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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등등/해외 여행

장엄함의 극치, 앙코르왓의 비경

by 즐풍 2018. 8. 2.





탐방 일자 2018.03.25. 일,  탐방 시간 15:21~17:02(02:41 소요),  탐방 장소: 앙코르왓 사원



앙코르왓(Angkor Wat)


건축 시기: 1113년~1150년

건축 양식: 앙코르 왓

왕: 수리야바르만 2세

종교: 힌두교(비슈누 숭배)



앙코르를 중심으로 수많은 예술의 꽃을 피웠던 사람들을 자신을 크메르인이라고 불렀다.

최초 500년은 인도에서 건너온 후난의 지배를 받았으나 802년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통일되었다.

인드라바르반 1세(877~886)때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당시 크메르 왕은 신을 대신하는 존재로 국가를 보존하는 책임을 졌고, 백성은 신을 위하여 왕에게 무조건 복종했다.


앙코르를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프놈 바케잉을 건립하여 대도성을 만든 젊은 왕이 야소바르만 1세(889~915)다.

앙코르는 1177년 참파에 점령당했지만, 자야바르만 7세는 4년 뒤 1181년  참파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앙코르 톰, 바이욘, 쁘레아 칸 등 수십 개의 불교사원을 건설하여 앙코르 문화를 꽃 피웠다.

자야바르만 7세가 사망하자 다시 힌두교가 세력을 잡게 되어 많은 불교 예술품이 파괴되었다.


802년~1431년까지 629년간 힌두교와 불교 예술을 꽃피웠던 앙코르 왕국은 태국이 점령하자 영혼의 안식과 사회적

안정을 가르치는 소승불교로 한 차례 더 개종한다.

비로소 부역과 전쟁에서 해방된 크메르는 지금도 소승불교를 믿으며 도심에 사찰이 있다.

반면, 조선은 개국과 함께 불교가 탄압받자 사찰은 산속 명당자리로 스며든 대승불교다.


날씨와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변하는 앙코르 유적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빠져보자.

캄보디아에는 천 개가 넘는 유적이 있다고 하는 데 그중 하나가 앙코르와트 유적이다.

앙코르왓은 굴러다니는 돌과 밟고 다니는 돌 하나하나에 장인들의 노고가 숨 쉬고 있는 거대한 역사 도시다.

저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이런 아름다운 앙코르에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했을 만큼 감동적인 사원이다.


'앙코르'는 산스크리트어로 도시를 뜻하고, '왓'은 태국말로 절이란 뜻이므로 '도시의 사원'인 셈이다.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7년간 2만 5천 명이 동원되어 '지는 달'과 '떠오르는 달'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지어졌다.

해자까지 포함한 사원의 크기는 동서로 1.5km, 남북 1.3km로 총 200헥타에 이르는 앙코르 지역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폭 12m, 길이 250m의 사암으로 된 다리를 건너면 서쪽 정문을 지나게 된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옵션으로 앙코르왓 사원으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면 좋겠다.

내가 선택한 옵션엔 일출이 들어있지 않아 상당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필수 코스로 넣겠다.

춘분 때의 일출은 앙코르왓의 중앙사원 정중앙으로 해가 솟아 오른다는 데, 시기는 맞췄으나 옵션에 실패했다.

우기엔 비가 많으므로 일출을 보려면 건기가 적당하겠다. 


앙코르왓을 출입하려면 경건한 마음은 필수이고 단정한 옷차림도 요구된다.

민소매나 슬리퍼 착용은 안 되고 바지나 치마는 무릎을 가려야 한다.

승려와 사진 촬영은 금지되며 정해진 길로 다녀야 하고 위험한 행동도 제한된다.

승려와 촬영이 금지된 재미난 사유를 알아보자.


우리나라 20대 초반의 여대생은 젊은 승려가 보이자 얼릉 허리를 감싼 후 스마트폰으로 인증샷을 찍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선 흰색 살결에 대한 로망이 있는데, 예쁘고 살색이 하얀 여대생이 자기 허리를 감싸니 얼마나 심쿵했을까?

몰랐을 땐 모르고 지나가겠지만, 승려는 아리따운 여대생의 탄력있는 몸에 닿자 지금까지 이룩한 불심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

이렇게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파계승이 된 승려가 한두 명 있는 모양이다.



