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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경주 양동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야

by 즐풍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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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11. (목) 오후에 2시간 탐방, 4.2km 이동

 

 

 

현대사회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나 과거 마을로 들어갈 수는 있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용인 민속마을, 아산 외암마을, 전주 한옥마을 등 많은 과거의 마을이 검색된다.

이미 아산 외암마을, 전주 한옥마을, 제주 성읍마을, 서울 북촌 한옥마을 등을 다녀왔다.

서산 해미읍성이나 순천 낙안읍성도 일종의 한옥마을이고 보면 한옥 탐방 경험은 더 늘어난다.

 

영알 8봉 인증을 끝내고 오전에 경주 마석산 등산을 마친 후 궁금했던 경주 양동마을에 들어선다.

양동마을로 들어서자 산자락에 들어앉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진풍경을 보여준다.

안내원이 체크해 준 대로 주요 포인트만 다녀볼 생각이다.

양동마을을 끝내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옥산서원도 들려야 하니 발걸음을 서두른다.

 

 

 

 

ㅁ 경주 양동마을

 

양동마을은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제(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2010년 7월 31일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협약 선포 40주년 기념 세계 최고의 모범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종가가 500여 년간 전통을 잇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특이하게 손(孫),

이(李)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문화 보존 및 볼거리, 역사적인 내용 등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마을이다.

전국에 6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했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우재 손중돈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 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 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 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출처_양동마을 홈피)



양동마을에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거대한 노거수다.

 

보기 좋게 들어선 기와집은 담장이 경계가 되는 듯 보인다.

 

높은 곳의 기와집은 양반가이고, 낮은 데 집은 하인집이라고 한다.

세상이 바뀌어 이젠 반상의 구분이 없어진 지 오래다.

 

이씨가 마을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회재를 모시는 옥산서원을 짓자,

손씨는 마을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우재를 모시는 동강서원(東江書院)을 세웠다.

이런 경쟁이 마을 안팎 의좋은 터 곳곳에 솜씨 있는 집들로 들어서게 되었다.

양동마을이 뛰어난 입지조건을 갖춘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것은 근대에 저술된

《조선의 풍수, 1931)에도 언급되었다.

이 책은 양동마을을 안동 하회마을, 봉화 닭실마을, 안동 천전리 내앞마을과 함께

‘삼남의 4대 길지’로 손꼽았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손종로 정충비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이 비각은 손종로(1598~ 1636)와 그의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왕명으로 정조 7년(1783)에 세웠다.
인조 때 남포현감을 지낸 손종로는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억부와 같이 전쟁에 나아가

경기도 이천의 쌍령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여 옷가지만으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왼쪽의 정충비각은   손종로를 기리는 것이고, 오른쪽의 충노각은 노비 억부를 기리는 것이다.
비문은 우승지 이정규(1735 ~ 1810)가 짓고 정충필(1725 ~ 1789)이 글씨를 썼다.  (안내문)

 

유서 깊은 마을이라 노거수가 많다.

 

 

ㅁ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이 집은 조선 중종 때 관리로서 청백리였던 우재 손종돈(1463~1529)의 집으로 중종 9년 1514에 지은 집이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사당이 있으며,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조선 중기 남부지방의 주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관가정 편액

 

관가정은 우재 손중돈(1463-1529)이 양동마을 월성 손씨의 입향조이자 아버지인 손소의 본가에서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손중돈은 차남이었으나 맏형 손백돈이 당시 관습에 따라 처가 마을로 장가들어

살게 되어 양동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관가정이 오랫동안 월성 손씨의 대종택 역할을 하였다.

1924년 서백당에 사당을 짓고 대종택이 관가정에서 서백당으로 옮겨진 후에는 손씨 일가의 별당 및

제청으로 사용되었고, 관가정 사당은 손소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影堂)이 되었다.

 

손소는 1476년(성종 7) 이시애의 난 때에 박중선(朴仲善)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정토(征討)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의 호를 받았고, 왕은 손소의 공신 영상(影像)을 내렸다.

