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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세계문화유산인 부여 나성 살펴보기

by 즐풍 2023. 6. 28.

2023_105

 

 

2023.6.19. (월)  오전에 한 시간 탐방

 

 

부여 나성을 찾기 위해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왔으나 안내판과 안내지도만 있을 뿐 찾을 수 없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도 찾을 길이 없어 마을 주민집까지 찾아들어가 위치를 물었다.

아주머니는 큰길에 나가면 왕릉원 인근에 나성 복원하는 데가 보일 거라고 한다.

큰길로 접어드니 멀찌감치 도로 안팎으로 나성이 만리장성처럼 길게 보인다.

성벽 가까운 곳에 주차하고 드디어 어렵게 찾은 부여 나성을 탐방하기 시작한다.

 

내비 주소:  부여 능산리사지 또는 부여왕릉원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음

주차장: 부여숭목전 주차장에서 400m, 부여 가탑사 주차장에서 200m 거리

 

 

아래 부여 나성 배치도를 보면 상단 금강을 해자로 둔 부소산성이 보인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나성이 보인다.

청색 장방형 네모칸이 현재 복원된 나성으로 산에 복원된 상단만 탐방했고,

도로 아래쪽에 복원된 곳은 들판이라 탐방하지 않았다.

안내문에서도 볼 수 있듯 부소산성 동쪽산을 연결하여 6km를 외곽으로 길게 나성으로 둘렀다.

서쪽은 금강이 지나가므로 방어 기능을 하는 해자인 셈이다.

나성을 외곽으로 둘렀다는 건 그만큼 부소산성의 전략적 가치가 높다는 걸 방증한다.

 

 

 

ㅁ 부여 나성(扶餘 羅城)  사적 제58호

나성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중요한 외곽 방어시설이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기 위해 538년을 전후하여 쌓았다.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출현한 외곽성의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이며, 한반도에서는 최초로 축조된 외곽성이다.
나성의 총길이는 6km를 넘는다.

전체적인 구조는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북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여 시가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으며, 도시의 남쪽과 서쪽으로 백마강이 자연적인 방어벽을 이루고 있다.  (안내문)

 

내비가 알려준 나성으로 갔을 때 산 아래 있는 들판 

 

도로변 공터에 주차하고 드디어 부여 나성과 만나는 순간이다.

도로변에서 시작해 복원되지만 예전엔 도로가 없었을 테니 나성은 작은 개천을 지나 건너편 산까지

그대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석성이 쌓인 이곳은 사실 성밖이다.

부소산성은 이 성벽 너머 멀리 북서쪽에 있으니 이 부여 나성은 부소산성의 외곽성이다.

 

멀리 보이는 성벽 뒤는 작은 성의 구릉이고 안쪽은 계곡으로 다소 낮은 곳이다.

그러니 즐풍이 서 있는 곳이 성밖인 셈이다.

 

부여 나성과 부여 왕릉원 사이의 부여능산리사지가 있다.

이 절터는 나중에 보겠지만 규모가 제법 크다.

 

 

 

부여 나성이 복원됐다고 하지만 고증을 거친 것이다.

가슴 높이의 석성을 맨손으로 올라가기엔 어림도 없다.

마땅히 손을 댈 데가 없다.

 

산이라기엔 너무 낮은 구릉 정도의 나지막한 산이다.

아래쪽 흙을 파 성벽을 만들며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했다.

장비도 변변치 않던 시절에 땅을 파 이렇게 높고 견고한 성을 쌓았다는 게 대단한 공사다.

 

 

 

 

 

 

ㅁ 부여 나성 (扶餘 羅城)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의 성이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여시가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에 있는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의 하나이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하여 금강변까지 흙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안쪽 벽은 완만하여, 

성위에서 말을 달릴 만한 길이 있고 곳곳에 초소가 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안에는 백제의 왕궁을 비롯하여 관청·민가·절·상가 및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남쪽과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또 물길도 파놓아서 자연적인 2중 구조를 이루고 있다. 

부여 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수도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안내문)

 

 

 

반월성은.... 옛 백제의 도성이다. 부소산을 안고 쌓았는데 양 머리는 백마강에 닿아있다. 

그 형상이 반월과 같기에 이름을 그리하였다. 지금의 관아가 그 안에 있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펴낸 지리서, <신 증동국여지승람>이 묘사한 부여의 모습이다.

500여 년 전의 묘사인데도 반월처럼 보이는 현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반월성은 백제 도성이 반달과 같은 형상이었다 하여 조선시대부터 부르던 이름으로 

원래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부여 나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일제강점기 즈음이다.
특별히 옛날부터 내려온 이름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의 도시 외곽을 감싸던 성곽을 나성이라는 

일반 명사로 부른 것에서 문화재 명칭을 따온 것 같다.

                                                                                                (출처_「공감 백제」에서 발췌)

 

능산리사지 터

 

 

 

 

많은 사료들로 추측해 보면 백제의 나성은 고구려의 평양성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의 수도 전체를 둘러싸는 방어성인 도성의 사례로는 중국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의 외성

(501년 축조)과 함께 가장 이른 사례인 셈이다.

이처럼 수도와 그 밖을 구분하면서도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나성은 6세기 동아시아 도시 건축의 특징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심사위원들은 동아시아 문화의 특징인 도시 성벽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그 모습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부여 나성에 큰 점수를 주었다.

                                                                                                    (출처_「공감 백제」에서 발췌)

 

 

ㅁ 부여 나성(技餘 羅城)  사적 제58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석목리, 능산리, 가탑리, 염창리 일원에 걸쳐 분포한다.

