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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놀랍도록 정교한 공주 무령왕릉 탐방

by 즐풍 2023. 6. 1.

2023_75A

 

 

 

2023.4.30. (일)  오전에 탐방

 

 

이집트의 피라미드 내부나 진시황릉 내부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고 진시황릉 병마용갱만 발굴되어 전시되고 있다.

제주 정방폭포 위에 있는 서복공원 전시관에 들어가면 진시황 병마용갱에 있는 청동마차를

1/4 크기로 줄인 복제품이 있다.

이 청동마차는 기원전 3세기에 만든 것이라니 놀랍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중국 황실 묘의 내부가 아니더라도 백제나 신라 왕릉도 일부 개방되고 있다.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탐방하며 무령왕릉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왕릉원에 있는 5, 6호분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연꽃무늬 벽돌로 만든 무덤이 1,5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던의 유물 중 묘지석으로 인하여 무덤의 주인이 백제 25대 왕 무령왕임을 알 수 있었다.

 

 

 

 

ㅁ 공주 무령왕릉과 왕동원, 백제고분
The Tomb of King Muryeong and Royal Tombs, Gongju, Baekje Tombs
公州武宁王陵和王陵园, 百濟古墳


고분(古墳)이란 죽은 사람을 땅속에 들기 위해 만든 시설을 즉, 무덤을 의미한다.

무덤의 역사는 인류가 탄생한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처음에는 얕은 구덩이를 만들어

시신을 넣은 뒤 흙을 덮는 단순한 구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덤을 기념물로 여기게 되면서 시대와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무덤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과 죽은 이에 대한 엄격한 의례가 담겨 있어, 

그 시대의 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가치 있는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백제시대의 무덤은 한성-용진-사비로 수도가 변화함에 따라 지역적, 시기적으로 무덤의 특성이 

다양하게 확인된다.
한성시대에는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널무덤(土壙墓), 돌방무덤(石室墳) 등이 사용되었다.

석촌동고분군 • 방이동고분군을 통해서 계단식 돌무지무덤과 돌방무덤 등이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지방에서는 분구묘(墳丘墓), 독무덤(甕棺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등 다양한 무덤이 사용되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조성된 옹진시대에는 한성시대 말기부터 이어진 돌방무덤이 주로 만들어졌고,

백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은 4세기 중 • 후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보편적인 백제의 무덤 양식이다.

경사면에 구덩이를 판 후, 돌을 이용하여 널방과 널길, 입구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기에 따라 널방의 천장 형태,

널길의 규모와 위치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사비시대에도 굴식돌방무덤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이 시기에 큰 판상석을 사용하여 천장을 만든 터널식에서 

고임식 혹은 평천장으로 널방을 만들었다.
백제의 다양한 무덤은 부족한 문헌자료를 보완하여 당시 백제사람들의 문화를 밝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한성시대와 사비시대를 연결하는 백제의 무덤 문화상은 물론 백제사 

전반에 걸친 역사와 문화를 밝혀낼 중요한 열쇠로 현재에도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안내문)

 

전시실에 들어서면 내부는 무령왕릉 내부를 마감한 벽돌 모양으로 인테리어를 했다.

 


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4호분 돌방무덤 조사 현황
The Classification of Stone Chamber Tombs Nos. 1~4 in Tomb of King Muryeong and Royal Tombs, Gongju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4호분은 1927년 조선충독부박물관과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교사

가루베지온에 의해 각각 조사되었다.
공식적인 조선충독부박물관의 조사에서 1~5호분이 조사되었으나 실제 발굴은 1• 5호분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2호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로 기본적인 조사만 이루어졌고, 3 • 4호분에 대해서는 기록물은 남기지 않았다.

이 조사에서는 지금과 달리 고분 서쪽부터 1~5호분으로 명명함으로써 무덤 호수에 대한 혼란이 있다.

고분은 모두 구통의 남쪽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다.

