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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by 즐풍 2022. 1. 26.

2022_09

 

 

2022.1.24 (월) 오전 미륵산 등산 전 탐방

 

 

오래전부터 익산 미륵사지의 미륵사지 석탑을 보고 싶었다.

일산에 살 땐 너무 멀어서 못 오고, 평택으로 이사한 후에도 여전히 멀다는 생각에 감히 올 생각을 못했다.

목우와 함께 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고 혼자 차량을 이용하기엔 부담이 너무 크고 운전은 지루하다.

요즘 기차 여행을 하면서 점차 지역을 넓혀가며 차차 요령이 생겨 오늘 제일 먼 익산까지 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06:31 무궁화호를 예매하려고 하니 09:22에 도착하는데,

"우회하는 열차이니 도착시간을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웬일인가 싶어 시간을 확인하니 다음 06:43발 차량은 08:56에 도착한다길래 두 번째 차량으로 예매했다.

생각 없이 예매했으면 40여 분 더 기차에 앉아 있을 뻔했다.

 

사전에 익산역에서 미륵사지로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여 정류장에 도착하니 거의 정확하게 버스가 도착한다.

미륵사지 석탑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라 그런지 경유하는 버스가 제법 많다.

버스에 탈 때 09:10이라 출근시간이 지나서인지 승객도 별로 없어 좌석이 많이 비었다.

미륵산 가는 등산객은 한 정거장 앞 전북교육청 연수원에서 내리고 즐풍 혼자 미륵사지에서 하차한다.

 

 

 

□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 표고 430m의 미륵산 아래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역을 자랑한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전한다.

미륵사지 전경무왕 부부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 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선 미륵사가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었고, 

습지를 매립하여 평지를 조성하였으며,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제한다는 

불교 경전의 내용에 따라 가람배치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이들 사항은 1974년부터 이어진 23년간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사찰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기인 7세기 초이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하여 폐사(廢寺)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륵사는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이른바 백제식 <1 탑-1 금당> 형식의 가람 세 동을 나란히 병렬시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양쪽의 동원(東院)과 서원(西院)보다는 가운데 

중원(中院)의 면적과 금당 및 탑의 규모가 더 커 중심을 형성하였다.
동중서(東中西) 3개 원은 각기 긴 회랑으로 구획되어 독립된 공간을 이루지만, 

북쪽으로는 1동의 큰 강당터로 연결된다. 

즉 예불 공간을 3개 원으로 분화되었지만, 강당은 하나로 전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강당과 연결된 북·동·서 회랑터에는 후대 승방(僧房)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되었다.

백제시대의 사찰지 규모는 강당에서 중문지까지 134m이며, 폭은 동원과 서원의 외곽 기준 172m이다.
뒤쪽 미륵산에서 발원한 물길은 가람의 네 면에 걸쳐 인공 물길로 정리되었고, 

가람의 남쪽 정면에 큰 연못을 조성했던 흔적도 나타났다. 

또한 강당 북쪽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어서 인공 물길을 건너 뒤편의 후원(後園) 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습지였던 곳이어서 각별히 치밀하게 배수 처리를 한 점과 아울러, 

각 원의 금당도 특별한 구조로 습기를 예방하였다. 

금당 바닥에는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에 1m 정도 높이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에 귀틀 목을 걸친 흔적이 있다. 

따라서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백제는 1탑 1 금당의 사찰 구조를 바탕으로 불교의 미륵신앙을 구현하기 위해 

<3 탑-3 금당>이라는 독특한 사찰 구조로 미륵사를 만들었다. 

백제인들은 이 미륵사를 통하여 누구나 평등한 삶을 염원했던 미륵하생의 꿈을 이룩하려 하였고,

 이로써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려는 간절한 염원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고대 백제인들의 신념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 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최근까지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이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안정성이 우려되어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석탑의 본격적인 본격적인 해체조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학술조사연구와 구조보강, 

보존처리 등을 시행하여 2017년 말 6층까지 석탑의 조립을 완료하였다. 

이후 미륵사지 석탑 가설덧집 철거 및 주변 정비를 진행하여 2019년 4월, 문화재청장, 도지사, 

국회의원, 학계, 종교계,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가졌다.

미륵사지-가을-금당지 앞 석등 미륵사지 석탑은 발굴 조사 때 동탑지에서 노반석(露盤石)과 없어졌던 지붕돌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서탑과의 비례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계산하여 복원한 결과 9층 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결론에 따라 1992년 미륵사지 동원에 석탑을 복원하였는데, 복원된 높이는 총 24m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높은 경주 감은사지 석탑이 13m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미륵사지 석탑은 그 두 배에 가까운 규모가 되는 셈이다.


한편 2009년 서원의 석탑에 대한 1층 해체조사를 진행하던 중 심주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사리공 주변에는 십자(十字) 먹선과 석회로 밀봉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리장엄은 사리공 안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사리호, 금제 사리 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 

다양한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되었다.
사리봉영기의 판독 결과 석탑은 639년 사리를 안치하면서 건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미륵사가 백제 무왕 집권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해 준 보기 드문 사례이다.

