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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서울시

국립 서울현충원의 물든 단풍

by 즐풍 2021. 11. 6.

2021_159

 

 

2021.10.29 (금)  13:40~16:00  2시간 20분 탐방

 

 

1955년 국군묘지로 출발한 국립 서울현충원은 묘지란 생각에 관심 밖이었다.

이 묘역은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고, 2006.1.30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개칭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묘지로 국가에서 국가에서 관리함으로써 격에 맞는 많은 묘역이 형성되었다.

독립유공자 묘역, 장병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장군 묘역, 외국인 묘역, 경찰관 묘역, 국가원수 등의 묘역은

근현대사가 살아있는 교육의 현장이자 시민의 안식처로 변한 지 오래되었다.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계절별 멋진 포스팅에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다.

오전에 강남의 선정릉 탐방에 이어 오후엔 이곳의 발자취를 둘러보게 된다.

 

 

□ 국립 서울현충원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국지적 도발과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 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서울 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ㆍ25 전쟁으로 묘지 설치 문제는 중단되었다.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

봉안하여 육군 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관리하였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육군에서는 다시 육군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주관하에 묘지 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한 결과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 대안 일대를 육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추진하던 중, 군 고위층에서 현지를 답사하여 검토한 결과 지역적으로 편재되어 있고,

침수의 우려가 많을 것을 고려하여 타 지역으로 후보지를 재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져

일단 중지하게 되었다.

 

1952년 5월 6일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 설치 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를 설치하게 되면 타군에서도 각기 군묘지를 만들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고,

영현 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육군묘지 설치 문제는

일단 보류하도록 지시하고, 3군 종합 묘지 설치를 추진하되, 묘지의 명칭은 국군묘지로 칭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2년 5월 26일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 답사반을 편성하고,

1952년 11월 3일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2년 11월부터 1953년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답사 결과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1953년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1954년 3월 1일 정지공사를 착공한 이래 3년에 걸쳐 묘역 238,017㎡ 을 조성하고,

그 후 연차적으로 1968년 말까지 광장 99,174㎡, 임야 912,400㎡ 및 공원행정지역 178,513㎡을 조성하였다.

 

1955년 7월 15일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년 4월 13일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어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고 덧붙여 순국선열 및 국가 유공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6.25 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장병 처리를 위해 지금까지 군인 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군묘지 안장 업무가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환 삶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어 그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존, 계승시킬 수 있는 겨레의 성역으로써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05년 7월 29일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현충원 입구에 있는 「월남참전기념비」이다.

 

 

□ 충성 분수대

 

충성 분수대는 국립서울현충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시설물로,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분수대는 국가의 자유·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밑거름이 된 영령들의 위훈과 그 정신을 상징하며

1976년 11월 5일 건립되었다.

화강암 좌대는 상·중·하 3단으로 되어 있고, 그 밑에는 두 마리의 청룡 동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단의 태극기를 받쳐 들고 한 손으로 횃불과 월계수를 들고 있는 남녀상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국가를 상징하고,

중단의 남녀노소상은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애국·애족하는 국민을 상징한다.

하단의 육·해·공군·해병대·예비군 등 6인의 동상은 국가와 국민의 수호를 위하여 충성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위훈과 정신을 상징한다.

이 분수대는 높이 13m, 원형 직경 31.2m에 60개의 노즐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제법 물이 잘 든 단풍이나 전체적으로는 아직 1주일 정도 빠르다.

 

 

□ 장병 묘역

장병 묘역에는 총 53개의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대령 이하의 장교, 사병, 군무원 등이 안장되어 있다.
실제 56개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나 이 중 3개 묘역(5, 8, 9 묘역)은 주로 경찰관이 안장되어 있어

경찰관 묘역으로 구분하고 나머지 53개 묘역을 장병 묘역으로 설명하고 있다.
6·25 전쟁 6·25 전쟁 이전 무장공비 및 빨치산 토벌, 여순사건 전사자 등과 6·25 전쟁 전사자, 월남전쟁 전사자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최초 안장자는 1957년 4월 2일 11번 묘역에 안장된 육군 하사 강덕수 등 192위이다.
이 묘역에는 6·25 전쟁 영웅인 백마고지 3 총사, 월남전쟁 파병훈련 중 부하를 구하고 순직한 강재구 소령,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으로 공군 조종사가 된 박두원 대위, 낙하훈련 중 부하를 구한 이원 등 상사,

아버지 박명렬 소령과 같은 곳에 안장된 박인철 대위, 국립묘지 묘비 중 유일하게 이름 없는 묘비(김수영 육군 소위),

종군기자로 월남전쟁에서 사망한 유일한 한국인 기자인 백광남 기자, 6·25 전쟁 당시 미군 24 사단장 월리엄 F. 딘 장군

구출작전에 자원했다가 순직한 철도기관사 김재현, 육탄 10 용사 등이 안장되어 있다.

