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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원 탐방/덕유산

남덕유산 상고대와 설경

by 즐풍 2019. 6. 12.




산행일자 2016.2.27.토 09:50-16:45(여섯 시간 55분 산행, 12.78km 이동)   날씨: 흐린 후 차차 갬



혹자는 등산이 별로 비용도 안 드는 운동으로 알고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동네 뒷산을 한두 시간 산행한다면, 운동화에 아무 차림으로 올라도 되니 돈들게 없다. 

하지만, 네시간 이상되는 산행은 등산화에 배낭, 등산복, 스틱 등 갖춰야 할 등산용품이 많아진다. 

산행을 취미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등산화, 등산복, 배낭은 물론 계절에 맞는 용품까지 장만하자면 몇 백은 쉽게 깨진다. 

오늘같이 오전과 오후의 기온차가 큰 날이면 덧옷 준비는 필수다. 

남덕유산과 같이 1,500m가 넘는 산은 지상보다 8~9도 정도 기온이 낮으니 방한복이나 방풍복을 준비해야 한다. 

제법 눈이 내릴 땐 스틱이라도 잡고 다녀야 미끄러울 때 중심 잡기가 편하고, 하중 부담을 덜어주니 무릎 부담도 줄어든다.


산을 크게 흙산과 바위산으로 구분한다면, 각각의 산에 따른 등산화도 달라진다. 

바위산이라면 릿지 기능이 있는 등산화를 신어야 미끄러짐을 방지할 수 있다. 

설악산이나 월출산 같이 암봉이 많은 산이라고 무작정 릿지 기능이 좋은 5.10 등산화를 신었다간 낭패보기 일쑤다. 

이런 등산화는 서너 시간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지만, 바닥이 얇아 오래 걸으면 발바닥이 뜨겁거나 무릎에 충격이 와 곤란을 겪는다. 

이럴 땐 인솔(안창) 한 장 더 깔고 다니면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암봉이 많은 설악산이나 월출산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산은 가격이나 착용감이 무난하기로는 캠프라인 등산화가 좋다.

내가 제일 많이 가는 산은 북한산이다보니 암봉이 많아 릿지기능은 좋은 캠프라인 중등산화를 즐겨 신는다. 

웬만큼 5.10 정도의 릿지기능이 보장되는 이 캠프라인 블랙스톰델타를 구입한 후 5.10은 꺼내본 지도 참 오래됐다. 

지금 신고 있는 캠프라인은 2012년 연말에 구입했는 데, 바닥이 많이 닳아 모래가 많은 흙길에서 자주 미끄러진다. 

그간 여러 등산화를 바꿔 신었어도 그러니 제법 등산 좀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버리자니 아깝고 새로 구입하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아 지난 설 명절을 지나고 창갈이 A/S를 보낸게 열흘만에 도착했다.

4만원이란 거금이 들었지만, 원본과 동일한 밑창에 토캡과 옆으로 덧댄 고무캡까지 완벽하게 새로 갈았다.

저렴한 비용으로 20만원이 넘는 등산화를 새로 구입한 셈이다. 

오늘 처음으로 창갈이 한 캠프라인을 착용하고 남덕유산을 오른다.


남덕유산 등산코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올 때만 해도 간밤에 내린 비로 안개가 끼고 차창 밖으로 구름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았다.

비 소식에 산이 높으니 높은 곳엔 눈이 있겠다 싶어 아이젠을 지참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황량한 들판엔 눈은 커녕 야산에도 별로 눈은 보이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한참을 달린 후 들머리인 영각사가 가까워지자 들판에 눈이 가득하다.

이곳은 해발 600m 지점이니 마을치고는 꽤 높은 곳이다.

다행히 산행을 시작할 때 즈음 날이 풀리고 서서히 구름이 물러나기 시작한다.

눈이 많아 대부분의 회원들이 아이젠을 착용하지만, 버틸 때가지 버텨보며 산을 오른다.

밑창을 갈았으니 새신과 다름없어 성능을 시험할 겸 스틱으로 균형을 잡으며 오르다 결국 힘만 들어 아이젠을 착용한다.

 

여기까지 오는데 여러 풍경이 있었다. 

계곡물은 졸졸거리며 흐르고, 눈은 산을 덮었다고 하나 바위를 온전히 감추지 못해 눈의 두께를 알 수 있다. 

