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함안 말이산 아라가야고분군 정말 대단해

by 즐풍 2021. 7. 6.

2021_84

 

 

 

2021.6.22. (화) 13:32~14:35(1시간 23분 탐방, 3,4km 이동) 다소 흐림

 

 

방어산 등산을 끝내고 마애사 주차장에 있는 함안군 관광지도를 보며 말이산 아라가야고분군이 있다는 걸 알았다.

길목에 있는 소수서원을 들린 후 아라가야고분군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주차공간이 없어 언덕 밑 이면도로의 주차공간에 주차하고 언덕으로 올라오니 함안군청이다.

함안군청 주차장에서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면 바로 말이산 아라가야고분군과 만나게 된다.

 

아라가야고분도 왕릉과 마찬가지로 절대 권력자의 무덤이므로 풍수가 좋은 곳이다.

이 아라가야고분군과 맞닿은 곳에 함안군청이 자리한 걸 보면 군청 역시 천하의 명당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말이산 자락에 위치한 함안군청 앞을 흐르는 함안천은 낙동강과 만나 부산 을숙도의 지나며 남해바다로 빠진다.

다시 말해 배산임수의 명당을 아라가야 고분과 함안군청이 깔고 앉았으니 함안의 군세도 점점 좋아지겠다.

 

 

 

□ 함안 말이산 고분군 - 사적 제515호

 

가야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500년 동안 낙동강 남쪽과 서쪽 일대에 분포했던 나라들로 삼국과는 달리 

여러 개 의 작은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아라가야는 여러 나라 중 ‘형님’ 또는 ‘아버지’의 나라로 기록되었을 만큼 가야국들을 대표하는 고대국가였다.

함안 말이산 고분은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 고분군으로, 아라가야의 찬란한 500년 역사를 간직한 

유적이다. 

말이산은 머리+산을 표기한 것으로 ‘우두머리의 산’ 즉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을 의미하는데, 

이로 보아 그 이름이 가야시대에 조성된 고분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이산은 함안의 가야분지에 위치한 해발 40~70m의 나지막한 구릉이다.

남북으로 약 1.9km 정도 길게 뻗은 중심 능선과 이로부터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여덟 갈래의 가지능선으로 되어 있다. 

가야시대의 대고분들은 구릉의 중심과 가지능선에 열을 지어 서 있으며, 

이로 인해 올려다보는 이들로 하여금 ‘산 위에 산’이라는 경외로운 이미지를 준다.

아라가야고분군은 면적이 52만 m로 단일 고분유적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말이산 구릉 전체에 분포해 있는 대형 봉토분은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1~ 37호분을 지정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변에 고분의 원형을 잃어버린 것이 적지 않아 약 1,000기 이상의 가야 고분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말이산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처음 실시되었으며,

우리 연구자에 의에서는 1985년 최초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20차례의 학술 조사를 통해 대형 봉투분 9기 포함, 200여 기의 가야시대 고분이 발굴되었으며, 

불꽃무늬토기를 비롯한 8,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더 나아가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아라가야가 고대 국가로서 삼국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이산고분군은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회의에서 고대 가야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으며, 2021년 최종 등재를 목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안내문)

 

 

 

 

□ 말이산 아라가야고분군

 

말이산고분군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와 말산리에 위치한다. 

고분군의 명칭은 고분이 분포하는 구릉지의 이름을 따랐다.

1~6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아라가야의 대표 고분군이다. 

신청 유산 중 가장 오랜 기간 조성되었으며, 봉토를 크게 조성하지 않는 목관묘, 목곽묘에서 석곽묘, 석실묘로 변화하면서

거대한 봉토분이 군집하는 기념비적인 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가야고분군’의 가시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말이산고분군은 구릉지 능선을 따라 조성된 대형 봉토분으로 인해 고분군은 이후 시대에도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되었으며,

16세기 문헌에는 말이산고분군을 고대 왕들의 무덤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인식 덕분에 20세기 초까지 구릉지 일대의 봉토분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고분군이 조성된 구릉지 동쪽에는 1950년대 군청 건물과 함께 시가지가 인접하여 조성되었으며, 

구릉지 서쪽과 남쪽은 농경지로 둘러싸여 있다. 