                                                                                           [출처_국립 서울현충원]

 

장병 묘역은 창군 이래 여수·순천 사건, 6·25 전쟁, 대간첩작전, 베트남(월남) 전쟁 등에서 한 몸을 바쳐 싸우다

산화한 분들이 안장된 곳이며,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역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곳에는 사병(부사관 포함), 대령 이하 장교, 군무원 및 종군자, 재일학도의용군, 파월장병, 육탄 10 용사 등

총 5만 2,936위가 안장되어 있다. (2020년 12월 말 기준)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생사고락을 함께한 병사들 틈에 채명신 장군도 안장되어 있다.

 

 

 

 

□ 경찰관 묘역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장병 묘역 중 5, 8, 9번 묘역에 전사·순직한 경찰관을 안장함으로써 경찰관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6·25 전쟁 이전 전사자는 1948년 10월 20일 여수·순천 사건 당시 전사한 한운경 총장 등 69위이며,

6·25 전쟁 중 전사자는 1951년 9월 19일 전남 구례 토벌작전 중 전사한 김기옥 경위 등 439위,

6·25 전쟁 이후 전사자는 1975년 6월 28일 전사한 전투경찰대 소속 이무석 경사 등 304위이다.

 

경찰관으로 최초 안장자는 무장간첩과 교전 중 전사한 계용훈 경위와 진덕수 경사이며,

1965년 7월 21일 5번 묘역 및 8번 묘역에 각각 안장되었다.

또한 6·25 전쟁 당시 강원 영월 화력발전소를 사수하다 전사한 김해수 경감,

전남 곡성 태안사 전투에서 전사한 주순철 경감 등이 안장되어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이들 경찰관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찰관 묘역 위쪽에 경찰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의 탑신 중앙으로부터 양쪽으로 두 팔을 벌린 듯한 날개는 민주경찰의 따뜻한 보호를 나타내고,

탑신 하단에는 경찰 활동의 상징인 신, 의, 용의 3인 상을 세워 경찰의 충성과 봉사정신을 나타내었다.
탑 좌측에는 애민상, 우측에는 호국상을 새겼으며 양쪽 날개 벽면에는 조국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 온

경찰의 위대한 업적을 조각으로 부각하였다.

또한, 입구 양측에는 전설의 수호신인 호랑이상을 세워 영령들을 보호하게 하였고,

탑신 내부에는 위패를 모실 수 있는 봉안실을 두었다.

이 탑은 바닥면적 112㎡, 중앙 화강석 탑 높이 13m, 3인 상 높이 3.5m, 좌우 동상 높이 3m, 벽면 폭 3.5m이고,

탑 하단 전면에는 이은상 선생이 지은 헌시가 새겨져 있으며 탑신 중앙에 ‘경찰 충혼탑’이란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휘호 한 것이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 

 

경찰도 군인 못지않게 많은 무장간첩이나 공비들과 교전하며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그들의 영온에도 평화가 깃드시길 기원한다.

 

국립 서울 현충원 관리동 등의 건물

 

 

□ 국가유공자 묘역

제1 유공자 묘역에는 1983년 10월 9일 대통령의 버마(現 미얀마) 방문을 수행하여 아웅산 묘소에서 참배행사를 위해

정부요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중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의 테러에 의해 순국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17위를 비롯하여 진의종 국무총리,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의 시조와

국토순례 기행문,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쓴 노산 이은상 시인,

한국 근대사에 관한 집중적 연구를 통해 학계와 문화계에 큰 공헌한 사학자이신 이선근 박사 등 40위가 모셔져 있다.

 

제2 유공자 묘역에는 일제 강점기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광복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 차장 겸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건국 후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물산장려운동 전개와 조선민 주장 창당 등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김일성의 공산당에 맞서 노력한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등 14위의 유공자가 안장되어 있다.

