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3. 목 16:30~17:50 (관덕정 포함 한 시간 20분 탐방) 맑음
오전 비행기를 탔으면 제주 여행을 보다 알차게 진행할 수 있는데, 좌석이 없어 13:20에 도착했다.
먼저, 예약한 렌트카를 인수하고 점심 먹은 후 용두암과 용연 관광에 이어 삼성혈에 도착한다.
삼성혈은 제주 고·양·부 삼성의 기원 전설이 깃든 곳이라 제주에선 신성시한다.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은 신화는 있으나 삼성혈처럼 그 유적이 없는 게 다소 아쉽다.
그외 유래 깊은 명문가에서는 삼성혈처럼 시조와 관련된 설화나 유적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유적지가 없어도 조선을 건국한 이씨는 용비어천가 "육룡이 날으샤~"로 시작하는 조선 건국의 사적을 담았다.
삼성혈 리플렛을 보니 "삼성혈은~~~ 탐라왕국으로 발전하였다."는 문구가 있다.
탐라왕국이란 표현은 리플렛을 만든 (재)고양부 산성사재단에서 의미를 크게 부여하기 위해 쓴 것으로 "탐라"가 맞다.
"탐라왕국"은 조선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독립국가를 의미하므로 반역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세월이 변했으니 이런 문구 표현도 가능하고 나 또한 역사가가 아니니 문제삼을 이유도 없다.
조선이 제주에 관리를 보내며 제주도민을 억압하고 수탈한 자료는 수없이 많다.
그 보다 훨씬 이전 몽고의 간섭부터 시작해 조선 정부의 가혹한 징수, 4·3사건 등 지은 죄가 너무 많다.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4·3사건을 겪은 세대가 아직 생존해 있으니 그들의 응어리진 한은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4·3사건을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빨갱이라고 몰아가는 집단이 있다.
쓸데없는 이념논쟁이 아직도 극성인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게 가슴 아프다.
돌하르방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등으로 불려지며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입구에 세워졌던 것이다.
현재는 제주대학, 시청, 삼성형, 관덕정 등 제주시내 21기,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12기, 대정읍 인성, 안성, 보성 12기 등 총 45기가 있다.
석상 형태는 벙거지형 모자,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큼직한 주먹코, 꼭 다문 입, 배 위 아래로 위엄있게 얹은 두 손의 모습이다.
돌하르방의 크기는 평균 시장이 제주 187cm, 성읍 141cm, 대정 134cm이며 제작 연대는 1754년(영조 30)경으로 추측한다.
이 석상은 성문 앞에 세워져 수호신, 주술종교, 경계금표 기능으로 육지의 장승 같은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비짓 제주)
춘추봉제(春秋奉祭)
매년 4월 10일과 10월 10일에 후손들이 춘추대제를 봉양하고 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를 혈단에서 지낸다.
제주특별자치도제로 봉향되고 건시대제의 초헌관은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아헌관과 종헌관은 지역유지 중 추천된다.
삼신인이 나왔던 혈은 품자형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 혈속에는 빗물이나 눈이 스며들지 않으며
주변 나무들이 혈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삼신인에게 절을 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전시관에는 관련유물을 전시하고, 영상실에서는 삼성혈의 신화 애니메이션을 4개 국어로 무료로 상영하고 있다. (비짓 제주)
삼성혈에 관한 전설
삼성혈은 품(品)자형인 세계의 구멍에서 고씨, 양씨, 부씨 세사람의 신인이 나왔다하여 삼성혈이라 불린다.
이들은 형과 동생을 정하기 위하여 활을 쏘기로 했다.
활을 쏜 결과 고씨가 제일 멀리 쏘아 큰 형이 되고 그 다음 양씨, 부씨 순으로 정해졌다.
고 양 부 세 신인이 활을 쏘았던 흔적이 지금도 제주시 화북동에 삼사석이 남아있다.
세 신인이 이렇게 형과 동생을 정하고 사는데 곡식이 없어 사냥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는 해변가를 거닐다가 파도에 세 개의 상자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겨 상자를 바다에서 꺼내어 하나씩 열어 보니 상자마다 여인 한 사람과 오곡씨가 있었다.
서로 배필을 정하고 혼인을 한 곳이 지금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이다. (비짓 제주)
삼성혈
국가지정문화재 사적134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삼성혈은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삼성씨(고, 양, 부)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 지금도 품자 형태의 3개의 혈이 남아있다.
만여 평의 울창한 숲 속에 혈단을 중심으로 삼성전과 삼성문(분향소), 제향을 받드는 전사청, 서원이었던 숭보당 등이 있다. (비짓 제주)
지역 주민 어느 분이 소장한 수석을 기증했다는 안내문이 있다.
공익을 위한 좋은 기증이다.
나무가 갈라지는 부분이 내 머리 높이다.
