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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세계유산인 공주의 백제 공산성 너무 멋져

by 즐풍 2023. 5. 18.

2023_52

 

 

2023.4.30. (일)  오전에 잠시 탐방

 

 

아내인 목우가 이틀 정도 여행을 떠나자고 해 그리 먼 거리가 아닌 공주와 부여로 여행을 떠난다. 

공주와 부여를 여행지로 삼은 건 공주의 공산성과 갑사의 철당간, 부여의 성흥산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즐풍의 최근 관심사 중 하나인 산성과 철당간을 볼 욕심을 숨기고 목적지를 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함께하는 여행은 늘 재미있고 행복하다.

 

먼저 한두 군데 관광지를 들린 후 온 공산성을 보는 순간 너무 멋지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박물관에도 입장료를 안 받는 데 이곳은 입장료 3,000원씩 받는다.

이곳뿐만 아니라 나중에 무령왕릉에 갔을 때도 같은 금액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코로나가 종식되자 공주시의회에서 다시 받기로 했다는 짧은 대답이다.

 

 

 

 

ㅁ 백제의 왕성 웅진성(공산성)

 

공주의 옛 이름은 ‘고마나루’라고 하며,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한다. 

웅진은 백제의 도읍 한성(서울)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되면서 새로운 도읍이 되었다.

웅진도읍기(475~538년) 백제의 왕성은 웅진성이며, 지금의 공산성이다.
사적 제12호로 지정된 공산성은 북쪽에 흐르는 금강과 급경사를 이루는 공산(公山)의 산세를 

활용하여 축조된 천연의 요새이다.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있는데,

동쪽구역의 토성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0년대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백제시대에는 왕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벽, 연못, 나무창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토기, 기와, 중국제 자기, 무기, 목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정관 19년(645)’ 명문이 쓰인

화려한 옻칠갑옷이 출토되어 주목되었다.
공산성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이후에는 5 방성 가운데 북방성이었고, 

무왕 31년(630) 사비의 궁궐을 수리할 때에는 왕이 공산성으로 거 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아울러 660년 7월에는 의자왕이 사비에서 공산성으로 피신해 와 나당연합군과 대치하다 항복한 곳이다.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주의 치소로,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과 중군영이 자리하는 등,

오랫동안 지방의 거점이자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백제 성벽


공산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로 토성으로 알려진 동쪽구간 735m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석성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대부분의 성벽은 조선시대 이후에 고쳐 쌓은 것이다.
백제시대의 공산성은 지형에 따라 토성과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이는 공산성 동쪽 구역과 조선시대 석성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동쪽구간은 전체가 토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조사를 통하여 토성과 석성이 함께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토성은 고운 흙과 모래흙을 번갈아 다져서 쌓는 판축기법을 주로 이용하여 조성하였다.

석성은 골짜기 쪽은 내외벽 모두 돌을 쌓아 만들고, 경사면은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외벽의 돌과 맞물리도록 돌을 보강한 후 흙을 쌓아 축조하였다.

 


백제 왕궁지

 

백제의 왕궁지는 공산성 내 서쪽 정상부의 ‘쌍수정’ 앞 평탄지에 자리했다.

이곳에서는 공주시가지와 백제왕릉군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한눈에 조망된다.

조사를 통해 벽주건물지(도랑을 파 기둥을 촘촘하게 세운 후 점토로 벽을 발라서 만든 건물지)와

굴립주건물지(기둥의 밑동을 땅 속에 박아 세운 건물지)를 비롯하여 연못, 나무창고와 같은

저장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지붕 처마 끝을 장식한 수막새, 청동거울, 금동제 향합, 토지등이 있는데, 

특히 연꽃무늬 수막새의 존재를 통해 품격이 높은 건물이 자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왕궁 관련시설지


공산성 서북쪽으로 금강과 맞닿은 넓은 대지에 자리하며, 왕궁과 다양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골짜기인 지형을 대규모 토목 공사로 평탄하게 만든 후, 남북과 동서방향으로 구획된 도로를 중심으로

축대를 쌓아 계단식의 대지를 만들고, 규칙적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를 통해 약 80여 동의 건물지를 비롯하여 도로, 배수로, 저수시설, 연못, 나무창고 등이 확인되었다.
저수시설에서는 옻칠갑옷과 말갑옷, 장식칼, 큰칼, 중국제 자기, 목기, 쌀, 조개, 밥 등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옻칠갑옷은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두껍게 옻칠을 한 것으로, 붉은색으로 ‘貞觀十九年(정관 십구 년)’

(645년. 의자왕 5년)을 비롯한 명문이 확인되어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공산성에는 위와 같은 백제시대의 유산 외에도 4방의 문터, 암문, 고대 등 방어시설과 쌍수정, 영은사, 연못, 

중군영지, 28칸 건물지 등 통일신라 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많은 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다.

공산성의 이름은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마성,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공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변화되었다.

이처럼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다양한 이름과 문화유산의 존재는 공산성이 오랜 시간 지역 거점으로서

역동적으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출처_공주시 문화관광)

 

 

공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은 공덕비로 가득하다.