구릉지 북쪽은 1950년대부터 시가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말이산고분군은 20세기 초부터 현장 기록 및 고고학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9년 고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때 고분군의 분포와 행정구역을 경계로 도항리고분군과 말산리고분군으로 각각 지정되었으며, 

이후 1963년 고적이 사적으로 전환되었다.

 

5~6세기 조성된 봉토분은 구릉지 능선과 사면을 따라 127기가 조성되어 있다.

5세기부터 축조되는 석곽묘는 가늘고 긴 가야식 석곽묘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세장방형의 석곽묘에는 중앙부에 피장자의 시신이 안치되고 머리 위쪽에는 다량의 토기가 부장 되며, 

발 아래쪽에는 순장자가 배치된다. 

이는 아라가야식 석곽묘의 전형적인 공간 분할 방식이다. 

 

20세기 초부터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토기, 철제무기, 교역품 등 다량의 부장품이 확인된다. 

특히 토기는 고배·기대·장경호와 같은 가야토기의 공통적인 구성이 확인되며, 불꽃 모양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투창이 나타난다. 

또한 집 모양, 수레바퀴 모양, 사슴 모양, 배 모양 등 다양한 형상을 본떠 만든 토기도 출토되었다. 

아라가야는 물길을 기반으로 가야의 여러 정치세력과 백제, 일본(왜) 등 주변 국가와 교역하면서

낙동강 유역에서 가야연맹 전 시기 동안 세력을 유지하였다.                                              [출처_가야고분추진단 홈피]

 

 

 

□ 말이산 4호분

 

말이산 4호분은 아라가야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인 5세기에 축조된 고분이다. 

봉토 규모는 지름 39.4m, 높이 9.7m에 달해 가야고분 전체에도 최대급이다. 

무덤은 돌로 쌓아 만든 구덩이식돌덧널(수혈식석곽)의 구조로, 뚜껑돌을 받치기 위한 들보시설이 

네 벽면에서 확인되어 아라가야의 전형적인 대형 무덤 형식을 잘 보여준다.

내부에서는 수레바퀴모양토기를 비롯하여 칼집을 철로 만든 큰 칼 등 160여 점의 진기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순장 습속도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고대 아라가야 최고 지배자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4호분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졸속 발굴된 4기의 고분 중 유일하게 발굴 상황이 알려진 고분이다.

 

□ 4호분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성제국대학의 이마니시 류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봉분의 규모가 가야고분 중 최대급이며 발굴조사 결과 말이산고분군의 독창적인 고분 축조 기술을 보여주는 

‘들보시설’과 수레바퀴 모양, 오리모양 토기, 사슴뿔 장식 철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앞뒤 옆, 좌우로 고분이 빽빽한 아라가야 고분군은 전부 푸른 묘지 언덕이다.

1,500여 년 동안 일부인 민가도 들어서고 농지로서 쓰였겠지만, 이제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잘 관리하고 있다.

잡목은 다 베어내고 잔디는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고 있다.

그 와중에 제법 나무의 수형이 좋은 몇몇 나무는 적절히 관리돼 보기 좋은 나무도 있다.

 

 

고분이 발굴될 당시의 사진을 타일로 구워 바닥에 설치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발굴된 부장품을 조합하여 원래 모양을 산출해 낸 사진이다.

 

요즘은 질기기가 고래 심줄보다 센 야자매트가 깔려 토지 유실을 막는 친환경제품이라 좋다.

예전 같으면 시멘트나 돌을 깔아 불편한 곳의 많았는데, 이젠 대체로 이런 야자매트를 깔고 있다.

 

 

□ 말이산 고분 5호분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성제국대학의 이마니시 류에 위해 발굴 조사되었으며 무덤 덮개돌에 ‘수하왕’이라는 명물이 확인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94년 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재조사를 실시했고 덮개돌 명문은 ‘하삼기’로 판명되었으며 

근대에 새겨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조사 결과 5호분은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주변 유적에 비해 재갈, 밭갈이, 창, 화살촉 등 무기가 많이 부장 된 특징이 있다.

