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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함안 말이산 가야고분군 9월 유네스코 등재 확실

by 즐풍 2023. 6. 17.

2023_97

 

 

2023.5.27. (토) 부처님오신날  해 질 녘에 잠시 탐방

 

 

 

이번 부처님오신날에 경남 함안에서 행사하는 함안낙화축제를 다녀왔다.

아침 여덟 시에 출발해 오후 두 시 무렵에 도착했으니 꼬박 일곱 시간을 도로에 갇혔다.

행사장인 무진정에 도착하니 발 디딜 틈도 없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가 점점 는다.

현장을 정리하는 사람은 몇 명 보이지도 않고 시간이 갈수록 사람은 밀물처럼 밀려든다.

압구정 사고처럼 큰일이 터지겠단 생각에 현장을 빠져나와 함안 말이산 아라가야고분군으로 간다.

 

 

 

함안 무진정으로 가는 대로변 양쪽 2차선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한 지 오래다.

2km 전방에서 차량을 못 들어가게 막는다.

할 수 없이 마을 안쪽에 다른 차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주차하고 2.3km를 걸어서 도착했다.

함안 무진정은 조선전기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한 조삼과 관련한 정자다.

규모가 작아 시골 동네 누정과 정자를 둘러싼 작은 연못에서 하는 낙화놀이가 유명하다고 딸이 간단다.

작년에 한 낙화놀이를 동영상으로 보니 제법 멋지길래

그 먼 거리를 딸이 혼자 운전하는 게 안쓰럽고 위험한 데다 같이 보자는 생각에 목우와 함께 셋이 갔다.

겨우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목 좋은 곳은 빈틈없는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연신 파도처럼 밀려들어 이러다간 이태원처럼 사고가 날 수 있겠단 생각에 빠져나왔다.

낙화놀이는 해가 질 때까지 세 시간을 기다린다고 해도 저런 인파 속에서는 낙화놀이를 볼 수 없다.

 

 

함안 무진정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타로 함안군청 뒤에 있는 말이산 아라가야고분군을 보러 왔다.

즐풍처럼 무진정을 빠져나온 사람들 중 상당한 인원이 이곳으로 왔는지 안내원이 차를 돌린다.

제법 먼 곳에 주차하고 군청 옆길을 들머리로 잡고 오른다. 

 

 

ㅁ 함안 말이산 고분군 (咸安 末伊山 古墳群)  사적 제515호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 고분군으로,

아라가야의 대표적 유적이다.

말이산(末伊山)은 ‘머리+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우두머리의 산’을 의미하는데,

이를 보아 말이산의 어원이 아라가야의 왕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이산은 함안의 가야분지에 위치한 해발 40~70m의 나지막한 구릉이다. 

남북으로 약 2㎞ 정도 길게 뻗은 중심능선과 이로부터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여덟 갈래의 가지능선으로 되어 있다. 

고분군은 구릉의 중심과 가지능선에 열을 지어 서 있으며, 

이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산 위의 산’이라는 경외(敬畏)의 느낌을 받게 한다.
말이산고분군의 면적은 52만㎡로 단일 고분유적으로서는 국내 최대급이다.

말이산 구릉의 주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가지능선의 꼭대기에는 대형의 봉토분이,

경사면에는 중소형의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다.

그중 대형의 봉토분은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중반~6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1~37호분으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정밀지표조사 결과, 이들 봉토분(封土墳)을 포함해서 약 1,000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이산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12호분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창원대학교박물관, 경남연구원 등 여러 기관에 의해 수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말이산고분군은 널무덤(木棺墓)서 대형의 덧널무덤(木槨墓)으로 교체되고,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6세기에는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을

중심구조로 하는 대형 봉분이 밀집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밝혀졌다.

특히 1918년 일제에 의한 약탈적 발굴조사 이후 100년 만에 이루어진 말이산 13호분 발굴조사에서는

가야무덤 최초로 별자리가 새겨진 덮개돌이 확인되어 가야인의 천문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말갑옷을 비롯한 말갖춤새, 꾸미개, 철제 무기류, 토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아라가야의 수준 높은 문화와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말이산고분군은 수준 높은 고대문화를 간직한 채 한반도의 주요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발전했던 아라가야의 대표적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봉토분(封土墳): 시신과 부장품을 묻는 장소를 흙이나 돌로 쌓아 규모를 크게 만든 무덤
* 널무덤(木棺墓):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 널(관)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
* 덧널무덤(木槨墓):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을 설치하여

                         그 안에 관과 부장품을 안치하는 무덤
* 돌덧널무덤(石槨墓): 깬돌이나 판돌을 잇대어 널(관)을 만들어서 쓴 무덤
* 굴식돌방부덤(橫穴式石室墳): 깬돌이나 판돌로 널(관)을 넣는 방을 만들고, 한쪽에는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에 흙을 덮어씌운 무덤                     (안내문)

 

 

 

말이산 4호분

 

말이산 4호분은 아라가야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인 5세기에 축조된 고분이다. 