갈라진 부분 웅덩이엔 물이 고여 있고 줄기엔 이끼가 껴 이곳이 유서깊은 곳임을 알겠다.
삼성형 관관을 끝내고 근처에 있는 관덕정으로 이동한다.
관덕정
제주 시내 한가운데 있는 관덕정은 많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고 또는 길을 가르쳐 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등
제주 사람들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국가지정 보물 제 322호다.
조선시대 세종 때인 1448년 제주 목사 신숙청은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상무 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이 건물을 세웠다.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관덕정이란 이름은 '사이관덕'이란 문구에서 나온 것으로 활을 쏘는 것은 평화시에는 심신을 연마하고
유사시에는 나라를 지키는 까닭에, 이를 보는 것이 덕행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다.
대들보에는 십장생도, 적벽대첩도, 대수렵도 등의 격조 높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편액은 안평대군의 친필로 전해진다. (비짓제주)
제주도 역사의 앞마당, 관덕정 광장
○ 관덕정 광장은 제주 역사의 산 증인이다.
조선시대인 1448년 세워진 이래 제주 역사의 굴곡을 말없이 지켜보며 침묵으로 증언해주는 곳이 관덕정과 이 광장이다.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부속 건물로 세종 30년(1448년) 신숙청(辛淑晴) 목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관덕(觀德)이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즉,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 《예기》의 글귀에서 유래했다.
이름 그대로 이곳에선 군사들의 활쏘기 장소로 또는 과거시험, 각종 진상을 위한 봉진행사 등이 이루어졌으며,
매년 입춘에는 춘경이 치러져 문화축제의 장이 되기도 했다.
○ 지금은 도시발전으로 제주시가 크게 확장돼 각종 행정, 사법기관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관덕정과 그 주변은 조선시대 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행정관청이 모여 있어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제주에서 큰 행사와 각종 기념식, 집회와 역사적인 사건 모두 이곳 관덕정 광장에서 일어났다.
○ 제주에서 최초로 5일장이 열린 곳도 이곳이고, 조선 말 빈번했던 민란의 최종 종착지도 이곳이어서
이재수의 난 당시에는 300여 명의 교인척살이 이루어진 피의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4.3발발의 도화선이라는 1947년 3.1집회 역시 북국민학교에서 시작되어 이곳에서 사건화된다.
4.3의 와중에서는 무장대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되는 등 격동의 공간이었다.
4·3 이후 제주지역의 시민과 학생들이 끊임없이 전개한 민주화운동과 4·3진상규명 운동도 관덕정 광장에서 시작됐고,
단절되었던 춘경의 보구언도 80년만에 이곳에서 복원되어 탐라입춘굿으로 매년 치러지고 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나면 제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자연스럽게 관덕정으로 모여들었다.
제주 역사의 중심지, 제주의 심장 같은 공간.
하지만 번영의 역사보다는 오히려 세찬 바닷바람에 상처 입은 섬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더 많이 보아온 곳.
바로 이곳 관덕정 광장이다. (비짓 제주)
관덕정 야경 (비짓제주에서 빌려옴)
관덕정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관덕정을 지을 때 목사는 전국에서 유명한 목수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정자(관덕정)는 다 지으면 쓰러지고, 다시 지으면 쓰러지곤 하였다.
일류 목수들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중이 이곳을 지나다가 또 쓰러지겠다고 중얼거리자 목수들이 화가 나서 중을 내쫒았다.
정자가 다시 완공이 되자마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전번 중의 이야기가 생각나 수소문 끝에 중을 찾아가 도움을 간청하였다.
중은 상량식을 닭이나 돼지가 아닌 사람으로 상량식을 해야 한다고 하자 목수들은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중은 상량식 때 상량이라고 큰소리를 외치면 지나가던 솥장수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니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지만 중의 말대로 다시 공사를 하고 상량식 준비를 진행하였다.
마침 솥장수가 큰 솥을 머리에 이고 관덕정 앞 마당을 지날 때 모여있던 군중들은 "상량~"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솥장수는 깜짝놀라 머리를 들어 쳐다보려다 솥이 너무 무거워 넘어지면서 솥의 언저리에 목이 깔려 죽고 말았다.
중의 말대로 목수들은 솥장수를 희생으로 상량식을 치르자 관덕정은 더 이상 쓰러지지 않고 완공되었다고 한다. (비짓 제주)
망경루
임금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에 감사드리고 예를 올리던 곳이다.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역활도 맡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중섭의 황소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귤림당
한가할 때 거문고를 타고 바득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휴식하던 장소
여러 공덕비 등등
연희각
목사가 집무하던 곳
태형을 집행하는 기구에 매부가 올라가고 동행이 살짝 태형을 집행하자 외국인이 멋지다며 사진을 찍어준다.
망경루 2층에서 본 풍경이다.
연희각
연희각에서 집무를 보던 모습
연못
1526년 이수동 목사가 적의 침입으로 화재 발생시 불을 끌 목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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