정말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는 건지 아니면 공덕과 상관없이 떠날 때 하나씩 세우고 간 건지 궁금하다.

 

출구는 두 개가 보인다.

아래쪽은 우마차 출입을 위해 만든 거 같고, 위 금서루를 통해 들어가는 문이 정식 출입구다.

 

금서루 안쪽에서 다시 보는 출입구

 

진남문으로 들어서며 성벽을 따라 반 시계방향으로 돈다.

 

 

공산성은 백제 웅진기 왕성으로서 사적이며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대표유적이다.

특히 백제 웅진기 국가의 최고지배층의 거소인 왕궁과 지배공간이 존재하는 왕성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백제왕도 핵심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웅진기 백제 왕궁과 왕성에 관한 자료의 제한으로 시각적 기초자료가 매우 희박하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공산성이 웅진기 백제 왕성이라는 국내외의 문헌기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위치와

구조에 대해서는 발굴 조사된 지하의 유구를 제외하면 거의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에 따라 왕궁의 위치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상존하고 있다.

 

특히 현재 공산성은 조선 근대의 유구를 중심으로 그 형상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백제의 모습을 거의 살펴볼 수 없다.

따라서 공산성은 일찍이 백제 왕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이 되었고 이후 세계유산 백제

역사 유적지구에 등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 왕성과 왕궁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상의 구조물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현재 공산성의 곳곳에 표현되어 있는 안내판과 지상유적의 상당 부분은 조선시대 이후의 내용에

기초한 것으로 조선시대 옷을 입고 있는 백제 왕성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이에 공산성의 백제 왕성으로서 성격과 구조에 대한 고증연구를 통하여 문화유산의 고유한 가치가

존중되는 백제 웅진왕도의 역사적 가치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진정성 있는 백제 왕성의 문화경관 회복이라는 주제가 간절하게 요구되는 이유이다.

                                                 (출처_백제왕도핵심유적 정책연구포럼 발표자료집(2021년 1차 포럼)에서 발췌)

 

 

 

 

처음 공산성을 만들 때는 한양에 있던 백제의 도읍이 고구려의 침략으로 공주로 이전하게 되었다.

공주에 공산성을 쌓은 이후 시간이 갈수록 마지막 시기의 성만 남아 있게 되어 백제의 색상은 사라졌다.

공산성에 처음 들어올 때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산성」이란 표지석이 있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에 시작했으나 지금은 조선시대의 유적이 대부분이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백제시대의 유적을 어떻게 고증해 살려내느냐의 문제다.

 

 

공주 시내 모습

 

 

 

 

 

즐풍은 지금까지 많은 산성과 읍성, 도성, 행궁을 다녀왔다.

우리나라 3대 읍성이라는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고창읍성, 서산의 해미읍성은 알아주는 곳이고,

수원의 화성은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완성도가 높은 행궁이자 도성이다.

더 크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 심지어 한양도성도 있지만,

이곳 공산성은 산성과 읍성의 형태를 모두 갖추었다.

또한 어느 성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천혜의 산성이다.

 

 

 

 

 

공산성진남루 (公山城鎭南樓)


공산성의 출입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진남루는 성의 남문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원래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석축성(石築城)으로 고쳐 세운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다. 

진남루도 그때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출처_문화재청)

 

 

'12각 건물'은 하늘에 대한 제사 공간?

 

공산성 안에는 12각으로 지은 둥근 2채의 건물 터가 남겨져 있다.

12각 건물은 어떤 모습일까?

언제 무얼 하려고 만들었을까?

발굴조사로 출토된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 8~9세기경에 사용된 것들인데,

이때는 공산성에 통일신라 정부의 지방관청이 들어오던 때이다.

이런 12각 건물들은 대개 가뭄이 심할 때나, 전염병이 돌거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옛날 사람들은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고 생각했는데, 12각 둥근 건물은 바로 '하늘'을 상징하는 셈이다.

                                                                                                                (안내문)

12각 건물터

 

왼쪽과 우측에 각각 큰 건물터가 둥그러니 놓였다.

고증을 거쳐 언젠가 12각 건물 또는 백제시대의 건물을 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야 백제역사 유적지구가 될 텐데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다.

 

 

공산성 28칸 건물지

 

공산성 28칸 건물지는 1989년 발굴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총 28칸 규모의 건물 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공주에는 9주 가운데 하나인 옹천주가 설치되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관청 건물로 보인다.

기둥을 받친 40개의 주춧돌 중 절반만 남아 있다.

흙을 여러 겹으로 단단하게 다지고 쌓아서 만든 판측 기법을 사용했는데,

백제시대 건물 터를 무너뜨리고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건물을 쌓을 때 35cm 단위의 자를 사용하였다.  (안내문)

 

 

공산성 장대터와 임류각

 

 

공산성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500)에 왕궁의 동쪽에 지은 누각이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건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 발굴 조사 과정에서 고층 누각의 모습으로 확인되어 1993년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

현재의 임류각은 백제 건축 양식인 하앙식(下昻式)*을 재현하여 세웠으며,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활용하였다. 