벽돌모양의 깬들로 널방과 널길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으로, 돔 천장을 이루고, 널길은 널방의 남벽 동쪽에 치우쳐 있다.

무덤은 현재 4기가 정비되어 있고, 모두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다.   (안내문)

 

 

No.1호분
조선충독부박물관 조사 시 5호분으로 보고된 무덤으로, 현재 정비된 1~4호분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다. 

조사 전 이미 도굴로 인해 파괴되어 있었다. 

특히 천장과 동벽의 일부가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고 한다. 

널방은 남북이 약간 긴 장방형으로 동서의 너비가 1.77m, 남북길이가 2.58m로 네 벽을 깬돌로 쌓다가 

높이 1m 정도부터 안으로 기울이면서 돔(dome) 천장을 만들었다.

모든 벽면에 회칠을 하였고, 바닥에 강자갈을 두께 10cm 내외로 깔았다.
3호분 출토품과 동일한 금동제과판(金銅製銙板) 1점, 허리띠장식 1점, 용도 미상의 금동제금구 편 일괄, 

관고리 4점, 유리제환옥 26점, 철제칼 1점, 관못 37 점, 철화살촉 20점, 토기 편 1점, 호형토기(6 소물) 1점

등이 조사 보고 되었다.  (안내문)

 

 

이 고분은 5호분 내부다.

무령왕릉보다 훨씬 시기가 앞서거나 왕릉이 아닌 고위직의 무덤일 수 있다.

잘게 자른 돌을 올려쌓으며 천정은 돔 형식으로 마감했다.

왕릉원 5호분은 주인을 알 수 없어 이곳에 부여된 번호로 칭한다.

 

 

 


No.2_2호분
현재 동쪽에서 2번째에 자리한 무덤으로, 가루베지온에 의해 2호분으로 명명되었다. 

조사 전 고분 입구가 붕괴되어 흔적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널방은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규모는 너비 2.7m, 길이 3.33m, 높이 3.12m이다.

벽면은 깬돌을 이용하여 약 1.5m 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다가 안으로 기울여 돔 천장을 만들었다.

벽면 전체에는 백회를 발랐다.

널방 바닥은 강자갈을 깔았으며, 그 아래 다시 0.5m 크기의 판석을 깔았다.
가루베지온이 2호분 출토품으로 보고한 내용에는 백제식 도기 5점, 철제대도 1점, 철제창 파편 1점,

철화살 3점, 목관용 넓은 못 약 70점, 목관용 꺽쇠 약 50점 등이 보고되었으나

현재까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안내문)

 

 

5호분 출입구는 너무 낮아 몸을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No.3_3호분
현재 서쪽에서 2번째 위치한 고분으로 조선충독부박물관에 의해 2호 분으로 분류되었다가 

가루베지온에 의해 다시 3호분으로 재분류되었다. 

3호분은 봉토의 중앙 부분에서 서남 측에 도굴구멍이 있어서 널방 내부가 보일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널방의 규모는 길이 3.27m, 너비 2.75m, 높이 2.6m이다, 

널방의 남벽 동측에는 너비 0.9m 정도의 널길을 설치하였고 내부는 깬들로 완전히 폐쇄하였다.
동제허리장식 편 1점, 귀면(鬼面)이 타출(打出) 된 금동제과대판 2점, 동제과대 끝 금제장식 1점,

철지금동장식행업 편 1점, 관고리 1점, 철정 1점, 철화 살촉 8점, 철꺽쇠 64점, 관못 84점, 대도 편(大刀 片)

1점 등이 보고되었다.  (안내문)

 


No.4_4호분
1~4호분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무덤으로, 널길 앞에 문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충독부 박물관 조사 당시 1호분으로 명명하였으나, 가루베지온에 의해 4호분으로 변경되었다. 

무덤은 도굴되어 훼손된 것을 1927년에 수습 정리하였다. 

남북방향으로 자리한 널방의 규모는 길이 3.45m, 너비 3.05m 정도로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보인다. 

