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고창 고인돌박물관과 고인돌유적지

by 즐풍 2023. 8. 10.

2023_123

 

 

 

2023. 8. 2. (수)  오전에 탐방

 

 

고창읍성과 신재효 고택, 고창 판소리박물관에 이어 도착한 곳은 고창 고인돌박물관이다.

외지인이라 입장료 3,000원씩 지불하니 고창읍성과 마찬가지로 고창사랑상품권으로 전액 돌려준다. 

말이 입장권이지 상품권으로 돌려받으니 사실 공짜와 다름없다.

안내데스크에서는 타 지역 주민들에 한해 고창고인돌박물관 앱을 깔면 우산을 하나씩 준다고 한다.

하여 나올 때 두 사람에 해당하는 접는 우산 두 개를 받았으니 남는 장사다.

 

고인돌 유적지를 방문하기 전에 고창 고인돌박물관을 입장해야 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고인돌은 그저 지나가는 정도로 간단하게 배우므로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고인돌박물관에서 사전 지식을 알고 고인돌 유적지에서 고인돌을 마주하게 되면 보는 눈이 달라진다.

즐풍은 벌써 고창 고인돌 유적지 방문이 세 번째이니 어느 정도 기본지식은 탑재돼 있다.

그런데도 고인돌은 처음인 목우와 함께 박물관에 들려 다시 한번 유물을 둘러보고 안내문을 읽는다.

 

 

 

채석한 바위를 이동시켜 고인들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부족민이 힘을 합해야 한다.

 

 

고인돌의 이해

 

고인돌은 한국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300년)를 대표하는 거석기념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지역과 일본 규슈 지역에 분포한다. 

한국과 일본에서 지석묘, 중국에서는 석봉,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그 대부분 무덤이면서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이자 신전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큰 돌을 옮겨서 꾸미는데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사실로 보아 고인들에 묻힌 사람은 지도자 혹은 지배자로 

숭배받는 인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국가성립 이전에 계층사회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라 할 수 있다.
고인돌은 유럽 서북부, 인도, 동남아시아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도 존재하는데, 가장 많은 숫자가 

다양한 형식으로 확인되는 곳은 한반도 중에서도 전북 지역을 포함한 호남 지역이다. 

그중 고창 고인돌유적은 2000년 12월 화순•강화와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안내문)

 

간돌 모음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달리 바닥이 대부분 평평하고 표면에 무늬가 거의 없는 민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에 유행한다. 

호서•호남 지역의 송국리형 주거지 문화권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밖으로 향해 아가리가 벌어진 

항아리 모양 토기가 널리 제작 사용되었다.
실생활에 조리 저장, 식기용으로 사용된 그릇은 모래 혹은 돌가루를 섞은 거친 진흙으로 빚어

야외 가마에서 구워내 적갈색을 된다.
토기를 만들 때 표면을 다듬은 방법이 남아 있기도 하는데, 

가죽이나 천으로 표면을 고르게 정비한 물손질 기법이 널리 사용되었다.
무덤에 부장 되는 토기는 실생활용과 달리 작은 단지 모양에 산화철 등의 칠을 하고 

그 겉면을 잘 문질러 만든 붉은 간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안내문)

 

 

고인돌의 장례의식

 

고인돌은 지상에 큰 돌을 세운 무덤을 만들어 죽은 자를 추모하고 마을 공동체 구성원의 결속을 도모하는 

거석기념물이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큰 돌을 채석 가공하고 운반 조립하는 과정에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므로 협업 활동을 기리는 의식이 함께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에 묻힌 주인공은 이들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많은 숫자의 고인들은 크지 않으며, 

큰고인돌 중에서 유물이 부장 되지 않는 사례가 많아 모두 지배자라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대부분 시신을 그대로 묻는 1차 장이지만, 매장해서 추린 뼈를 다시 묻는 2차 장의 사례도 있다.
유물이 부장 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간혹 간돌검과 돌화살촉, 붉은간토기를 비롯해서 비파형 동검 등의 

청동기와 옥제품을 묻힌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표현하기 위하여 부장 하기도 한다.
고인돌은 대체로 주거구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군을 이루며 조성되는데, 

죽은 조상이 지켜준다는 조상신 숭배 관행을 보여주고 집단의 활동 영역을 표시하는 상징물로 기능한다.

                                                                                                       (안내문)

 

 

초기철기시대 부장유물

 

기원전 300년~100년경 초기철기시대 지배자의 주된 무덤 형태는 돌무덤 혹은 나무널 무덤이다. 

부장유물은 대부분 청동기로 무기, 공구, 의기, 장엄구 등 다양하며, 

철기로는 공구용 주조 철기가 드물게 확인된다. 

부장 된 토기는 고인돌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점토대 구연 토기와 흑색 마연 토기가 있다.
부장 되는 청동기는 폭이 좁은 세형동검을 비롯하여 청동 투겁창과 꺽창, 

의기로는 기하학무늬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팔주령, 간두령, 쌍두령 등 청동방울이 있으며 

장엄용으로 방패형 동기와  검손잡이, 나팔 모양의 청동기가 전한다. 