                                                                                            (출처_백제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

 

 

 

미륵사지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해당한다.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부, 부여, 익산 등 3 권역으로 나뉜다.

공주에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이 있고,

부여에는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

익산에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가 있다.

 

 
 

□ 연 못

극락세계에는 칠보로 장엄하게 꾸며진 연못이 있어 그 안에 청정한 물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연꽃이 미묘한 향내를 은은하게 내뿜는다고 불경에서는 말한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극락세계의 상징으로 연못을 만든다.
미륵사지 입구의 중앙 도로에서 동·서편에 있는 2개의 연못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당간지주,
남회랑과 함께 만들어졌다.
동쪽 연못은 동서 길이 51m, 남북 너비 48m이고, 서쪽 연못은 동서 길이 54.5m, 남북 너비 41m이다.
두 연못 사이에는 동서 너비 50.5.m의 길이 있고 그 길은 남회랑 중앙 계단까지 이어진다.
서쪽 연못가에서 미륵사지를 바라보면 연못에 미륵산과 석탑 등이 비치는데,
폐허가 되기 전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미륵사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출처_한국의 세계문화유산)

 

□ 당간지주


당간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할 때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깃발인 당을 달아 두는

길쭉한 깃대이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받쳐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렸다.
후대 남회랑 안마당에 약 90m 간격으로 있는 당간지주 2기는 크기와 형태, 제작기법이 서로 같다.
​현재 당간은 사라지고 지주만 남아 있는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할 때 탑 안에서 나온 석재가 당간 형태임을 보아 당간은 돌로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주의 높이는 약 4.5m이고, 바깥 면에는 가장자리와 중앙에 띠가 있다.
​지주의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지주 아래에는 기단이 있으며, 기단 각 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이 당간지주는 뒤에 복원한 미륵사지 9층 석탑과 함께 동쪽에 있다.

 

당간지주 앞쪽 기단은 세 갈래로 금이 갔는데, 뒤쪽은 온전한 모습이다.

 

□ 동원구층석탑

 

1974년 동원의 탑 터를 발굴하여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과,

국보 제11호인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밝혔다.

동원 구층 석탑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기단석, 지붕돌인 옥개석,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를

받치는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으로 고증을 바탕으로 1992년 복원함.

복원된 탑은 아래 기단의 한 변이 12.5m, 위 기단의 한 변이 10.5m인 이중 기단이며,

탑 높이는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총 27.8m이다.

탑의 지붕돌에 달린 풍탁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복원에는 기존 탑 부재와 같은 재질인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2,000여 개와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2개를 포함하여, 석재 2,700여 톤을 사용하였다.

석탑 복원 기록과 사리를 담은 용기인 사리장엄을 5층 심주석에 모셔 두었다고 한다.

                                                                                                                (안내문)

 

국내 최대 규모의 미륵사지 석탑은 총 220여 억 원을 들여 2019년 3월 20년간의 복원사업을 마무리하고

공개된 지 불과 2년도 채 안 됐는데,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각 탑의 지붕돌 틈 사이로 빗물이 새면서 이끼가 끼고 있다.
왼쪽에 복원되지 않은 서원 구층 석탑은 1,380년 넘는 세월에도 이끼는커녕 당시 모습 그대로 변함없다.
컴퓨터로 온갖 시뮬레이션을 거쳐 복원했어도 지붕돌의 미세한 오차로 이끼가 껴 제법 보기 싫을 정도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 두께와 크기가 더해질 테니 첨단 기술로도 1,400여 년 전의 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
지금 보고 있는 사진은 앞쪽인 남쪽 사진으로 북쪽과 서쪽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겉모습만 화려했지 실속 없는 복원이다.

 

 

 

 

 

□ 금당지 金堂址

 

금당은 불상을 모신 건물로 탑과 더불어 사찰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건물이다.
삼국유사에는 미륵 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탑과 더불어 금당을 세 곳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삼원의 가람 속에 각각 금당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각 금당지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계단을 둔 이중기단으로 만들어졌다.
기단 내부에는 초석을 받치는 초반석 위에 정방형 기둥 모양의 높은 초석을 놓아 지하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초석의 상면에는 마루를 깔기 위한 나무 보가 놓일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다.
각 금당에 지하 공간을 마련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단지 경주 감은사지에서는 문무왕이 죽은 후 동해의 용이 되고,
이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에 지하 공간을 두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미륵사지는 삼국유사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아버지를 용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용 신앙과 관련된 공간으로 볼 수도 있다.
                                                                                                 (출처_한국의 세계문화유산)

 

 

 

□ 목탑지 木塔址

 