                                                                                                                  (안내문)

 

 

 

 

 

나무가 너른 벌판에 혼자 클 때 나무는 거칠게 없이 사방으로 가지를 뻗는다.

산에서 경쟁하듯 햇빛을 받기 위해 위로만 크는 나무와는 차이가 크다.

 

 

 

 

□ 말이산 고분 57, 128호분

 

2018년 발굴조사된 57호분과 128호분은 무덤방 길이가 6m 정도의 중형급 구덩식돌덧널무덤이다. 

무덤 내부에서는 말이산 돌덧널무덤의 특징인 들보시설이 뚜렷하게 확인되었으며, 

특히 57호분에서는 북쪽으로 별도의 유물 부장 구덩이가 1기 딸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유물 부장 구덩이는 말이산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구조로 말이산 고분군의 다양한 매장 풍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 HM57호 유물 부장 구덩이

 

Hm57호분 봉분 밖 유물 부장 공간은 무덤의 주인이 없고 유물만을 부장 하기 위한 공간으로 HM50호분의 봉분 경제보다 

바깥에 만든 특이한 사례에 해당한다. 

평면 형태는 직사각형이고 규모는 길이 290cm, 너비 116cm, 길이 36cm이다. 

구덩이 내부에는 네 벽면을 따라 뒤채움 흙이 들려져 있고 바다만 평평하게 정리되어 있다. 

유물은 바리 모양 그릇받침 3점, 뚜껑이 있는 굽다리 접시 8세트 16점, 항아리류 아홉 점 등 모두 28점이 출토되었다.

뒤채움 흙과 유물의 출토 양상으로 볼 때 나무로 만든 상자에 넣어 부장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 부장 구덩이는 말이산고분군의 다양한 매장 풍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구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안내문)

 

 

나무 뒤로 보이는 가장 위쪽 9, 10호분

 

□ 말이산 9, 10호분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유적의 정확한 성격은 파악할 수 없다. 

9호분과 10호분은 말이산 주능선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어 말이산 고분군에서도 가장 상징성을 가진

고분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안내문)

 

 

□ 말이산 2, 3호분 

 

말이산고분군 북쪽 능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2호분과 3호분은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유적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다. 

봉토분의 위치와 주변 유족의 조사 성과를 통해 볼 때 5세기경 축조된 봉분을 가진 구덩식돌덧무덤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출토된 토기와 쇠붙이

 

 

 

4호분과 건너편 고분

 

피라미드는 기본적으로 규모가 커 남성적이라면 가야고분은 대체로 규모가 작아 여성스럽다.

부드러운 선이 곱게 느껴진다.

 

 

□ 8호 고분

 

1994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높은 봉분이 있는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말이산 내에서도 최대급에 속한다. 

무덤 내에서는 화살통, 화살촉, 투구 등 무기류와 말투구,  말갑옷 등 화려한 말갖춤, 각종 토기류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무덤 주인의 발아래에서는 말이산고분군에서 최대인 여섯 명의 순장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고분 앞에도 노란 금계국이 피었다.

푸른 들판에 노랗게 핀 금계국이 보이기 시작한 건 겨우 10여 년에 불과하며, 북미가 원산지인 원예식물이다.

좀 더 큰 금계국은 번식력이 강해 생태계를 교란시켜 주변 식물을 고사시킨다며 말이 많다.

이런 금계국마저 고분 주위에 펴 단조로운 고분군으로 화사하게 변모시키니 아직은 볼만하다.

이 고분 왼쪽으로 내려가면 함안박물관이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분군...

 

함안읍 풍경

 

 

고분이 너무 많아 몇 호 고분인지 알 수 없다.

신라 고분을 발굴하고 천마 그림이 발견되면 천마총이니 뭐니 하며 그림 위주로 이름이 부여된다.