 

제3 유공자 묘역에는 6·25 전쟁 당시 베티고지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김만술 대위, 1968년 청와대를 폭파할 목적으로

잠입한 무장간첩단(일명 '김신조 사건')을 격퇴하다가 전사한 최규식 경무관(당시 종로경찰서장), 북한의 항공기 납치

기도를 분쇄하고 순직한 대한항공 전명세 기장, 포스코를 건립하여 '제철보국'의 이상을 실현한 박태준 총리,

한국 경제의 태동기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하여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다진 남덕우 총리 등

총 16위의 유공자가 안장되어 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 위쪽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이 설치되어 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수많은 지사들이 이름도 없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하였다.
광복회에서 수많은 무명지사들의 위훈을 기리고 넋을 위호 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1년 여의 공사 끝에 2002년 5월 15일 준공하고 2002년 5월 17일 제막식을 하였다.
이 탑은 부지 1,320㎡에 가로 윗변이 25m, 아래 변이 24m, 세로 16m의 기단을 5단의 계단으로 만들고

탑의 좌대 부분은 반원의 형상으로 삼태극을 만들어 하늘을 나타내고 그곳에 꺼지지 않는 불장명등을 설치했다.

기단은 좌청룡 우백호의 부조벽을 선익으로 만들고 무명용사의 혼을 지키는 수호상을 기단 양쪽에 세웠다.
중앙 명당에는 『독립군의 숙의』라 명명된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3개의 주탑이 세워져 있고

각 탑의 높이는 1년 12달을 나타내는 12m를 기본으로 하여 시각적으로 율동적 변화를 가진 16m,

그리고 12m와 16m의 중간인 14m로 하여 세월의 흐름을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대통령 묘소

박정희 대통령 묘역의 면적은 3,636m²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새마을운동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빛나는 도약을 이루어 냈다.

또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박정의 대통령 묘역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서거하여 국민장을 치르고

국립서울현충원에 먼저 안장되면서 조성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서울에서 서거, 11월 3일 국장으로 치른 후 안장되었다.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저격으로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10·26 사태가 지난 지 며칠 안 됐다고 그때 헌화한 꽃이 그대로 남아있다.

역대 대통령 묘역엔 지킴이가 두 명씩 배치되어 방문객을 맞고 있다.

 

 

 

장군 묘역 둘레의 단풍

 

 

□ 장군 묘역

 

장군 묘역에는 광복 이후 국군의 창설과 발전은 물론 6·25 전쟁, 베트남전(월남전), 대간첩 작전 등에서

전공을 세운 군 장성들이 안장되어 있다.

장군 제1 묘역, 장군 제2 묘역, 장군 제3 묘역으로 총면적 22,314m² 조성되어 있으며

2020년 12월 말 현재 육군 265위, 해군 51위, 공군 39위 등 총 355위가 모셔져 있다.

 

장군 제1 묘역에는 부대 순시 중 헬기사고로 추락하는 순간에도 민가 피해를 막도록 지시하고 순직한

이현부 육군 준장,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최용덕 공군 준장,

대한민국 전투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머플러를 최초로 착용한 김영환 공군 준장, 제2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박옥규 해군 중장, 세계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베트남전(월남전)에서 전사한 김정환, 김강섭, 안도열 육군 준장 등

288위가 모셔져 있다.

 

장군 제2 묘역에는 6·25 전쟁 시 9 사단장으로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 육군대장,

1976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임충식 육군 대장, 제12대 합참의장을 역임한 심흥선 육군 대장,

해군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 해군 중장 등 6위가 모셔져 있다.

 

장군 제3 묘역에는 2군 사령관을 역임한 김홍환 육군대장, 합참의장을 역임한 한신 육군대장,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일권 육군대장 등 61위가 모셔져 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

 

 

 

 

 

□  김대중 대통령 묘소

김대중 대통령 묘역은 514m²로,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인 김대중 대통령은 여야 간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고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을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끌어내고, 같은 해 12월 민주화와 인권 신장 및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서울에서 서거하였으며, 국장으로 8월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이희호 여사

 

1922년 9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한 이희호 여사는 우리나라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고,

1962년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한 후 동지와 동반자로서 민주주의, 인권,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희호 여사는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2019년 6월 10일 서거하여 6월 14일 사회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 대통령 헌시비

 

정면

 