이 영정은 임진왜란 전 신하의 영상으로 우리나라에 몇 점 남아있지 않은 것일 뿐 아니라,

조선초기의 공신상을 대표하는 귀중한 유산으로서 우리나라의 공신도상과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관가정은 물봉 남쪽의 분통골 서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랑 마당의 나지막한 담 너머 멀리 형산강과

안강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관가정은 본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었다.

본채는 'ㄴ’ 자형의 안채에 ‘一’ 자형의 사랑채,문간채, 행랑채가 붙어, 납자형 건물 전면 양 옆으로

날개가 붙은 건축 배치형식을 하였다.

전면의 건물 길이는 9칸으로 향단과 함께 양동마을에서 가장 길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은 본채 전면의

사랑채에 연결되어 있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관가정에도 제법 고풍스러운 향나무가 자란다.

향나무는 향이 좋아 산소에도 키우고,

이렇게 집에 키우는 향나무는 향불 피울 때 가지 하나를 정해서 향을 채취해 향불용으로 쓰기도 한다.

 

 

 

 

 

ㄷ자 형태의 건물로 양쪽 살림집을 가운데 마로로 연결한 특이한 구조다.

전통적인 양반가의 대청마루다.

 

정면의 나무로 만든 문은 창고로 쓰여 온돌을 설치하지 않았다.

습기가 차지 않게 바닥을 띄웠다.

 

관가정(觀稼亭)의 누마루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객거암(客居巖)은 ‘손님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관가정의 주인인 손중돈(孫仲暾)이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1960년대 말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실은 이런 나무 바닥이었다.

학교에서 기름을 가져오라고 해 헝겊에 기름을 묻혀 닦고는 했는데,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정리된 마루를 보니 그 시절이 떠오른다.

주인집 사모님이 참 부지런 하신 모양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가 현관인 듯 집으로 들어오는 구조다.

왼쪽은 광이거나 부엌이겠다.

 

 

 

큰살림을 하는 양반가라 곡식이라 여러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다.

 

 

 

손소는 1476년(성종 7) 이시애의 난 때에 박중선(朴仲善)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정토(征討)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의 호를 받았고, 왕은 손소의 공신 영상(影像)을 내렸다.

손소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손가정을 둘러보고 나오니 초가집과 기와집이 보인다.

초가집주인에게 2~3년에 한 번씩 초가지붕을 얹기 귀찮을 테니 기와로 바꾸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니

관련 법률상 현상태의 지붕으로만 있어야 된다고 한다.

그 집은 지붕이 망가진 걸 비가 새지 않게 임시방편으로 천막으로 지붕을 둘렀다.

관에서 올해 집을 새로 지어준다고 하는데, 절차가 복잡해 시간이 많이 걸리나 보다. 

 

하나의 마을에 손 씨와 이 씨, 두 성씨가 5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으며 같이 살아왔다는 것은 극히 드문 현상이다.

양동마을의 손씨와 이 씨는 주어진 지형을 잘 이용하여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집을 지어 전래 문화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하여 왔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조선 왕조가 건국하면서 치국 이념으로 채택한 유교의 종법(宗法) 사상을

전래 토속 신앙과 함께 마을 경영과 생활 모든 곳에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결과 양동마을은 사회, 문화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마을구조를 하고 있다.

양동마을을 찾으면 자연, 지형, 경관, 장소, 공간, 문화, 건축, 사람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며

탁월한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알게 한다.

지난 500여 년간 선조들이 마을을 잘 일구어왔듯이, 앞으로도 그 후손들이 양동마을의 진정한 모습을

잘 지켜 후세에 전해줄 때 양동마을은 더욱 값진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이렇게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집도 제대로 고칠 수 없으니 애로사항이 많다.