신라는 역대 임금 56명 중 37명의 능을 확인했거나 추정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 말이산 45호분

 

아라가야 최고 지배자의 묘역으로 알려진 함안 말이산고분군(사적 제515호)에서 국내 최초로 봉황장식 금동관

(鳳凰裝飾 金銅冠)이 확인됐다.
경남 함안군은 지난 30일 말이산고분군 45호분에서 국내 최초의 봉황장식 금동관이 1점 확인됐다고 1일 밝혔다. 
말이산고분군 45호분은 지난 2019년 발굴 조사된 고분으로(조사기관:두류문화연구원) 사슴모양토기·집모양토기·배모양토기 등

4점의 상형토기가 완전한 형태로 출토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고분이다.

이번 금동관은 45호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금동투조장식(金銅透彫裝飾)을 보존처리 및 복원 과정에서 전문가 검토를 거쳐

그 형태가 확인된 것이다.

확인된 금동관은 횡으로 긴 관테 ‘대륜(臺輪)’ 위에 봉황 두 마리가 마주 보는 형태의 세움 장식 ‘입식(立飾)’이 올려져 있다.

관테는 이마의 윤곽에 맞추어 만든 듯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1매의 동판에 관테와 세움 장식은 일체형으로 표현돼 있다.

금동관은 동판 표면에 도안을 그린 다음 여백부를 뚫어내는 기술, 즉 투조(透彫)로 만들어졌으며 표면과 이면 모두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됐다.

관의 전면에는 2개 1조를 이루는 소공(小孔)이 뚫려있어 유기질제 관에 부착 및 추가적인 장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말이산 45호분 금동관은 하부의 관테와 상부의 두 마리 새 모양 세움 장식이 마주 보고 있는 대칭적 구도로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금공품(金工品) 가운데 첫 사례이다. 

금동관에 장식된 두 마리의 새는 한쪽 날개부가 서로 붙어 있으며, 눈은 뚫려있고 상하 부리는 아래쪽을 향해 있다.

목은 C자로 바깥쪽으로 꺾여있으며 몸통에는 단엽문(單葉文)이 투조돼 있다.

하부 다리에는 깃이 돌출돼 있으며 곡선으로 말려 올라간 꼬리 아래쪽에도 사선으로 두 갈래 깃을 표현했다. 
머리장식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는데 좌측 새는 머리 위에 삼산(三山) 혹은 삼엽(三葉) 모양 장식이 표현돼 있으며

우측 새는 정수리 뒤쪽으로 봉상(棒狀)의 길쭉한 장식이 표현돼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금동관에 표현된 두 마리의 새는 일제강점기 조사된 평북 운산 용호동 1호분 출토 금동판 4매에 나타난

봉황과 무령왕릉 출토 환두대도(環頭大刀)에 장식된 봉황 문양 등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봉황으로 추정했다.

금동관의 분석을 담당한 대전대학교 이한상 교수는

“말이산 45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국내에서 보고된 관 중 처음 확인되는 형태”라며

“봉황무늬가 대칭을 이루는 구도, 짧은 관테에 촘촘히 구멍을 뚫은 점, 표면과 이면에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된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금동관은 아라가야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향후 아라가야의 금공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라고전했다.

금동관이 출토된 말이산 45호분의 조사를 담당한 (재)두류문화연구원은 이 무덤이 축조된 시기를 5세기 초로 보고했으며,

이 연대관에 기준해 볼 때 말이산고분군 봉황장식 금동관은 현재까지 보고된 가야의 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_브릿지경제 '21.7.1]

 

금동관

45호분은 발굴조사 후 떼를 입힌 표가 나 최근에 발굴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발굴이 계속되어 가야에 대한 많은 역사가 복원되기 바란다.

 

□ 45호분

 

봉분을 가진 대형 나무덧널무덤인 45분은 가야고분에서 봉토분의 출현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고분이다. 

발굴조사 결과 무덤에서는 당시의 선박, 창고, 사슴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보물급 토기들과 갑옷, 투구. 큰 칼, 갑옷, 

말갖춤새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이곳 주민은 고즈넉한 이곳에서 사색을 즐기며 여유로운 휴식을 가질 수 있다.

더러는 역사를 생각하며 고분을 발굴하며 역사학도를 꿈꾸며 실제 역사를 연구할 사학자가 많이 나오길 바란다.