당신은 우리입니다
당신은 민주주의입니다.
어둠의 날들
몰아치는 눈보라 견디고
피어나는 의지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의 마루턱
몇 번이나 그 마루턱 넘어
다시 일어나는
목숨의 승리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우리입니다 당신은 민족 통일입니다.
미움의 세월
서로 겨눈 총부리 거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그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것
마구 달려오는
하나의 산천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평화입니다
우리입니다당신은 이제 세계입니다.
외딴섬 아기
자라나서 겨레의 지도자
겨레 밖의 교사입니다.
당신의 고난
당신의 오랜 꿈
지구의 방방곡곡 떠돌아
당신의 이름은
세계의 이름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의 내일입니다
이제 가소서
길고 긴 서사시
두고 가소서

 

후면

 

나는 내 일생이 고난에 찬 일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불행한 일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일생이 참으로 값있는 일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많이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르게 살려고, 국민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려고,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 세계의 모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세계의 모든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해온 일생이었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김대중

 

 

 

 

□ 이승만 대통령 묘소

이승만 대통령의 묘역은 면적 1,653m²로 대통령 내외의 합장 봉분, 묘비와 헌시비, 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하여 독립협회 참여, 매일신문 창간, 상해 임시정부 활동,

구미위원회 조직 등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에 투신하여 일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해

제헌의회 초대의장을 거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정부 수립 및 반공사상 확립 등 많은 공헌을 남겼으나 3.15 부정선거로 하야한 후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였으며, 7월 27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 초대 대통령 묘역 앞 광장

 

장병 묘역의 단풍 통로

 

묘역은 전부 줄을 맞춰 동일한 색상의 인조 꽃이 진열되어 있다.

그 와중에 이 비석 옆에 오렌지 색 꽃이 놓여 화사한 풍경을 보여준다.

 

장병 묘역의 잘 정렬된 각과 선이 살아 있다.

 

□ 육사 7기 특별 동기생 추모탑

 

이 탑은 6·25 전쟁 중 구국전선에 뛰어들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육사 7기 특별 동기생 전몰용사의 숭고한 넋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고자 생존한 동기생들이 1963년 8월 17일 건립되었다. 1986년 10월 12일 개축하면서 탑 안에 동기생들의 유품과 기념품, 사진 등을 함께 봉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탑은 학도의용군 무명용사 탑 뒤편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오석 기단 (높이 1.3m) 위에 화강석 좌대(높이 0.6m)를 쌓고 좌대 위로 철근 콘크리트에 화강석 판석을 붙인 탑신(높이 6m)을 세운 후 탑신 꼭대기에 원형의 고리를 밟고 양팔을 벌린 채 늠름하게 서 있는 군인 동상(직경 3m)이 세워져 있다.

탑 하단 전면에는 6·25 전쟁 때 사용한 철모가 놓여 있고, 탑 후면에는 육사 7기 특별 동기생 203명의 명단과 헌시가 새겨져 있다. 헌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랑캐 무찌르며 돌진하던 그대들
이 나라는 건져 놓고 저는 정작 못 돌아오고
충혼이 한 줌의 흙으로 이 기슭에 누었나
그대들 푸른 넋이 가슴마다 살아 있네.
못 이룬 그 바람을 오늘도 되새기며
아쉽고 그리운 정으로 돌 하나를 세운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 1950년도 현지 임관 전사자 추모비 

 

국군이 창설되고 초기에 자원입대하여 복무 중이던 군인들이 6·25 전쟁이 벌어지자 많은 이가 현지 임관되었다.

이들은 6·25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나라를 지켜 냈으나 그들 가운데 377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순직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이들의 값진 희생이 잊혀 가자 1950년 현지 임관 생존 회원들은 동기들을 영원히 추모하고자

국립서울현충원 내에 추모비를 세우기로 하고 성금을 모금하는 등 준비를 해 나갔다.

마침내 1971년 9월 1일 기념비 건립에 착수하여 1971년 10월 20일 준공하고 '현지 임관 전사자 추념비'라

이름 지었으며, 1991년 9월 26일 개축하였다. 비는 높이 7m의 탑 2개로 구성되었다.

아래쪽 기단은 폭이 6m, 바닥 면적은 21.5㎡이다.

이 비는 학도의용군 무명용사 탑 좌측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비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임들은 나라의 부름을 입어 창군하고
순국으로 침략을 막아 청사에 그 충의를 새기니
오늘은 겨레의 번영 내일은 조국의 통일을 보리라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 재일학도 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는 장병 묘역의 16번 묘역(재일학도의용군 묘역) 앞쪽에 설치되어 있다.

