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기타 등등/해외 여행

서태후가 중국을 말아먹게 만든 이화원

by 즐풍 2018. 12. 16.






2018.12.09. 일  오후에 잠시 탐방



이화원(颐和园)

이화원은 이양충화(養沖和) 즉 노인들의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온화하게 한다는 뜻을 담겨 있다.

약 290만 ㎡의 엄청난 부지에 건설된 중국 최대 규모의 황실정원이다.

일산호수공원이 103만㎡로 동양 최대의 인공호수라고 하지만, 이화원은 일산호수의 거의 3배나 되는 엄청난 크기다.

금나라 시대인 13세기 금산행궁(金山行宮)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이래 750년 간 역대 황제들의 사랑을 받아온 곳으로

이화원이 지금과 같이 대규모로 발전한 데는 건륭제와 서태후라는 두 사람의 공이 크다.

서태후는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소실된 이화원을 정부의 군비까지 빼돌려 재건했다.

막대한 군비 유용은 허약한 청나라 군사력에 치명타를 끼쳤다.

곧 이어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의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이화원 건물은 서태후가 복원한 건물이 많아선지 용마루가 있는 건물을 보지 못했다.

인공호수를 만든데다 여성의 상징인 음기가 많아 전세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도 이와원 만큼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단 한 명 예외가 있긴 한데 여성인 독일 메르켈 총리만이 이곳을 방문했다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음기 쎈데가서 양기를 뺏기기 싫은 모양이다.

그런 음기가 쎈 곳을 우리 형제들이 다녀왔으니 2019년은 아내에게 충성을 다해야겠군... 




인수전으로 들어가는 인수문

청나라는 여진족인 누루하치가 세운 나라이다 보니 인수전 옆에 여진족 글씨를 같이 써 일국 2체제 같은 느낌이 난다.



수성석(壽星石)

1886년 이화원을 재건할 때 지금의 북경대학에서 옮겨온 이 돌은 푸른 색상에 윤기가 나고 조형이 기이한 게 마치 수성 같아 수성석이라 불린다.

안내문엔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등 4개 언어로 설명되어 있어 일견 뿌듯한 느낌이다.

이곳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우리말로 된 안내문이 함께 있는 걸 봤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꽤 많이 중국을 여행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음기 팔팔한 서태후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자 남자들을 끌어들였는데,

소문이 나는 게 두려워 혀를 자르고 팔도 자르고 나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다고 한다.

그렇게 죽어간 남자들이 얼마나 될런지... 그러니 이화원이 음기가 쎄다는 말이 과장은 아니다.




인수전

원래 이름은 근정전으로 황제가 행궁에 머물 때 정사를 돌보던 곳이다.

비운의 황제 광서제에게 인수전은 비극의 장소다.

어린 시절에는 수렴청정을 한 서태후가 뒤에서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읊조렸을 뿐이고,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고 난 뒤 인수전에 발걸음조차 못했다.





서태후(1835~1908)

본명은 난(蘭)으로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녀는 18세에 입궁했으나 3년간 한 번도 황제의 수청을 들지 못했다.

당시 황제의 잠자리 시중은 붉은 천으로 싸둔 대나무 조각 이름표를 뽑는 형태였기 때문에 2천 명의 궁녀 중에서 뽑히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난은 주변의 환관을 매수하여 황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연명천'이란 걸 알아내 황제가 다니는 길목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해서 함풍황제의 수청을 들게 된 난은 재순 황제를 낳아 비가 된 다음 태후 자리까지 올라 천하를 호령한 서태후가 되었다.


함풍황제가 죽자 겨우 6세 밖에 안 된 재순황제가 즉위하자 의귀비였던 서태후는 자희황태후에 봉해졌다.

이때 함풍황제의 모친은 자안황태후에 봉해졌는데 이 두 사람은 각각 동궁, 서궁에 서주하여 동태후, 서태후로라 불렀다.

이 두사람은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를 대신하는 수렴청정을 했다.

1874년 재순황제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동태후마저 세상을 뜨자 황권은 서태후 손에 들어갔다.

권력에 맛을 들인 서태후는 황권을 되찾으려는 광서황제의 세력을 누르고 광서황제를 이화원에 감금시키고 자신이 정무를 보았다.

서태후는 48년간 천하를 호령하며 이화원에 크게 집착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이화원에서 보내고 죽음까지도 이화원에서 맞았다.



이 호수는 서태후가 사람들을 동원시켜 흙을 파내 호수를 만든 것이다.

파낸 호수는 당연히 옆에 있는 동산에 쌓아 산을 더 높이고 건물까지 짓는다.

중국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고사성어가 있다더니 근대에 이르러 서태후가 그 말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한 셈이다.

지금도 이렇게 큰 호수를 만들려면 중장비를 수천 대 투입해 상단한 공력을 들여야 가능한 일인데, 당시에 인력으로 했으니 대단하다.

청나라에 여자 하나 잘못 들여 나라가 망하는 시간을 재촉했으니 누굴 탓할까?






베이징에서 이화원을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자금성만큼이나 짧은 시간에 휘~ 걸어 눈으로만 감상했으니 아니 본만 못하다.

나중에 다이 온다면 여행사를 거치지 않고 자유여행으로 와야 편하게 맘놓고 다닐 수 있겠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북경은 서울보다 1~2도 날씨가 더 추워 아침 최저 영하 12~13℃였다.

다행히 바람 한 점 없어 그다지 추운줄 몰랐으나 어디든 가면 이렇게 얼음이 언게 물이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제 겨울 초입에 들어섰는데, 대부분 물이 언 걸 보고 다소 의아스럽게 생각됐다.



불향각

산 중턱에 세워진 3층 건물은 이화원을 대표하는 건물로 불향각이다.

본래의 건물은 1860년 영·프 연합군에게 파괴되어 지금 보이는 건 1891년 재건된 것이다.



낙수당

건륭황제가 모친을 모시고 휴식을 취하던 장소로 후에 서태후의 침궁으로 사용되었다.



약수전









장랑



흔히 천간랑하,천 칸의 긴 회랑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서태후 거처인 낙수당에서 불향각이 우뚝한 만수산 입구까지 728m 길이의 긴 회랑이다.

장랑의 칸수는 273칸, 천 千은 단지 많다는 의미

회랑의 대들보에 새겨진 다양한 풍경, 민속, 신화 속 이야기들은 장랑을 하나의 갤러리로 탈바꿈 시킨다.

그림이 그려진 대들보 수는 14,000개에 이른다.

호사가들은 중국 최대의 야외미술관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서태후의 욕심이 후세에 이런 걸작은 남긴 셈이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동궁문

이화원의 실질적인 정문

이화원이란 현판이 문 정 중앙에 걸려있다.

서태후에게 정권을 빼앗긴 채 우울한 일생을 보낸 광서제의 친필이다.









기대에 10%도 못 미치는 짧은 시간에 수박 겉핥기로 본 이화원이라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3년 후 은퇴 후 배낭만 달랑 매고 북경의 명소만이라도 잘 챙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