돔 형태의 천장은 지름 약 50cm의 원형 만입부(灣入部)를 남겨 1매의 석재를 덮어 마무리하였다.

바닥은 자갈을 깔았고, 관대는 마련하지 않았다.

천장을 제외한 무덤 내벽과 바닥, 널길 벽면에 회를 칠했다.
은제투조과대 2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금동제 영락부원형장식(金銅製瓔珞附圓形裝飾) 16점,

병두금구(炳頭金具) 1점, 금제금구 2점, 은제금구 1점, 철모 1점, 철화살촉 31점, 관못 112점, 철꺽쇠 17점,

칠기편, 목재편 등이 보고되었다.   (안내문)


무령왕릉 내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벽돌무덤은 중국 한(漢) 나라 때부터 위진남북조에 이르는 시기까지 주로 사용하던 무덤으로,

6호분과 무령왕릉이 조성될 당시에는 남조 양(梁) 나라의 지배층이 사용하던 무덤 양식이다.
웅진시대 벽돌무덤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던 

백제 사회의 국제성, 개방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호분은 널방을 축조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바닥은 벽돌을 이중으로 쌓아 갈 자리 모양(ㅅ)으로 만들었다. 

남북이 긴 직사각형 평면으로, 규모는 너비 2.4m, 길이 3.7m, 높이 3.13m이다. 

널길은 남벽의 중앙에 조성하였는데 길이는 2.3m이다.
네 벽은 오수전 모양의 벽돌을 가로와 세로로 쌓아 올렸는데, 가로 쌓기는 위로 갈수록 2단을 줄여 쌓았다. 

남북의 양벽은  수직에 가깝고 동서의 양벽은 안으로 기울여 쌓아 올려 터널형 천장을 이룬다. 

널방과 널길의 벽돌은 그 쓰임새에 따라 크기나 모양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등잔을 놓았던 등감이 동서 양벽에 각 3개, 북벽에 1개가 있고, 그 위에 가창(假窓)이 설치되었다.
6호분은 네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도굴 등으로 인해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널길을 막는데 쓰인 벽돌에서 '양선이위사의(梁宣以爲師矣)' 명문이 확인되는데,

해석차는 있으나 벽돌 제작에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무령왕릉은 구운 벽돌을 사용해 크기나 두께가 일정하다.

아치형 천장도 완벽해 현대의 기술로 시공한 것으로 보일 만큼 정교한 마감이 인상적이다.



“문화강국. 백제의 찬란한 문화예술"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면서 중국과 오가던 항로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521년,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한 것은 백제가 

중국과의 교통로를 회복하고 동아시아에서 중심국가로 부상했던 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 백제는 주로 중국 남조의 여러 나라와 교류했다.

불교, 도교와 함께 도자기, 기와 등의 제작기법도 받아들였다.

백제는 이러한 새로운 문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신만의 문화를 꽃피웠고, 그것을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백제 문화는 일본 문화의 원류가 되어 그 문화 수준을 끌어올렸다.

 


정교하게 설계된 무령왕릉 The Exquisite Tomb of King Muryeong


무령왕릉은 묘실 전체를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으로 널방은 남북 4.2m, 동서 2.72m, 높이 3.1m의 남북으로 

긴 장방형 평면으로 남북의 짧은 벽은 수직으로 동서의 간벽은 상단에서 점차 오므려 쌓아 터널형의 천정을 

구성하고 남쪽 중앙인 널길이 조성되어 凸 자형 단실 구조를 갖고 있다.
널방 바닥은 후면에 한단 높게 관대를 설치한 형태로, 관대 앞쪽은 21cm 낮게 하였다. 

