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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공주 왕릉원과 웅진백제역사관

by 즐풍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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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30. (일)  오후에 탐방

 

 

ㅁ 백제 무령왕릉과 왕릉원

 

백제 왕릉원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에 있는 송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웅진시대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1963년에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에는 부여와 익산의 백제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백제 왕릉원에는 총 7기의 무덤이 정비되어 있으며, 이중에는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인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1,500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완전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는 삼국시대 파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한국 고대의 유일한 왕릉이기도 하다.

무령왕릉은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만든 무덤으로, 연꽃무늬 벽돌을 주로 사용했다.

무덤의 입구에서 방까지 길게 길을 만들고 그 끝에 위치한 방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이 놓였다.

무덤방의 평면은 남북으로 긴 사각형이며 천장은 터널형이다.

무덤에서는 무령왕의 신분을 알 수 있는 묘지석을 비롯하여 금제관식, 귀걸이, 목걸이, 팔찌, 석수, 도자기,

오수전, 유리구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에는 백제문화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백제의 폭넓은 국제교류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무령왕릉 외에도 벽화가 그려진 벽돌무덤인 송산리 6호분을 비롯하여 백제의 대표적인 무덤형식인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인 송산리 1~5호분도 자리하고 있다.

송산리 6호분은 백제에서 발견된 유일한 벽화무덤으로, 네 벽에 사신도 등이 그려져 있다.

송산리 1~5호분은 돌로 만든 굴을 파고 그 안에 무덤방을 만든 무덤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이 무덤들에서도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웅진백제 왕실의 자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1,500년의 시간을 지나 

우리 곁에 있다.

                                                                                                                       (즐풍)

 

 

 

 

무령왕릉과  5호분만 공개되어 관람할 수 있고 나머지 고분은 영구 비공개 결정에 따라 관람이 중지되었다.

 

 

 

이 왕릉원 고분들은 지나가면서 전경만 볼 수 있다.

 

 

웅진백제의 왕릉군

 

사적 제13호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 웅진시기(475~538년) 왕실의 자취가 깃든 곳으로, 

금강의 남쪽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의하면 수십 여 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무령왕릉을 비롯한 7기의 

무덤만이 정비되어 있다.

1~5호분은 백제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던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이다.
벽돌무덤은 백제에서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양식의 무덤으로, 

이는 백제가 중국 남조 양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그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특히 무령왕릉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석수와 도자기를 비롯하여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태국 및 인도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국제적 문화교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공주시청)

 

 

 

 

 

 

 

 

 

 

 

 

숭덕전

 

 

공주 숭덕전은 웅진백제시대 다섯 왕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웅진백제시대란 백제가 도읍지를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이후의 시대로,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이 있었다.

숭덕전은 백제 옛 왕조의 영광을 기리고 백제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17년에 건립되었다.

매년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첫날에는 웅진백제대왕 추모제를 올리며 백제의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선조들의 덕을 기린다.                                                      (즐풍)   

 

웅진백제역사관으로 들어가 본다.

 

 

 

 

 

 

"왕도웅진" 백제의 새로운 중심지
"The Capital Ungjin" New Center of Baekje, “王都熊津” 成为百济之新都城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찾은 곳이 지금의 공주, 당시의 웅진이었다. 

웅진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적들이 들어오기 어려웠고, 

멀리 계룡산의 산줄기도 고구려와 신라를 막아주었다. 

더 남쪽으로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의 넓은 평야가 가까웠고, 곡식을 실은 배가 움직이기도 좋았다. 

게다가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가 중국과 일본까지 오갈 수 있었다.
이렇게 환경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웅진에는 이미 백제 왕실과 친밀한 사이에 있던 

강력한 귀족들이 살고 있었다. 

쫓기듯 한성을 떠나온 백제 왕실이 다시 나라를 일으키기 위하여 선택한 가장 좋은 터전이 바로 웅진이었던 것이다.

                                                                                                                                   (안내문)

 

“문화강국" 백제의 찬란한 문화예술
"A Cultural Powerhouse" The Exquisite and Brilliant Culture of Baekje
“文化强国”百济灿烂的文化艺术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면서 중국과 오가던 항로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521년,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한 것은 

백제가 중국과의 교통로를 회복하고 동아시아에서 중심국가로 부상했던 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 백제는 주로 중국 남조의 여러 나라와 교류했다. 불고, 도쿄와 함께 도자기, 

기와 등의 제작기법도 받아들였다. 

백제는 이러한 새로운 문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신만의 문화를 꽃피웠고, 그것을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백제 문화는 일본 문화의 원류가 되어 그 문화 수준을 끌어올렸다.   (안내문)

 

 

삼국사기 은조왕에 나오는 글로 백제를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된다.

 

공산성에서 바라본 정지산 유적지

 

 

왕릉원은 간단하게 끝낸다.

무령왕릉과 묶어서 포스팅해야 하는 데 내용이 많아 별도로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