이를 통해 지배자의 등장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세계의 거석문화

 

거석문화란 자연석 혹은 가공한 들로 구조물을 축조하고, 이를 승배의 대상이나 무덤으로 이용한 문화를 말한다.

고인들로 대표되는 거석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며, 선돌, 열석, 환상열석, 석상 등 종류도 다양하다.
선돌과 열석, 환상열석은 주로 유럽지역에 분포한다. 

선들은 긴들을 세워놓은 것으로 열을 지어 분포하는 것은 열석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카르나크 Carmac 연석이 대표적이다.
환상열석은 선들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형태로서 특수한 의식장소 또는 천체관측의 공간으로 추정되며, 

영국의 스톤헨지 stonehenge 대표적이다. 

석상은 사람의 형상을 들에 새겨 놓은 것으로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의 모아이 Moai,

제주도의 돌하르방 등이 대표적이다.  (안내문)

 

 

 

고인들의 기능

 

고인돌은 보통 무덤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덤 이외에도 묘표석, 제단, 신앙의 대상 등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1 무덤 I Burial
   대부분의 고인돌이 이에 해당하며 무덤으로 사용된 증거로는 무덤방 유골•껴묻거리의 존재,  

   묘역을 이루며 군집 분포한 점 등이 있다.


2 묘표석 | Cemetery Markers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또는 묘역을 표시하는 기능이다.

   무덤방이 없고 묘역의 특정 위치에 위치하고 있다.


3 제단 | Altar
   제사를 지내는 제단의 역할이다. 

   무덤방이 없는 고인돌에서 주로 보이며 위치가 돋보이고, 규모가 크다는 특징이 있다.


4 신앙 | Worship
   시신을 매장하고 고인돌을 축조하는 등 죽은 이에 대한 모든 행위는 일종의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 행위를 위해 대규모의 덮개돌을 사용했고, 종교적인 문양을 새기기도 하였다.

 

고창 고인돌박물관에서 고인돌유적지까지 약 770m를 걸어야 한다.

모로모로관광열차를 타고 가도 되지만, 아직 두 다리가 건강하니 걷는다.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 (高敞 竹林里 支石墓群)

 

지석묘란 선사시대 무덤형식의 하나로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창 아산면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약 1.8㎞에 이르는 야산 기슭에 440여 기의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있다.
기원전 400년∼500년 무렵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단무덤으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들의 가족무덤인 듯하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낮은 야산과 농사짓기 좋은 이 지역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 탁자 모양의 북방식, 천장돌만 있는 개석식 등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의 각종 

형식을 갖추고 있어 고인돌의 발생과 성격을 아는데 매우 중요하다. 

아산면 상갑리 일대 고인돌은 북방식 고인돌의 남쪽 한계선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임을 인정받아 2000년 12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창지석묘군 →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고창고인돌유적 


0 고창 죽림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군집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고인돌의 
   형식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지역은 매산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 안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 일대의 표고는 최저표고

   15m에서 최고표고 199m 정도인데 대부분의 고인돌은 죽림동 매산마을을 기점으로 동서에 걸쳐 산줄기의 남쪽

   기슭을 따라 표고 15~50m의 범위 내에 군을 이루며 등고션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0 고창 죽림동의 고인돌군은 개석의 크기가 1.0m 미만에서부터 5.8m에 이르는 것까지 공존하고 있으며, 

   무게도 10톤에서부터 300톤에 이력까지 크고 작은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출처_세계문화등록신청서 1999에서 발췌)

 

 

 

0 고창고인돌 유적의 축조연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청동기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고인돌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신석기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0 현재까지의 자료나 고인돌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 방사성 탄소 연대 등에 의하면 일부 고인돌이 신석기

   시대에 축조되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축조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다. 
0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 실지 연대에 대해서도 일치된 견해는 없으나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각종 형식의

   고인돌이 모두 자리하고 있는 고창 죽림리 경우는 인근지역의 조사성과와 죽림리에서 조사된 고인돌의 예에

   의하면 대체로 기원전 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0  또한 축조의 하한 연대는 청동기 후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경우 대체로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0  이 같은 연대 추정에 의하면 죽림리의 고인돌은 500여 년 동안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어 고인돌이 지배자

    만의 무덤이 아니라 지배계층이 묻혔음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_세계문화등록신청서 1999에서 발췌)

 

 

 

 

 

 

ㅁ 고창고인돌유적 


0 죽림리 일대의 고인돌은 1965년 국립박물관에 의해서 3기가 발굴조사된 이래 1990년 전라북도와 원광대학교의

   주관으로 3개월에 걸친 현지조사에 의해 442기가 조사되었으며,

   파괴 매몰된 108기를 합하면 550여 기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조사 이전의 파괴된 기수를 합하면 대략 1,000여 기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0 고창군에서는 이 유적을 보존관리하기 위하여 1965년, 1983년, 1990년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1992년 발굴조사, 1995년 고인몰유적 보존과 활용방안연구, 1997년 국토이용계획 변경용역 등 지속적인 

    연구 • 조사를 실시하였다.