봉토 규모는 지름 39.4m, 높이 9.7m로 달해 가야고분 전체에서도 최대급이다.
무덤은 돌을 쌓아 만든 구덩식돌덧널(수혈식석곽)의 구조로, 뚜껑돌을 받치기 위한 들보시설이

네 벽면에서 확인되어 아라가야의 전형적인 대형 무덤 형식을 잘 보여준다.

내부에서는 수레바퀴모양토기를 비롯하여 칼집을 철로 만든 큰 칼 등 160여 점의 진귀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순장습속(殉葬習俗)도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고대 아라가야 최고 지배자의 위상을 가능할 수 있다.

4호분은 일제강점기 조선충독부에 의해 졸속 발굴된 4기의 고분 중 유일하게 발굴상황이 알려진 고분이다.

                                                                                                                    (안내문)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군은 두 번째 방문이지만 여전히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다.

 

 

매장 주최부 축조 공정

 

아라가야 고총고분 석곽부의 가장 독특한 축조 기술은 들보시설로 불리는 목가구시설이다.

석곽 길이 7m 이상급의 고총고분에서 주로 확 안 되는 토목 기술로, 양장벽에 각각 2개의 보공과

단벽에 각 1개의 도리 공으로 구성되며, 보공과 도리공의 시설 높이가 달라 장벽의 보공에 걸쳐지는

목재 위로 단벽의 도리공에 걸쳐지는 목재가 지나가는 구조로 복원된다(이주헌 1996;

조수현 2004; 서영민·여창현 2012).

최근 조사된 말 이산 13호분에서 완전한 형태의 목가구시설이 조사되었다.

목가구시설은 상부 봉토압으로부터 개석이 반절되어 석곽부가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는 아라가야

고총고분에서만 보이는 독창적인 토목 기술이다.

아라가야 고총고분의 석곽부에서도 개석 상부에 점토밀봉을 시행하여 매장주체부의 밀폐와 동시에

개석의 유동을 방지하여 상부 봉토압으로부터 잘 견딜 수 있게 조치하였다. 

 

                                                                                                                   (출처_가야인의 기술, 문화재청 제공)

 

 

 

 

 

 

가야는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약 600년 간 존속했던 고대 왕국이다.

가야는 여러 정치세력이 자율성을 유지하며 연맹 또는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세계유산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7개의 가야고분군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가야가 멸망하는 562년까지 축조된 가야 각국의 왕과 지배층 묘역이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금관가야(구야국), 고령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반파국),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안야국), 합천 옥전고분 군은 다라국,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고자국),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비화가야(비사벌),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은

기문국의 왕과 지배자들이 묻힌 묘역이다.

 

가야는 고분군 축조와 장례풍습의 공유를 통해 정체성을 표현하고 집단의 결집을 강화하였다.

가야의 고분 군에는 수백 또는 수천 기의 고분이 군집하고, 다양한 계층의 고분이 포함되어 있다.

고분의 규모와 배치방식, 부장유물에는 매장된 개인의 사회적 신분질서가 반영된다.

고분의 외형은 원형으로 비교적 단순해 보이지만 내부구조는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로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동아시아 기술, 사상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가야의 문화적 특성이 묘제에 반영된

결과이며 사회의 구조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는 가야 사람들은 고분에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토기, 농공구, 무기, 장신구 등

막대한 유물을 부장 하였다.

고분에 부장 된 유물은 가야인의 의식주, 생활풍속과 신앙, 매장관습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다.

또한 고분에서 출토된 교역품은 가야의 대외관계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이다.

중국 대륙에서 전달된 새로운 기술과 문화는 고분의 축조와 부장유물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고,

이는 해양교류를 통해 일본열도로 퍼져나갔다.

가야는 당시 중국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문화권 형성의 중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통적이면서도 차별화된 가야 각국의 고분구조와 부장유물은 가야문명의 특징이며,

가야 각국의 정치, 문화적 특성과 계층적 권력구조는 왕과 지배층 고분군에 가장 대표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출처_Magazine 가야 VOL. 1. 2019 가을호에서 발췌)

 

 

 

위 안내문에 가야는 여러 정치세력이 자율성을 유지하며 연맹 또는 연합체를 형성하였다고 하는 데

다소 과장된 의견인 듯싶다.

차라리 초기 그리스란 나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는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펠로폰네소스 등 대부분의 도시는 연합체를 형성하지 않고

각자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뒤늦게 태어난 로마가 중앙국가로 결속한 후 각자도생의 도시국가인 그리스를 격파하기는 쉬웠다.