산 아랜 나무 가지가 다 드러났지만, 능선이 가까워질수록 상고대의 두께가 점점 두꺼워져 탄성이 인다. 

하지만 별로 사진도 찍지 않았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능선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오른 후 드디어 철계단을 타고 오르는 암봉을 만난다. 

밤새 내린 눈이 암봉과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장관이다. 

올겨울 들어 최고의 설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들머리인 영각사에서 능선을 따라 지나온 능선


다른 블로그를 통해 봐왔던 그림같은 풍경이다.

남덕유산을 오르는 여러 코스 중에 영각사에서 오르는 이 코스를 통해야만 저 암봉을 오를 수 있다.

사계절 어느 때든 점 암봉을 오르내리며 바라보는 풍경은 이곳이 아니고는 느낄 수 없다.

많은 날 중에 하필이면 오늘, 이런 명 코스를 선택한 산악회의 운영진에게 감사를 드린다.


바람에 습기와 눈이 암봉과 나뭇가지에 들러붙어 눈꽃인지 상고대인지 모를 지경이다.




바람이 분다지만, 견딜 수 있는 추위다. 장갑을 벗고 스마트폰 사진을 찍어도 별로 손이 시리지 않다.


가야할 방향이다. 

구름이 사라지고 청명하다면 더 바랄게 없다. 

하지만 이런 날씨만해도 얼마나 다행스러우냐.

눈꽃 사이로 길을 내며 걷거나 계단을 오르는 등산객을 볼 수 있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다. 

겨우내 그토록 원했던 설경을 겨울을 다 지나 봄의 문턱에서 운 좋게 만난 설경이다.




때 아닌 설경에 사람들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비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감상하기 바쁘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뼈속까지 시원한 설경이다. 

그야말로 백설이 만건곤하다.






한겨울 눈꽃산행은 덕유산과 소백산을 제일로 친다. 

남덕유산도 덕유산의 한 구간이니 명성이 헛되지 않다.


지난 설명절 때 경주 불국사에서 떨어뜨려 망가진 렌즈를 수리했는데, 오늘 또 말썽이다.

렌즈가 걸려 잘 욺직이도 않고 고정이 안 돼 자주 말썽을 일으킨다. 

편집을 해도 표가 난다.


이 역시 편집을 했지만 촛점이 잡히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표지석만 온전히 찍을 수 없다.


산행 대장이 컨디션 난조로 정상까지 쉬엄쉬엄 걸어 좀 늦게 도착했다.

점심 식사 후 서봉과 삿갓봉까지 다녀갈 생각에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육십령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서봉을 거치지만, 영각사를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했기에 서봉을 들린 후 되돌아 온 다음 삿갓봉을 가야한다. 

왕복구간이 거의 1.5km 정도 된다.  


가야 할 서봉이다. 

좀 전의 남덕유산 암봉 구간이 오늘 산행의 최고 절경이라면, 저 서봉은 남덕유산에서 최고의 조망처다.




저 계단만 오르면 서봉은 바로 코앞이다.


드디어 서봉에 올라섰다. 

저곳이 남덕유산 정상이다. 

능선을 따라 왼쪽으로 가면 삿갓봉을 만나니 저 남덕유산 팔부능선까지 다시 간 다음 왼쪽으로 가는 사면길을 따라 삿갓봉을 가야한다.


육십령에서 서봉으로 올라오는 능선이다.

보통은 이 코스를 많이 이용하지만, 앞서 본 암봉은 포기해야 하니 어느쪽으로 오른다 해도 아쉬움은 남는다.  




육십령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


서봉은 특별한 표지석이 없어 이 안내판이 서봉 정상임을 알린다.

2012년 8월, 새벽 세시 15분에 육십령에서 산행을 시작해 칠연폭포로 하산한 기록이 있다.

그땐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서봉을 지나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없다. 밤 산행이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서봉 한쪽을 차지한 헬기장


이 상고대가 잠시후면 햇빛에 사라지고 말겠다.

아무리 추운 동토라도 햇살에 다 녹아내리는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서슬퍼런 동토의 왕국이니 언제나 햇볕이 들런지...  




서봉을 한번 더 보고 서둘러 하산한다.


저 능선을 따라 왼쪽으로 쭉 가다보면, 언젠가 삿갓봉을 만나겠지.