                                                       (출처_세계문화등록신청서 1999에서 발췌)

 

 

 

ㅁ 고창고인돌유적 

 

0 완충지대를 포함한 유적 일원에는 전답이 27,170㎡로 1996년부터 이 지역의 전답을 모두 매입하여 정비사업을 
   실시하고 있으므로 농경행위가 금지됨. 
0 고창 죽림리, 도산리 일대는 일반농경지와 주거지역으로 광산개발 가능성이 없는 지역으로 이에 따른 개발 

   압력은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출처_세계문화등록신청서 1999에서 발췌)

 

 

 

 

 

 

 

 

 

 

죽림리 고인돌(高做竹林里支石墓)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 뒤편에 위치한다.

죽림리와 상갑리 일대는 표고 400m의 화시봉 아래 석지동 마을에서 시작하여 매산, 송암마을에 걸쳐 476기가 

분포되어 있고, 매몰 이동된 것도 108기에 이르는 단일구역 최대 고인돌[支石基] 밀집지역이다

이중 상갑리에서 국립박물관이 1968년 3기를 발굴조사하였고, 고인돌의 성격을 규영하기 위한 순수한

학술조사로서 1991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17기를 발굴조사하였다  


고창지역은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발견되는데 여기에서는 주로 지상돌덧널모양〔지상석광형]이 발굴되었으며,

여기에 보조 고임돌(支石〕을 고이는, 즉 기반식(碁盤式)과 결합된 형태를 보인다 덮개돌〔上石〕은 대체적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며, 크기는 장축이 320cm이고, 단축은 200cm를 넘지 않는다.

두께도 60cm 내외로 지상에 돌덧널을 짜야하기 때문에 기반식에서 보이는 대형의 덮개돌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죽림리고인돌군은 탁자식(卓子式), 기반식, 개석식(蓋石式) 지상돌덧널식 및 지상돌덧널식과 기반식이 결합된

형태 등 다양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어 고인돌의 형식학적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용계리 고인돌과 함께 발굴조사에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서 고창지방 고인돌의 껴묻기 [副葬] 풍습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청동기시대 편)

 

고인돌이 운집한 이곳은 농경지로 사용되던 곳인데, 1996년부터 국가에서 매입하여 고인돌 유적지로 지정했다.

고인돌에 대하여 알지 못할 땐 그저 밭에 바위가 놓은 골치 아픈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가치를 알고 난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멋진 고인돌은 강화도에 있는 게 초중고등학교에 소개된다.

고창의 고인돌은 이미 살펴본 대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단무덤으로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고인돌이 많아 그 자체로 귀중한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이 산 위로 올라가면 고인돌을 채석한 채석장이 있다고 한다.

산 위엔 서산산성도 있다고 하니 다음 기회가 생기면 둘 다 볼 겸 정상까지 올라가야겠다.

 

죽림리에서 제일 큰 고인돌 

 

 

 

 

 

 

한국 고인돌 가운데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다 
고창·화순 고인돌 유적은 보존상태가 좋고 분포필집도가 높으며,

강화 고인돌 유적은 역사적 가치가 높아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고창 고인돌유적은 죽림리 상갑리 일대의 유적으로 한국 최대의 고인돌군을 이루고 있다.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 약 1.8km 범위에 걸쳐 442기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이곳의 고인돌은 해발 15~65m의 등고선을 따라 일정한 높이에 열 지어 놓여있다.

유적 앞에 고창천을 끼고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을 보면 이곳이 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이 지역에는 규모가 큰 집단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적의 강 건너 마을 도산리에도 고인돌이 여러 개 남아 있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1990년에 사적 제391호로 지정되었으며 행정구역에 따라 상갑리 죽림리 도산리 3개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각 지역 내에 모여 있는 상태에 따라 상갑리는 4개 지구·죽림리는 6개 지구로 구분한다.  
고인돌 분포지역에서 산 정상부 쪽으로 23개 지역에서 돌감을 채취했던 흔적이 발견되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돌감을 구해 썼음을 알 수 있다.

돌감을 떼어낸 자국이 이직도 관찰되고 돌부스러기들이 수북이 쌓인 것을 보면 그때 사람들의 돌 다루는 솜씨를

느낄 수 있다.

                                                                      (출처_한국의 세계유산, 2002년 발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는 이 바위 하나하나가 모두 고인돌이다.

고인돌이라고 하지만 바위 아래 고인돌이 있는 것도 있고 달랑 바위만 놓인 것도 있다.

 

고인돌은 크던 작던 모두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다.

 

 

 

 

 

고인돌 유적지에 고인돌을 보호하기 위해 들어가지 못하도록 모두 이런 울타리가 둘러져 있다.

 

고인돌 마을을 재현한 시설 

 

 

 

 

 

 

 

 

고창 죽림리 고인돌 유적지 일대는 작은 강이 있어 농사짓기 좋고 산도 높지 않아 살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 신석기나 청동기시대부터 제법 인구가 많은 부족민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많은 세월 동안 산에서 채석해 고인돌 무덤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유적지인 고창의 죽림리를 한 번 더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