*앙코르왓 여행 후기는 최장길의 「앙코르왓 신들의 도시」와 홍윤기 가이드의 안내를 전편에 걸쳐 참고했다.*





앙코르왓 서쪽 정문을 들어선 후 보는 사원 전경이다.

건기를 한 달 앞둔 시점이라 해자엔 물이 거의 없다.

춘분에 일출이 정중앙에 뜨기 때문에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데, 옵션에 들어있지 않은 게 아쉬웠다.










가이드가 선물한 사진



해자는 사원을 따라 3.6km의 직사각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통로는 해자를 따라 석재로 가로놓은 도로를 따라 들어갈 수도 있고, 사진처럼 프라스틱으로 만든 부교를 따라 진입해도 된다.

우린 이 부교를 따라 출입했는데, 부교를 걸을 때마다 쿠션이 느껴져 석교를 걷는 것보다 좋다고 느꼈다.







앙코르왓 사원의 단면도이다.

이 사원 밖은 해자가 둘러싸고 있으며, 붉은 화살표를 따라 들어간다.










나무로 가설재 밖으로 마지막 중앙의 다섯 개의 탑을 볼 수 있는 데, 뒤쪽 모서리에 있는 두 탑은 가려져 있다.

가설재가 없었다면 시야가 좀 더 틔였을 텐데...






▲왼쪽과 ▼오른쪽의 대칭인 모습






중앙탑에서부터 세 개의 긴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데, 세 번째 회랑의 사암 벽에 아름다운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조각에 사용된 사암(sandstone)은 모래가 물속에 가라앉아 굳어서 된 바위다.

사암을 채취했을 때는 섬세한 조각이 가능할 만큼 돌이 조금 무르고 시간이 갈수록 단단해진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대부분 화강암이라 칼만 대면 부서지기 때문에 석굴암처럼 조각은 선이 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칼을 가는 숫돌이 사암의 일종이라고 한다.

사암으로 섬세한 조각을 한 회랑의 부조는 2m 높이에 길이는 600m에 이르는 방대한 크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비슈누의 영광과 수리야바르만 2세의 신성한 권위, 전쟁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부조다.

이 외에도 힌두교 시바신, 희망, 생명, 천지창조, 죽음, 절망, 전투 장면, 신들의 이야기 등 주제가 다양하다.

그러므로 이 회랑의 부조는 역사서이자 서사시, 철학 등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이 힌두교의 시바신과 연관이 있어 인도의 힌두교인의 성지로 추앙 받는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만졌는지 반짝반짝 윤이나는 게, 만든 지 900년이 되었어도 어제 만든 것처럼 여전히 섬세하다.





이러한 부조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사암엔 철분이 들었는지 철이 녹슨 색깔처럼 보인다.

석재가 다르니 이들의 유적이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다른 벽엔 이런 압사라 조각이 수없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얼마나 섬세한지 나이든 농염한 여인의 목엔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주름까지도 표현할 만큼 정교하다.  

1,500개가 넘는 여신과 압사라가 벽감에 조각되어 있어 우리나라로 치면 그림이나 조각 하나하나가 다 국보급이다.




누구냐?

꼭 이렇게 유방을 만져야 해? 따듯한 촉감이 느껴져?



이 계단은 왕이 신께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 계단으로 70도 경사다.

신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 가파르게 만들어 왕도 두 팔을  계단에 대고 무릎을 꿇으며 기어 올라가고 내려왔다.

70도 경사오 된 11개의 계단과 50도 경사로 된 1개의 계단이 있다.

이 70도의 계단은 위험하니 통제되고 있다. 



탐방객은 뒤에 50도로 된 계단에 기울기를 더 낮춰 완만한 나무계단을 이용해 오르게 된다.

이 계단마저 위험해 꼭 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지금도 3층에 설치된 이 탑을 쌓기가 힘들텐데, 900여 년 전에 어떤 기술로 쌓았는지 궁금하다.

아테네 신전이나 만리장성도 앙코르왓에 비하면 별게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다.

앙쿠로왓에 사용된 석재는 약 6억 개에 이른다고 하니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다.




창 밖으로 본 아래쪽 건물은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거멓게 때가 끼었다.  




파노라마로 찍은 석탑의 모습



가이드가 파노라마로 찍어 준 사진인 데, 동일한 사람을 두 번이나 넣는 걸 처음으로 배웠다.








앙코르왓은 내 인생에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