그리고 고개마루에 있는 삿갓재대피소에서 계곡을 따라 하산할 것이다.

오늘 그 코스를 이용해 몇 명이 갈지 모르지만, 지금 시간과 남은 거리를 보면 나 혼자 단독산행이 될 가능성이 많다.


드디어 삿갓봉으로 가는 능선을 잡아탔다.

월성재에 설치된 안내도를 보니 삿갓봉까지 1시간 10분, 삿갓봉에서 황정마을까지 1시간 36분이니 약 두 시간 50분 거리다.

이때가 2시 10분, 다섯시까지 버스에 타야하니 빠듯하지만, 서두르면 시간내에 도착할 수 있다.

점심을 먹고 대략 13:00부터 산행을 시작해 삿갓재대피소에 도착한 15:35까지 약 두 시간 30분동안 잠시 쉬지도 못했다.


서봉에서 월성재까지 온 거리도 지루하지만, 월성재에서 삿갓재까지 길도 참 지루하다.

덕유산 정상에서 점심을 먹은 후 서봉과 삿갓재를 거쳐 하산할 생각에 일행과 떨어져 속보로 산행을 진행한다.

그러다보니 이후 산행은 오직 내 자신과의 싸움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모든 회원을 기다리게 하니 걸음은 빨라진다.

삿갓처럼 생긴 봉우리만 보면 저 봉우리가 삿갓봉이겠거니 하며 오른면 아니고, 다음 봉오리가 보인다.

이렇게 몇 번을 속으며 지루한 산행을 이어간다.


이젠 정말, 이 봉우리가 삿갓봉이길 기대하며 오른다.


그 봉우리도 아니었다. 산신은 내게 많은 봉우리를 보여주며, 네가 찾는 삿갓봉이 이게 맞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난 그 봉우리가 내가 찾는 봉우리 같다고 했지만, 번번히 아니었다.

몇 번을 속은 끝에 드디어 내가 찾는 삿갓봉은 이 봉우리다. 정상에 산불감시 cctv가 설치된 이 봉우리.  


드디어 만난 삿갓봉이 10년만에 만난 친구인양 기쁘기 한이 없다.

오늘은 더 이상 오를 봉우리가 없다. 여기서부터는 오직 하산길이니 길은 좀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늘 그렇듯 하산길이 더 위험하니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저 능선을 따라 더 간다면 무룡산을 지나 덕유산 향적봉에 이르겠지만, 눈으로만 보고 만다.


드디어 갈림길인 삿갓재대피소다. 대피소 맨 왼쪽에 遊山如讀書라는 편액이 있다.

산에 오르는 것을 글을 읽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심성을 닦는 일, 학문을 하는 일일진데,

오늘 산행은 遊山이 아니라 시간을 다투는 속도전이었으니 뜻을 음미하는 독서가 아니라 활자만 살핀 속독인 셈이다.

다음 산행부터는 속도전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며 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몸속에 축적하는 遊山이 되어야 한다. 


어느새 날씨가 풀려 하산길은 꽤나 질퍽거린다. 등산화에 달라붙은 진흙이 튀어올라 바짓단에 들러붙는다.

진창길이니 길을 걷기도 쉽지 않다. 삿갓재대피소를 얼마 내려서지 않아 벌써 눈은 다 사라진다.

전에 이 길을 내려설 때 길이 무척이나 가팔라 걷기도 쉽지 않았는데, 나무계단이나 돌계단을 만들어 한결 걷기가 편하다.

국립공원은 점점 걷기 쉬운 산으로 변하고 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면 등산이 아니라 산책이 될 날도 있겠다.


쉬지 않고 열심히 서두른 덕에 10여 분 일찍 하산했다.

남덕유산에서 서봉을 거쳐 삿갓봉까지 다녀온 사람은 44명 회원 중에 나만 다녀왔다.

다른 사람들은 서봉을 경유해 대부분 월성재로 하산했거나, 서봉도 생략하고 월성재로 하산했다.

모처럼 나선 남덕유산의 눈 산행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뜻밖의 선물에 올겨울 첫 눈산행이자 마지막 눈 산행이기도 했다.

남덕유란 큰 산의 화려한 암봉군락에 어울리는 설경을 만껏 만끽한 행복한 산행이 되었다.

봄 날씨는 변덕스러우니 어쩌면 한두 번의 행운이 따라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