 

 

 


양동마을은 풍수의 길지에 입지 했으며,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마을에는 국보 1점, 보물 4점, 국가민속문화재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재 8점 등 도합 25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이 다수 있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ㅁ 향단(香壇) 보물

이 집은 회재 이언적(1491~1553)0|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인 중종 38년(1543)에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임금님이 지어준 집이라고 전한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1494~15530)이 형님 대신 노모를 모시고 살던 집으로

이언팔의 손자인 향단 이의주(1567~163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편의성을 위해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한 몸체로 이루어지고 2개의 마당을 가진 특이한 구조다.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안내문)

 

 

향단은 공사 중이라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다.

 

향단은 임금이 지어준 집이라 제법 근사해 보인다.

 

 

집을 비운 어느 주택

 

예전 양방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상민이나 하인은 아랫마을에 터를 잡았다.

요즘과 전혀 다른 사고 방식이다.

 

산자락에 넓은 타원형의 담장을 두른 기와집이 참 고즈넉스럽다.

사방이 숲과 나무로 둘러싸여 문만 열면 시절에 맞는 계절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심수정인 듯 싶다.

 

 

 

마을의 운치를 더하는 고목나무

 

 

 

 

ㅁ 무첨당(無忝堂)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종가에 16세기 중엽에 지어진 제청으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1661~139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고, 동쪽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가 있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 독서와 휴식, 손님 접대와 문중 회의를 했던 큰 사랑채다.

대청 오른쪽 벽에 걸린 '자해금서'라는 현판은 '영남에서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집권 전

이곳을 방문한 흥선대원군이 죽필로 직접 쓴 것이다.  (안내문)

 

 

 

 

 

 

무첨당은 제청의 기능을 하면서,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종회소의 기능도 가진 건물이다.

이러한 이유로 무첨당 대청은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마루 공간을 확장할 수 있도록

온돌방과 대청 사이에 들어 열개문을 설치하였다.

제청이나 종회소의 기능 외에도 무첨당 건물은 바깥 주인이 노년에 여생을 즐긴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접빈, 휴식 등을 취한 사랑채의 기능도수 행하였다.

사당은 본채와 제청 사이에서 북쪽 언덕으로 난 계단으로 올라가는 곳에 본채 뒤에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독립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사당에는 회재 이언적의 불천위를 모셨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무첨당도 재일 안채에 재실을 두고 있다.

 

‘무첨당 은 제청의 당호이자, 이 집의 이름이다.

‘무첨(無簷’은《시경》 〈소완小宛〉의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서,

너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 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에서 유래한다.

이를 회재의 맏손자인 이의윤이 호로 사용하면서 당호가 되었다.

무첨당 대청 동쪽 방문 위에는 左海琴書 (좌해금서) 현판이 여러 편액과 함께 걸려 있다.

‘좌해는 서울의 왼편에 위치한 ‘영남' 지방을 말한다.

‘금서’는〈귀거래사의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겨 시름을 잊으리라에서 유래하니 선비의 주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좌해금서’는 ‘영남에서 선비가 머물고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조선 말기 권력의 핵심 에있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원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대나무에 먹을 찍어 썼다는 글씨다.

무첨당 동방에는 또한 蒼山世居’(창산세거) 현판이 있다.

창산은 무첨 당의 뒷산인 설창산의 줄인 표현이다.

‘창산세거’는 ‘설창산 자락에 서대대로 살아왔음을 말한다.

무첨당 대청 서쪽 방문 위에는 ‘勿厓書屋’(물애서옥) 현판이 걸려 있다.

물애는 무첨당이 위치한 물봉物峰골과 같은 말이다.

‘물勿’은 공자와 안연과의 대화에 나오는 사물(四勿)에 비견된다.

‘서옥은 서방에 눈목자 [目] 서고(書庫〉가 있었기 때문이다. 

용방 조광이 썼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무첨당은 마당에 높게 단을 쌓고 집을 올렸다.

집은 ㄱ자로 꺾으며 마당과 연결된 곳은 이렇게 누각처럼 보이게 아래는 빈 공간이다.

이 공간에 디딜방아와 절구통을 들이고 펌프를 설치했다.