나성은 사비도성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사비도성 함락 당시의 사정을 전하고 있는『구당서(舊唐書)』소정방전(蘇定方傳)에는 나성이 사비도성의 

외곽(外部)으로 인식되고 있음이 잘 나타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부여현(扶餘懸)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반월성은 석축으로 길이는 13,006척(6,086m)인데 곧 옛 백제의 도성이다.

부소산을 안고 축조되어 그 양끝은 백마강에 이른다. 형상이 반월과 같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그 후 1915년 부여를 방문한 세키노타다시의 관찰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성은 서에서 남에 걸쳐 만류하는 금강을 자연참호로 하고, 남에서 동에 대해서는 기복이 있는 산을 

천혜의 장벽으로 하였는데, 산봉우리를 이어서 토축의 성벽을 쌓아 금강의 흐름과 서로 응하게 하였다.

이 성벽은 원의 한쪽과 같이 반월상을 하고 있기에 이를 반월성이라 하였다.

원래 조선식의 성은 모두 산성으로서, 시가지까지 성벽으로 두르는 것은 없었다.

이처럼 성벽으로서 시가까지 둘러싼 것은 중국의 성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조선식의 산성과 중국의

시가지 포위식과 절충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산하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한 요해(要害)로 만드는 진보한 성제(城制)를 만들어 낸 것은 조선에서는

여기 반월성이 처음으로서, 그 후 고구려의 장안성(지금의 평양)도 이것과 유사한 성곽을 만들었다.

금강은 지금도 하천 폭이 넓어 걸어 건너기가 불가능하나 옛날은 더욱이 넓고 한층 깊었음에 틀림없다.”


부여 나성의 평면구조 및 규모는 부소산성-청산성구간의 북나성 청산성-석목리-염창리에 이르는 구간의

동나성 5.4km 등 총 6.3km로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기록과도 일치된다.

완성된 성벽의 높이는 석축 외벽면을 기준으로 할 때 지상 약 3~4m가량이며, 경사도는 70~75°를 유지한다.
나성의 축조 시점은 사비도성 전반의 조성 시기와 맞물려있다.

『삼국사기(드國史記)』 백제본기 동성왕 12년(490), 23년(501) 등에 보이는 사비 지역 전렵(田獵) 기사

및 사비도성 방어의 요충에 해당하는 가림성(加林城) 축조 사실로 보아 538년 천도 이전 웅진기에 이미

신수도 조성이 진행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편집)

 

 

 

 

 

 

 

 

성벽 두 군데에 철판으로 덧댄 곳은 석성이 배부름 현상이 나타나 붕괴되지 않도록 보강처리를 한 것이다.

 

동나성 2 문지

 

동나성 2 문지는 출입문 양쪽의 성벽을 일부러 엇갈리게 쌓아 성 바깥쪽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한 

어긋문 형식을 하고 있다. 

이곳은 도성의 배후산성인 청마산성으로 가는 최단거리 길목이기도 하다. (안내문)

 

나중에 하산할 때 동나성 2 문지로 들어가 왼쪽성벽을 타고 내려간다.

 

치(雉)

 

백제 당시 건설된 이곳의 치는 북나성이나 부소산성의 치보다 큰 대형에 속하며,

현존하는 삼국시대 치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치는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찰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을 말한다.

기저부의 기단 보강시설의 형태나 규모로 보아 원래 소규모의 치를 현재와 같이 크게 증축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왼쪽에 두른 천막 우측 성벽 돌에 청테이프를 붙인 걸 볼 수 있다.

이미 다른 성을 복원할 때도 봤지만 석성을 쌓을 때 돌을 재단하며 쌓을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이곳은 2016 부여 나성(농사구간) 4 차 발굴조사를 끝내고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제부터는 성벽으로 올라가며 나성을 관찰한다.

성벽 밖은 석성으로 쌓아 오르기 힘들고, 안쪽은 산과 연결되어 방어와 공격하기 좋은 구조다.

 

사진을 당겨보면 부여 나성은 도로를 지나 계속 연결된 형태로 남아 있다.

 

 

 

 

 

 

 

 

 

성벽 위는 맨땅이라 말이 어떤 장애도 없이 달릴 수 있는 구조다.

이런 곳은 차량이나 마차가 달릴 수 없으니 말이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다.

 

 

 

 

 

흐트러진 망초꽃은 아무렇지도 않은 데 이렇게 많은 망초가 핀 걸 보면 제법 운치가 있다.

 

부여 나성을 내려와 능산리사지로 내려섰다.

 

 

 

 

 

아트 뮤지엄을 들어거려고 하니 왕릉원에서 매표를 해야 하므로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생략한다.

 

 

 

능산리에 있는 사찰 이름을 몰라 지명을 따 능산리사지라고 한다.

이 사찰을 추정한 그림이다.

 

 

 

 

 

 

 

 

ㅁ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

 

부여능산리사지는 부여나성과 부여능산리고분군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유적으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3년 이 절터 내의 공방(工房)으로 생각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 수준과 예술 역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공양자 및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창건 연대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건축공학, 고고학, 미술사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출처_문화재청)            

 

 

ㅁ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 金銅大香爐)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 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 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아래의 몸체는 하나하나의 연잎의 표면마다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며 

세부의 동물과 인물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백제시대의 창의성과 뛰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당시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 공예기술 및

미술 문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백제 금속공예 최고의 걸작품이다.

                                                                                                         (출처_문화재청)

 

문화재청 사진

1993년 12월 어느 날 저녁 9시 뉴스를 보다가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됐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문외한이 봐도 놀랄 만큼 아름다운 예술성을 가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매년 새로운 논문이 발표될 만큼 꾸준히 연구되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능산리 절터로 들어가기 위한 석교와 목교

 

 

 

 

어렵게 찾은 부여 나성은 부소산성의 외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쌓은 외성이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외성인 데다 원형이 거의 보존되어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번에 못 본 나머지 절반은 다음 기회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