치를 적은 판석이 바닥에 있다.

정릉을 발굴할 때 입구를 찾는 게 어려웠는데, 그 판석을 찾음으로써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누각에 모셔진 정릉 묘비석








앞에만 묘비명이 있을 뿐 뒤엔 글자가 안 보인다.



거대한 누각이 있던 자리로 건물은 소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다.



13릉의 대문인 대궁문

황릉은 황제가 사후에 머무는 곳이라 궁문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붉은 색 탓에 대홍문이라고도 불렀다.

대궁문은 선황의 권위가 시작되는 곳이라 모든 황제는 이곳을 걸어 들어갔다. 






뒤로 보이는 천수산과 정문



현대에 세워진 담장에 명13릉 축조 과정을 새긴 석조물









명13릉을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보면 중국 황제의 릉 규모를 짐작할 수 있어 우리와 비교가 가능하다.

언젠가 다른 황릉과 진시황릉까지 발굴되면 그 엄청난 규모에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급할 것 없는 중국의 완벽한 복원 기술이 생길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 우리 생전에 볼 기회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