펌프가 전시용이 아니라면 예전엔 우물이었을 것이다.

우물이 맞다면 비가 와도 물이 튀어 들어가지 않으니 위생적으로 관리되고,

물 긷는 아낙은 비를 맞지 않으니 1석2조의 효과를 갖는다.

 

 

 

몇 년을 두고 먹을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을 담은 항아리가 그득한 장독대

 

담장 너머 옆집 향나무가 눈에 띈다.

 

 

 

아랫마을

 

 

 

 

 

 

 

 

 

 

 

 

ㅁ 송첨 종택(松簷 宗宅)   국가민속문화재


경주 손씨 큰 종가로 마을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8~1484)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 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으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 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관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손소의 아들 손중돈과 외손자인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안내문)

 

 

 

언제 심었는지 역사를 알 수 있는 송첨 종택의 향나무

 

 

ㅁ 양동의 향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동해안을 비롯하여 울릉도와 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상나무 또는 노송나무로도 볼린다. 

그 밖의 지역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인공적으로 심은 것이다. 

향이 강해서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쓰이며 정원수와 공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양동의 향나무는 송첨 종택의 사당 앞에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초기 문관이며 양동의 경주 손씨 입향조인

손소(1488~1484) 선생이 세조 5년 1459에 집을 새로 짓고 그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원줄기가 지상 90cm 높이에서 세 방향으로 가지를 낸 뒤에 그 윗부분이 꾸불꾸불 

위로 자라서 다시 세 가지를 내고 있다. 

수관  폭이 12m에 달할 정도로 수세가 매우 왕성하여 멀리서 보면 분재처럼 꾸민 듯 보인다. (안내문)

 

 

송첨종택의 사랑채에는 ‘서백당(書百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참을 인(忍) 자를 100번 쓰며 인내심을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하나로 이어졌는데,

그 사이에 반담을 쌓았다는 점이 이채롭다.

사랑채 옆 축대에는 양민공이 이 집을 처음 지은 기념으로 심었다는 ‘양동의 향나무’가 서 있다.

보기 드물 정도로 밑동이 굵고 잘 가꿔진 분재처럼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 수형(樹形)도 준수하다.

남다른 위엄과 기품을 갖춘 향나무이다.

 

양동마을에는 조붓한 오솔길과 산길, 정겨운 돌담길과 시원한 대숲길 등이 실핏줄처럼 뻗어 있다.

길에서 만나는 느낌과 풍경이 다채로워서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마을 구석구석을 제대로 돌아보려면 하룻밤 묵는 것이 좋다.

바닥이 뜨겁고 공기는 서늘한 온돌방에서 보내는 하룻밤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추억이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재실로 올라가는 계단도 멋지게 꾸몄다.

 

‘송첨’은 ‘소나무 처마'라는 뜻이고, 양민공 손소의 호인 송재(松齋)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같은 집인데 서백당과 본채를 가르듯 작은 담장을 세운 게 특이하다.

이곳에서 글공부를 한 모양이다.

 

서백당 편액의 의미는 이미 앞에서 살펴봤다.

 

 

서백당을 나와 양동마을을 걷다가 초가지붕을 살펴본다.

몇 번을 덧댄 초가지붕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켜켜이 쌓였다.

한 번 지붕을 올리면 2~3년을 보낸다고 하면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비가 오면 일부는 안으로 스며들어 여름이면 습기가 가득하고 굼벵이가 득실거린다.

때가 되면 지붕을 다 걷어내고 다시 초가지붕을 올려야 하는 데, 일이 많아지니 포기하고 계속 올린다.

어렸을 때 이런 초가집에 살아봐서 안다.

 

 

 

 

 

 

 

 

 

양동마을을 제대로 보려면 이틀 정도 잡아야 한다.

오전에 경주 마석산을 오르고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마지막 미션을 위해 양동마을의 터줏대감인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릴 옥산서원을 탐방해야 한다.

하여 이곳은 안내소에서 찍어 준 몇 군데만 간단히 보고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