 

 

 

 

 

 

 

 

 

 

 

 

 

 

4~6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다라국을 대표하는 옥전 고분군이다.

가야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추진하려는 가야고분추진단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가야 고분군은 의외로 많은 곳이 실재한다.

가야고분추진단에서는 대성동 고분군, 말이산 아라가야고분군, 옥전 고분군, 지산동 고분군, 송학동 고분군,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등을 조선왕릉이나 경주 역사 유적지구처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올해 가을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이코모스의 현장 실사를 거친 뒤 내년 7월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고 한다.

이번 말이산 가야고분군을 보여 새로운 역사를 알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

 

기록 없는 600년 '가야사'… 죽음의 공간 '무덤'이 역사가 된다

조선왕조 500년 견줄 600년 고대 왕국 '가야' 역사서 없어
땅속에 묻힌 무덤 '고분군' 통해 가야인의 삶 확인
삼국사에 비해 홀대 '가야사'…文 정부 국정과제 채택 이후 연구조사 활발
비지정 유적 발굴 집중… 통영 팔천곡 고분군 등 탔다 하면 성과
경남·경북·전북 7개 고분군 내년 7월 세계유산 여부 결정

 

단편적인 기록 말고는 제대로 된 역사서를 남기지 못했던 고대 왕국 '가야'가 살아나고 있다. 그동안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위주의 고대사 연구에서 소외되고 잊혔던, 경남의 뿌리인 가야가 고대 유물을 통해 기록으로 남겨 역사로 만들어 가고 있다. 역사는 기록에 의해 살아난다.
'가야에 의한, 가야를 위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껏해야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에서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사 교과서조차 가야사는 한 페이지 분량의 작은 소국으로 홀대받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처럼 고대 왕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삼국과 견주어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하고 문화를 영위한 고대국가였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가야의 역사는 약 600년에 이른다. 조선왕조 500년보다 더 긴 역사의 시간을 갖고 있다. 고려도 450년이다. 가야역사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점이다. 

 

"교과서에서 6가야라는 것을 배웁니다.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연맹국가 수준에서 멸망한 나라,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나라라고 배웁니다. 하지만 가야가 존재했던 것은 기원전으로부터 대가야 멸망기까지 562년입니다. 조선왕조 500년이라고 하듯이 가야도 500년 이상 존재했었던 나라입니다." (경남도 가야문화유산과 김수환 학예연구사)

기록이 없다 보니 발굴된 유물을 통해 가야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인 '고분군'에는 가야의 성립과 발전, 소멸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담겼다. 가야사의 역사를 다시 쓰고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땅속에 묻혀 있던 죽음의 공간이 가야사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가야 고분군은 가야 각국의 독창적인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 왕묘의 출현과 고분군의 군집·위계화는 가야 시대의 계층적 구조를, 묘제의 도입과 변화는 사회 구조의 변화를 보여준다. 

 

개별 고분의 입지와 규모, 부장 유물 등을 통해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으며, 부장 유물을 통해 가야인들의 생활양식과 신앙 등을, 출토된 교역품을 통해서는 가야의 대외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전국의 가야 유적 2495곳 가운데 67%인 1669곳이 경남에 있다. 명실상부한 가야사의 중심지다. 그러나 삼국사에 밀려 가야유적은 87곳에 불과하다. 95%는 비지정 유적이다. 아직 조사 연구 기회조차 받지 못한 곳이다. 그런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 보니 개발과 도굴 등으로 사라지거나 훼손된 소중한 유적도 많았다.
이에 경남도는 비지정 유적에 대한 조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국정 과제로 채택한 이후 가속화됐다. 2019년부터 3년째다. 통영 팔천곡 고분군은 통영시 유일의 가야시대 봉토고분군으로, 남해안의 가야 해양세력이 조성한 유적으로 밝혀졌고, 고성 만림산 토성은 소가야 중심세력이 축조한 토성의 실체를 규명한 첫 사례로 기록되는 등 역사의 기록으로 남길 소중한 성과가 나오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파면 나오는 가야사 유물이다.