*하앙식: 지붕처마의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더 설치하여 처마를 길게 만든 구조로 건물의 웅장함이 돋보임

                                                                                                                                         (안내문)

 

하앙식 구조로 처마를 길게 빼내 웅장한 모습이다.

 

 

명국삼장비 (明國三將碑)


공산성 공북루 아래에 자리한 한 채의 비각안에 3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을 

왜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준 명나라 세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원래 선조 32년(1599) 금강변에 처음 세웠다가 홍수로 매몰되어 숙종 때에 다시 세워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왜구(倭寇)’등의 글자가 훼손되었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아무렇게나 매몰되었던 것을 광복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출처_문화재청)

 

비각을 지어 명국삼장비를 보호한 비각

 

 

 

 

 

 

 

영동루 위 성벽에 게양된 깃발

 

일부 구간은 이런 토성으로 되어 있다.

 

멀리서 보는 영동루 앞에는 아주머니 두 분이 쑥을 뜯고 있다.

저녁 밥상엔 쑥버무리나 쑥국, 쑥부침개가 올라올지 모르겠다.

 

 

공산성 광복루 (公山城 光復樓)


공산성 안에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으나 광복 이후 8·15 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라 불렀다.
광복루는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이라 불렀는데, 

1946년에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이 이곳에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모든 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왼쪽에는 오르내릴 수 있도록 층계를 만들어 두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안내문)

 

영동루 주변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성이다.

이곳은 소나무보다 참나무가 많아 이런 봄에 연초록 나뭇잎이 더 싱그러운 느낌을 준다.

 

 

 

공산성 아래로 금강이 폭넓게 지나가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금강 방면으로 군사 서녀 명이면 이곳은 어렵지 않게 지킬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인 셈이다.

 

 

 

공산성은 공산에 세웠기에 공산성이라 이름 지은 걸까?

공산은 급하게 고도를 떨어뜨리며 만하루 쪽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보는 연지와 만하루

 

 

 

공주 공산성 연지 (公州 公山城 蓮池)


공산성 안에 있는 연못 중 하나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석축을 단이 지게 정연하게 쌓아 동서로 최대 길이 21m, 너비 12m 정도로 위를 넓게 하고, 

아래는 최대 길이 9m, 너비 4m로 좁혀 쌓아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서남 방향에는 잘 다듬은 돌 2매씩을 길게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바닥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고, 동·서벽 쪽에는 너비 40㎝의 배수로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쉽게 하였다.

이 연못은 백제 때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연못에 이를 수 있는 암문

(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하여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이 발굴되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만하루에서 다시 보는 연지 

연지로 내려가는 계단은 처음에 두 개였다가 맨 아래쪽에 세 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혹여 화재 등 유사시에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기에 계단을 크게 만들었다. 

 

영은사 

 

 

공주 영은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公州 靈隱寺 木造觀音菩薩坐像)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내의 영은사 원통전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으로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팔각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약간 움츠린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극락조(極樂鳥)가 새겨진 목조 보관을 쓰고 있으며, 

자애로운 얼굴 표정과 이목구비의 표현이 자연스럽다. 

보살상이면서도 불상과 같은 법의(法衣)의 표현과 자세를 취하여 원통전의 주존으로서의 불격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_문화재청)

 

공북루로 넘어가며 다시 보는 연지와 만하루 

 

 

 

 

공북루 (拱北樓)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위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拱北樓)’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출처_문화재청)

 

 

 

 

 

공북루 안쪽은 이렇게 평지로 되어 있다.

군인들이 훈련하는 연무대로 쓰이면서 관리하는 건물 몇 채는 있었을 것이다.

 

 

 

 

 

공북루에서 공산정으로 가는 길가에 노거수가 위세 좋게 자란다.

문화유적지에 이런 노거수는 많을수록 보기 좋다.

 

 

 

공산정 2층 누각 

 

공산정 건물은 자리가 협소해 사진 찍기가 마땅치 않다.

 

공산정에 바라보는 공북루 

 

 

 

 

 

공산정을 지나며 처음 들어온 금서루가 보인다.

짧은 시간이지만 공산성의 역사성은 물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즐겼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기술한 문헌은 고려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유일하다.

삼국사기는 고려의 시각으로 기술했음에도 중국 중심의 시대적 사고가 반영되었다.

삼국유사는 승려가 쓴 것으로 자주성은 인정받으나 역사성은 다소 부족하다.

우리의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의 역사서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많은 전쟁으로 사료들이 소실된 게 안타깝다.

 

 

 

 

 

늘 궁금했던 공산성은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있거나 복원되었다.

세계유산 중 백제의 역사 유적지구인 공산성에서 백제의 것은 찾지 못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지리적 중요성으로 계속 산성이 복원 고정을 거쳐 사실상 조선시대의 것을 본 것이다.

철저한 고증에 따라 백제의 유적이 하나둘 생겨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