이렇게 결속력 없는 도시국가인 그리스를 점령한 후 철학자 등 엘리트 집단을 로마로 데려가 가정교사를 시켰다.

로마는 단숨에 그리스의 높은 문화를 송두리째 받아들였다.

가야도 로마처럼 결속력 있게 중심국가가 있었다면 신라나 백제와 다툴만했을 텐데, 아쉽다.

 

 

 

말이산 8호분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1994년에 발굴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조사 결과 순장자가 6구 확인되는 등 말이산 고분군 중에서도 규모가 매우 큰 고분으로 밝혀졌다.

특히 말 갑옷과 마주, 사람 갑옷과 투구 가 한 세트로 확인되어 가야 중장기병 복원 연구에

중요한 고분으로 판단된다.

 

                                                                        (출처_함안 말이산 8호분 말 갑옷, 문화재청)

 

 

산 아래 보이는 함안박물관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 수혈식석곽에서 순장자의 인골이 확인되어, 순장자의 수와 배치 등이 분명해졌다.

말이산 고분군의 순장은 주피장자의 발치 또는 머리맡에 1~5인의 순장자가 배치되었다.

순장자의 수는 고분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고, 5세기 중기에서 후기의Ⅰ등급에 해당하는 4ㆍ8ㆍ6호분에는

5인이, 6세기 전기의 25ㆍ35호분에는 4인, 2인으로 파악되었다.

이보다 낮은 ⅡㆍⅢ등급 고분에는 4~1인이 순장되었다.

아라가야와 대가야 고분에서 순장이 사라지는 배경을 달리 보기도 한다.

아라가야에서 순장은 자연 소멸되었으나 가야에서 순장이 최고조에 달한 대가야는 신라의 군사 정복으로

소멸된 것으로 파악하였다(김수환 2018).

순장의 정치사회적 의미가 왕권이 미숙한 단계를 나타내거나, 권력자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단계의 산물로

볼 것인가의 논의와 함께 순장 대상자와 시기, 계세繼世관념 변화와의 상관관계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출처_가야 역사문화 연구 총서Ⅰ-연구사- 발췌, 문화재청)

 

 

HM57호 유물 부장 구덩이(부장곽副葬槨)


HM57호 봉분 밖 유물 부장 공간은 무덤에 시신이 없고, 유물만을 부장 하기 위한 공간으로

HMS7호분의 봉분 묘역보다 바깥에 만든 특이한 사례에 해당한다.

평면형태는 직사각형이고 규모는 길이 290cm, 너비 116cm, 깊이 36cm이다.

구덩이 내부에는 네 벽면을 따라 뒤채움 흙(보강토)이 돌려져 있고 바닥은 평평하게 정리되었다.

유물은 바리 모양 그릇받침 3점, 뚜껑이 있는 굽다리 접시 8 set 16점, 항아리류 9점 등

모두 28점이 출토되었다.

뒤채움 흙과 유물의 출토양상으로 볼 때, 나무로 만든 상자에 넣어 부장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 부장 구덩이는 말이산고분군의 다양한 매장풍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구로 그 가치가 높다.

                                                                                                                    (안내문)

 

 

고분은 여인네 젖가슴처럼 풍만하고 부드럽게 보인다.

이곳에 잠든 영혼들도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겠다.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확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권고

경북도는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포함한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확실하다고 11일 밝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심사·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한국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 등재기준을 충족한다고 평가하고,

 가야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할 것을 세계유산위원회에 권고했다.
권고에 따른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올 9월 열리는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9.10.~9.25.)에서 최종 결정한다.

                                                                         영주봉화인터넷뉴스 2023-05-14 16:22:34

 

 

 

 

 

 

 

사방이 모드 잔디밭이니 아이들이 넘어져도 다칠 일이 없다.

아무 데나 돗자리 깔면 그곳이 쉼터가 된다.

 

주변에 자라는 걸 방해하는 나무가 없으니 가지는 사방으로 자유롭게 뻗었다.

혼자 태양의 기운을 흠뻑 받으며 광합성을 하므로 나무의 수형이 좋게 잘 자란다.

 

즐풍은 나무의 기를 받으며 자세를 잡아 본다.

 

 

 

이미 시간이 지나 함안박물관은 문을 닫았다.

 

 

 

 

 

 



말이산 가야고분군    ///즐풍///

천년의 시간을 넘어
가야의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
말이산 가야고분군

높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금동대향로의 불길처럼
빛나는 문화의 흔적
말이산 가야고분군

지금은 적막한 초원 위에
잔디와 들꽃만이 자라고
바람만이 스쳐가는
말이산 가야고분군

그대들의 꿈과 사랑과 슬픔이
아직도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산 가야고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