 

 

"비지정 유적들, 조사 기회를 얻지 못했던 유적들이 1600군데 정도가 되는데, 3년째 발굴을 해 보니 꽤 좋은 성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통영의 팔천곡 고분군에서 소가야문화권의 해양세력들이 만든 무덤군, 봉토군이 확인이 되었고요. 경남 고성에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송악동 고분군이 있습니다. 물자 교환이나 정치적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서 가야시대 때 드나들었던 만이 있었던 곳인데, 산지에서 가야시대 토성이 새롭게 발견됐습니다.
보존 상태도 좋아서 앞으로 아마도 국가문화재까지 지정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지정 유적들 속에서 정말 의미 있는 성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발굴하면 상당히 희열이 있죠. 직접 손으로 흙을 털어나가는 과정은 아마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은 좀 이해하기가 어려운 정도죠."(경남도 가야문화유산과 김수환 학예연구사)

 

'가야의 세계화'를 목표로 가야고분군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경남도와 경북도, 전북도, 문화재청이 손을 잡았다. 지난 2013년 경남과 경북이 처음으로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고령 지산동 등 3개 고분군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했다. 이후 가야고분군의 세계사적 가치와 완전성을 보완하고자 2018년 고성 송학동과 창녕 교동·송현동, 합천 옥전,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등 4곳을 추가해 7곳의 고분군을 하나의 유산으로 통합했다. 

그동안 등재에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지난 1월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가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접수된 데 이어 3월에는 세계유산센터의 완성도 검토를 통과했다. 완성도 검토는 세계유산센터가 접수된 신청서에 대해 형식적인 요건의 만족 여부를 검토하는 과정으로, 완성도 검토가 통과되면 본격적인 심사 절차가 진행된다.
이제 서류심사, 현장심사, 패널 심사만 남았다. 모든 심사가 통과되면 내년 7월에 열릴 예정인 제46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를 결정한다. 경남과 경북, 전북 등은 조만간 7개 고분군의 통합 보존 관리 시스템을 마련하고 유네스코 현장 실사에 대비한 유산과 주변 지역 보존·관리 계획의 점검과 환경 정비를 마칠 계획이다.

세계유산 등재는 신청 유산이 특정 국가나 민족의 유산을 넘어,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중요한 유산이 된다는 의미다. 가야고분군의 국제적 브랜드 가치가 높아져 더 많은 해외 관광객이 경남으로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고, 가야사의 조사·연구·복원 사업에도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우리는 뿌리를 모르고, 역사를 모르고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야라고 하는 것은 500년 이상 우리 경남의 정체성으로, 뿌리로서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거의 막바지입니다. 심사 과정 중에는 주민들의 가야유적에 대한 인식, 이런 것도 계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관심을 주시면 저희가 더 힘을 내서 꼭 성공적인 가야사 연구 복원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경남도 가야문화유산과 김수환 학예연구사)

                                                                                                                                [출처_노컷뉴스, '21.4.3 최호영 기자]

 

 

 

아라가야고분군 탐방을 끝내고 함안군청에 들어가 다음 여정지인 진주시를 검색했다.

진주성과 촉석루 등을 갈 생각으로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후드득 떨어진다.

더위로 차에 공기가 통하도록 창문을 모두 조금씩 열어뒀는데, 비가 들어갈까 봐 얼른 뛰어가 창문을 닫았다.

오전에 통영 수우도 함박산을 산행하고 남은 시간에 동네 한 바퀴 돌았다면 비를 쫄딱 맞을 뻔했다.

수우도에도 소나기가 내렸는지 몰라도 기후가 아열대로 바뀌며 갑작스레 스콜 성 소나기가 자주 발생한다.

소나기는 최근 며칠간 계속된 전국적인 현상으로 심한 곳은 우박까지 내려 농가 피해도 크다고 한다.

수우도를 포기하며 소나기를 피하거나, 소나기를 퍼붓기 전 차문을 닫은 일로 미루어 보면

즐풍은 늘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다.

이후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4일간의 여행을 끝내며 갓고을센터로 귀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