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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제주도

관덕정 제주목아 그리고 삼성혈

by 즐풍 2019. 6. 12.

 

 

 

관덕정

관덕정은 조선 세종 때인 1448년 안무사 신숙청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운 제주도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제주목 관아의 일부다. 건립 이후 그 원형을 유지하며 여러 차례 증개축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일본인이 수리하면서지붕처마가 2척 정도 잘렸으나 2006년 보수를 통해 원형을 되찾았다.

'관덕'이란 명칭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라는 예기의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안내문)

 

 

 

 

제주 여행은 기회가 많지 않다보니 같은 시간이라도 집중하게 되고,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에 일찍 일어났다.

아침부터 문을 연 식당이 보이지 않아 빈속으로 옆에 있는 관덕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빗방울 떨어질 듯 날씨는 잔득 찌푸려 있다.

아직은 어둑어둑 하니 카메라를 야간모드로 촬영한다는 게 솜씨가 좋지 못하니 꽤 많은 사진이 온통 검게만 보인다.

그래서 관덕정에서 건진 사진은 불과 몇 장뿐, 이놈의 기계치는 쉬 고쳐지지도 않고 굳이 고칠 생각도 없다.

그냥 자동이나 풍경에 넣고 찍는게 제일 편하다.

잘 나온 접사사진이나 선명한 풍경사진을 볼 때마다 부럽지만, 그들의 솜씨보다 좋은 카메라거니 생각한다.

나도 좋은 카메라를 가지면 그들만큼 찍을 수 있을까?

 

 

 

제주 동자석

제주의 동자석을 조선 초기부터 약 1900년 전후 제주의 장묘문화의 하나로 무덤 좌우에 세웠던 작은 석물이다.

대체로 작고(30~100cm) 모양이 다양하다.

무덤을 장식하는 기능의 정주목이나 돌하르방처럼 잡신을 방어하는 수호적인 의미도 있다.

동자석마다 촛대, 술병, 찻잔, 꽃, 부채, 학 등을 가슴에 두손으로 들고 있는 것과 공손하게 손가락만 끼고 서 있는 것,

눈매를 치켜 세운 무서운 표정의 동자석도 있다.

지역마다 석질과 형태가 조금씩 다르긴 하나 구멍이 숭숭한 현무암이 갖는 재질과 단순하면서도 영적 분위기를

잘 살린 제주 동자석은 무덤을 둘러싼 돌담, 주변의 오름들과 조화는 설치미술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돌하르방(제주 민속문화재 제2-19호(좌), 제2-20호(우)

우석목, 무석목, 벽수머리 등으로 불려지며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에 세워졌던 것이다.

현재 제주대학교, 제주시청, 삼성혈, 관덕정 등 제주 시내 21기, 그 외 지역 24기 등 총 45기가 있다.

석상 형태는 대체로 벙거지형 모자,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큼지막한 주먹코, 배 위 아래로 위엄있게 얹은 두 손의 모습이다.

이 돌하르방의 제작연대는 1754년(영조 30년)경으로 추정된다.

성문 앞에 세워져 수호신적, 주술종교적, 경계금표적 기능을 지녔듯이, 육지의 장승과 같은 역활을 맡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국제공항 입구에 있는 것을 2011.5.1. 현 위치로 옮김  (안내문 옮김)

 

 

 

 

 

 

 

 

 

 

 

제주목 관아

 조선시대(朝鮮時代)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觀德亭)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耽羅國)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 관아시설(官衙施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世宗 16) 관부(官府)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骨格)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重·改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國家史蹟)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당대(當代)의 문헌(文獻) 및 중앙문화재위원·

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考證)과 자문(諮問)을 거쳐 관아지 복원(官衙址 復元) 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특히, 제주역사의 정체성(正體性)과 중심을 설정하는 이 뜻깊은 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기와 5만여 장 전량(全量)을 헌와(獻瓦)해 준

30만  제주시민의 혼(魂)을 담은 사업이기도 하다.
민관(民官)이 합심하여 복원하게 된 이 장대(壯大)한 제주목 관아는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復元)을 완료하였다. (홈페이지 편집)

 

 

 

 

 

 

 

 

 

 

 

 

제주목 관아 진해루

 

 

 

 

삼성혈

 

삼성혈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4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전 제주도의 개벽시조(開闢始祖)이신 삼을나 삼신인

[三神人 : 고을나(髙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이 이곳에서 동시에 태어나 수렵생활을 하다가

우마(牛馬)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온 벽랑국(碧浪國) 삼공주를 맞이하면서부터

농경생활이 비롯되었으며 탐라왕국(耽羅王國)으로 발전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이 세개의 지혈은 주위가 수백년된 고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든 나뭇가지들이

혈을 향하여 경배(敬拜)하듯이 신비한 자태를 취하고 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내려도 일년내내 고이거나 쌓이는 일이 없는 성혈로서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  (홈페이지 편집)

 

 

 

 

 

 

 

 

 

 

 

 

경내는 수백년 된 고목들이 역사를 간직하듯 도열해 있어 삼성혈에 대해 경외심으로 유지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사석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제주시 화북동에 있고 전시장 앞에 사석비만 남아있다.

 

 

경내에 수많은 화산석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제주 삼성의 한 성에 해당하는 양문혁님께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삼성혈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돌담 위로 바라본다. 마침 벚꽃이 만개해 산뜻한 이미지를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