바닥의 벽들은 삿자리 모양으로 깔았다.
널길은 길이 2.83m, 너비 1.04m, 높이 1.45m로 천장은 널방과 같이 반원형 아치를 이루고 있으며

연도 바닥 밑으로 배수구가 설치되어 널문 밖까지 17m 이상 연장되고 있다.
왕릉의 벽체는 연화무늬 벽돌을 4단은 뉘어쌓고(길이모쌓기), 그 위에 1단은 세워쌓는 방식(四平一竪)으로

축조하였는데 상단부의 좁은 면적이나 곡선이 표현하는 부분은 벽돌형태 및 쌓은 방법을 달리하였다.

천정의 경우 사다리끌 벽돌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맞물리도록 쌓아 아치형 천정을 구축하였다.

벽돌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고 무덤 밖에서 누르는 흙더미의 압력을 천장이 버틸 수 있도록 벽돌의 모양을

달리하여 아치형의 천장을 만든 것은 과학적 축조의 묘미를 보여준다.
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한 불꽃무늬 장식의 등감 5개와 그 아래에 가창(假窓)이 시설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의 전통적 무덤 형식이 아닌 중국 남조의 무덤 양식인 선진문화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널길과 널방에 부장 되어 있던 4,600여 점의 다양한 유물들은 백제인의 정신과 수준 높은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동아시아 및 삼국관계에서의 백제의 위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안내문)

 

 

무령왕릉은 5호분 고분보다 출입구가 크고 높아 출입하는 데 불편은 크게 없다.

 

 

구운 벽돌은 틀에 넣고 압력을 가해 만든 것으로 두께가 일정하다.

가로와 세로 쌓기가 연속돼 모양이 한결 예쁘게 보인다.

하단 밑에 꽃봉오리처럼 생긴 공간은 등잔불을 켜 두는 공간이다.

 

당시 중국과 교류하며 중국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이르 우령왕릉에 도입하며 기술이 한층 올라갔다.

 

무령왕릉을 보고 나와 잠깐 비디오 화면을 본다.

 

 

 

공주 무령왕릉(武寧王陵)  사적 제13호.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사면에 위치한 백제 25대 무령왕 25 부부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1971년 7월 5일에 발견되었고 내부 발굴조사는 3일 뒤인 7월 8일 에이루어 졌다. 

무덤 입구의 폐쇄 전을 제거하고 내부로 들어가던 중 연도에 놓인 지석(誌石)을 발견하였고 

지석에 기록된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란 명문에 의해 이 무덤이 무령왕릉임을 알게 되었다.
무령왕이 세상을 뜬 것은 523년 7월 7일이고 무덤에 매장된 것은 525년 8월 12일이다. 

이 기간을 빈(殯)이라 한다.

왕비는 526년에 눈을 감았고 이후 도성의 서쪽에서 빈을 치른 다음 529년 2월 12일에 무덤에 합장되었다.

백제 25대 무령왕은(斯麻, 斯摩) 혹은 융(隆)으로 불렸고, 사후 무령(武寧)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501년 11월 선왕인 동성왕이 사냥터에서 백가(苩加)가 보낸(苦加) 자객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고 

그 해 12월에 사망하게 되자 4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고 62세에 사망했다. 

즉위 후 먼저 백가세력을 처단하여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민생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옛 땅을 회복하였다.

무령왕릉의 봉분은 지름 20m 내외이며, 높이는 7.7m로 축조 당시에도 그리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매장 주체부는 장방형의 현실에 연도를 갖춘 구운 벽돌로 쌓은 묘이다.

현실은 남북 420cm, 420cm, 동서 272cm, 높이 314cm이다.

네 벽가운데 남북벽은 비교적 반듯하게 쌓아 올렸고, 동·서벽은 차츰 안으로 기울여 쌓아 터널처럼 만들었다.

벽돌은 1줄은 세워서 쌓고 그 위의 다른 1줄은 벽돌 4장씩을 뉘어서 쌓음으로써 견고함을 더하였다..

현실의 세 벽에는 모두 5개의 감실이 마련되었다.

북쪽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배치된 이 감실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등잔이 하나씩 놓여있었고

타다 남은 심지가 발견되었다.  