사찰에서 탑은 부처님의 신골身骨, 즉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불교가 들어온 초기에는 주로 목탑을 세웠다.
미륵사지는 삼원三院의 가람배치로 중원에는 목탑을 두고, 동원과 서원에는 석탑을 각각 두었다.
목탑지 기단基壇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들어진 이중기단으로,
아래 기단은 면석 面石, 덮개석[甲石], 위의 기단은 지대석地臺石, 면석, 덮개석을 갖추고 있다.
기단은 4면 중앙에 계단이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18.5m인 정사각형이다.
목탑지 하부의 기초는 목탑의 기단 면적만큼 메웠던 흙을 다시 깊이 350cm 정도까지 파낸 후,
아래서부터 사람 머리 크기의 돌들을 150cm 정도 채워 다졌다.
그 위에 마사토와 점질토를 섞어 3~5cm 두께로 층층이 다져 올리는 판축板築을 했다.
목 탑지 기초부 바닥을 보면 습지의 개흙이 보이고 있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못을 메우고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굴 조사 당시 기단의 앞에서 출토된 불에 탄 기와들을 통해
목탑은 통일신라 후기 화재에 의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_한국의 세계문화유산)

 

 

 

 

□ 석등 하대석 石燈下臺石
전라북도 지정문화재자료 제143호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고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사찰의 금당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사이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미륵사지 석등은 동원과 중원의 금당지 남쪽에 각각 1개씩 하대석만 남아 있으나 
서원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발굴 조사 전 서원 지역에서 발견된 석등 하대석 위에 놓이는 기둥[竿柱石], 불을 밝히는 돌, 
지붕돌 등이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동원과 중원의 석등 하대석에는 여덟 잎의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말기의 수막새와 같은 연꽃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석등 중 가장 오래된 백제시대 석등으로, 높이는 2.7m 내외로 추정된다.
                                                                                                       (출처_한국의 세계문화유산)

 

 

 

 

 

 

 미륵사지 석탑 彌勒寺址 石塔

국보 제11

사찰에서 탑은 부처님의 신골身骨, 즉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미륵사지 서원에 있는 것으로 동원에도 이와 같은 석탑이 또 하나 있었으며,
이 두석 탑 사이의 중원에는 목탑이 있었다.
이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미륵사에는 탑이 3기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탑의 건립은 2009년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미륵사지 석탑은 639년己亥 백제 무왕의 왕비(沙宅積德의 딸)가 발원하여 세워졌으며,
1층 중앙 기둥에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석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목탑과 같은 이중 기단이다. 기단 위에 있는 1층 탑신의 각 면은 세 칸으로 나눠져 있고,
가운데 칸에 문이 있어 내부가 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는 사각형 기둥이 있고,
탑의 외면에는 목조건물처럼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 수법의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었고 그 위에 있는 받침돌이 지붕돌[屋蓋石]을 받치고 있는데,
이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추켜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해진다.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든 것 외에는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북동쪽 부분이 6층까지 높이 16.24m으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안정성이 우려되어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석탑의 본격적인 해체조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학술조사연구와 구조보강, 보존처리 등을
시행하여 2017년에 석탑의 재조립 공사가 완료되었다.
                                                                                   (출처_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미륵사지의 유적은 미륵사지 석탑을 포함해 대부분의 유적은 동서로 두 개씩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도 두 개 중 하나로 이번엔 서쪽 당간지주이다.

 

□ 미륵사지 당간지주 彌勒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236호

당간은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로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둔다.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지주라 한다.
당간지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였기에 삼한시대 '솟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미륵사지가 남쪽으로 확장될 때 남회랑 안에 당간지주 2기를 세웠다.
지금은 지주만 약 90m의 간격을 두고 남아 있는데 그 크기와 양식, 제작 기법이 같다.
높이 4.5m의 지주 바깥 면에는 가장자리와 중앙에 띠가 있고,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지주를 지탱하는 기단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미륵사지의 당간은 서탑을 해체할 때 출토된 석재의 형태로 보아 돌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_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아래 기단은 두 개의 돌을 맞댄 것으로 한쪽은 완전한 형태이나 북쪽 기단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지난주에 본 홍성읍 오관리 당간지주와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홍성읍 오관리 당간지주의 웅장함

2022_06 2022.1.16 (일) 오후에 홍주읍성 탐방 후 들림 홍성에 온 목적은 홍주읍성을 보는 게 제일 크지만, 온 김에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아야 후회가 없다. 후회라기보다는 가성비를 높이려는 까닭

blog.daum.net

 

 

 

 

 

미륵사지에 산재한 여러 석물은 한 군데로 모아 두었다.

같은 석물 중에 깨진 것은 이렇게 끈으로 묶어 유실되지 않게 처리했다.

 

 

 

익산은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로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던 도시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며 익산시로 개명하며 이리시의 이름을 지웠다.

역에서 버스를 타고 미륵사지로 갈 때 보석가공단지와 판매장을 차창 밖으로 볼 수 있었다.

이런 지역 특색을 살필 수 있으면 좋지만 하루 일정으로는 부족한 게 많을 수밖에 없다.

미륵사지에 남은 것은 황량한 들판에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한쪽으로 모아놓은 석물 잔해들 뿐이다.

남아 있는 자료가 없으니 복원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 하나둘 빈 공간을 채우는 복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