‘士王辰年作’의 명문이 있는 벽돌 편이 발견되었는데, 임진년이란 왕의 사망 11년 전인 512년에 해당한다. 

이 같은 구운 벽돌로 만든 묘는 원래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벽돌의 번조와 무덤의 축조에 중국 기술자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접한 송산리 6호분에서 ‘染官瓦爲師矣’ 명 연화문전이 출토되어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중국 양나라 관영 공방의 기술자가 벽돌의 제작과 전축분의 축조에 관여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령왕릉은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에서 108종  4,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연도의 입구에서는 제사의례에 사용된 청동제 그릇과 수저,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가 출토되었고

연도 중앙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과 진묘수인 석수가 있었다.
현실 내부에는 일본열도에서 원목을 들여와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왕과 왕비의 금송(金松) 제 목관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왕의 목관은 동쪽에, 왕비의 목관은 서쪽에 놓여있었다.

왕의 두침과 족좌, 장신구는 목관 내에, 금속용기와 중국도자기는 목관 밖에 부장 된 것 같다.

 

유물들은 대부분 왕과 왕비의 격에 맞게 최고급 도안과 기법으로 구사되어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령왕릉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석(誌石)이다.

 지석이 출토되었기에 왕릉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지석은 가로 41.4cm, 두께 5cm의 돌판으로, 앞뒷면에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백제의 사마왕이 523년 5월에 사망하니 27개월 후 왕릉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무령왕릉은 지석(誌石)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공을 분명히 알 수 있는 특별한 경우다.
내부에서 다수의 고급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유물의 제작 및 매납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으므로 5~6세기 

동아시아 고고학 자료의 편년에 기준점이 되고 있다. 

아울러 지석에는 무령왕의 출생, 백제왕의 계보, 빈장 등 기왕의 사서를 통한, 백제왕의 계보, 연구에서 

논란이 되거나 미지의 상태였던 수많은 정보가 담겨있으므로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사와 백제고고학 

연구가 진일보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고분군 편집)

 

 

진묘수인 석수

 

널길 가운데에서 밖을 향하여 버티고 서 있던 응회암凝灰岩으로 만든 석수石獸는 입이 뭉뚝하고 코가 크며

눈과 귀는 넓은 콧잔등의 뒤쪽 좌우에 표현되었다.

등의 네 곳에 크게 도드라진 부분이 있는데 머리에 가까운 쪽의 도드라진 부분에는 철제鐵製의 나뭇가지형

뿔이 팬 홈에 꽂혀 있었다.

몸체 좌우 네 다리와 이어진 부분에 날개 모양의 도안이 도드라지게 새겨졌다.

다리가 짧고 발톱의 표현도 명확하지 않은 편이며, 오른쪽 뒷다리는 발견 당시 이미 잘린 상태였다.

                                                                                 (출처_무령왕릉과 동아세아문화)

 

무령왕 금제 관꾸미개

 

무령왕 금귀걸이

 

무령왕비의 관꾸미개

 

 

 

금팔찌

 

사후 세계로 보낼 때 쓴 무령왕 베개는 금으로 벌집 모양을 만들고 모서리를 꽃으로 장식했다.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무령왕릉을 한 번 더 본다.

 

 

 

이런 아치형 구조를 쌓는 건 매우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모르타르나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 양나라의 기술자와 함께 건축했다고 한다.

천정의 아치형 곡면은 먼저 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벽돌로 쌓았을 것이다.

벽면과 마찬가지로 가로와 세로로 번갈아 쌓음으로써 외력에 대항하는 힘을 증가시켰다.

 

벽면도 가로와 세로 쌓기를 중첩했다.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의 양 나라와 문화 교류를 하며 정밀한 왕릉 축조에 이바지했다.

이런 아치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로마시대로 빠르게 세계로 전파되었다.

다행히 도굴되지 않아 약4,600 점에 이르는 유물의 발견으로 백제 역사는 물론 동아시아 역사의 편년의 기준이

되었다고 하니 자랑스러운 발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