1963년 11월 21일 일본 도쿄 다이교지(大行寺)에 안치되어 있단 50위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한 후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에서 재일학도의용군의 고귀한 희생을 추모하고 그들의 넋을 추념하고자

1973년 6월 6일 건립하였다.

이후 1990년 12월 15일 개축하였다가 2009년 5월 15일 112㎡의 면적에 높이 170cm, 폭 250cm 규모로

재보수 건립되었다. (기존의 위령비는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에서 보존)

비의 뒷면에는 이곳에 안장된 재일학도의용군 50위와 장교 2위(17번 묘역 박두원 공군 대위,

15번 묘역 정달문 육군 중위), 위패봉안관에 봉안된 90위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아래와 같은 헌시가 새겨져 있다.

내 나라 구하려고 피를 뿌리신 젊은이들
역사의 책장 위에 꽃수를 놓으셨네
조국의 포근한 흙속에 웃으며 잠드옵소서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 10 용사 현충비

 

장병 묘역의 6번 묘역 제일 앞줄에 안장되어 있는 육탄 10 용사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된 추모비이다.

6·25 전쟁 당시 사단장인 김석원 장군이 앞장서고 개성 출신 독지가와 일반 유지들이

'육탄 10 용사 현충비 건립위원회'를 조직한 후 국방부의 지원을 얻어 건립한 비이다.

1955년 3월 중순부터 기초공사에 들어가 4월 중순에 준공하였으며, 5월 4일 전몰 일자에 맞추어 제막식을 가졌다.

이 비는 최초 배롱길 위(솔내길 끝)에 세워졌으나 '육탄 10 용사 기념사업회'의 이전 건의를 받아들여 약

1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2013년 9월 5일 육탄 10 용사가 잠들어 있는 6번 묘역 앞으로 이전하였다.

비의 높이는 6m, 폭은 상단 0.5m, 하단 2.3m, 바닥면적 89.8㎡이다. 하단의 기단석 위에 5층의 탑을 쌓은 듯한

형상으로 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제일 하단에는 비문, 그 위에는 ‘THE TEN BRAVE WARRIORS’라는 영문표기, 그 위에는 10 용사의 계급과 성명,

그리고 제일 상단에는 육탄 10 용사 현충비라는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

비의 전면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해방 이후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던 중 단기 四二八二년에 이르러서는 개성 서북방

송악 고지에 공산 괴뢰군이 불법 침입하여 방위가 불리하고 개성이 위태로우매 동년 五월 四일 제一사단

제十一연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九명의 용사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 참호 속에 뛰어들어 육탄 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지니

멸공 전사상에 이룬 공과 그 용맹이 널리 세계에 펴지다. 광음이 흘러도 잊음 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자,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조국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라 十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 현충문

 

현충문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상징하는 현충탑의 출입문으로 1968년 10월 1일 착공하여 1969년 4월 30일 준공하였다.

건축양식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사당전 및 극락전을 본뜬 순 한국식이다.

그러나 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로만 축조하였다.

이 문의 좌측에는 현충탑 참배 시 귀빈들이 대기할 수 있는 귀빈실이 있고,

우측에는 직원이 상주하여 현충탑 참배 안내 및 각종 방송을 실시하는 안내실이 있다.

그동안 귀빈실과 안내실이 협소하여 국빈 방문 시 참배행사가 불편했던 것을

2010년 약 5개월에 걸쳐 개보수 공사로 전체 면적 375.15㎡, 귀빈실 86.94㎡,

안내실 75.6㎡의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다.

2020년에는 약 3개월의 개보수 공사로 여성 편의시설을 설치해 국격에 걸맞은 경건하고 엄숙한 참배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현충문 입구 양쪽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상이 건립되어 있다. 이 호상(虎像)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두 마리의 호랑이가 지켜줄 것을 기원하는 뜻으로 건립한 것이다.

화강석 좌대(높이 143 ㎝) 위에 웅크리고 앉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호상은 높이 125㎝, 폭 110㎝, 길이 230㎝이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현충지 부근엔 이제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이란 이름이 붙은 일종의 국립묘지이지만, 이젠 서울을 대표하는 공원인 셈이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방문하면 조국을 위해 잠드신 분들의 평안을 바라며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다.

 

 

 

□ 현충원의 지세

국립서울현충원은 북한산, 남산, 공작봉,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푸른 동맥을 잇는 공작봉(孔雀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공작봉은 서울 강남에서 드물게 푸르른 녹지를 가진 현충원을 감싸 안은 봉우리로 양쪽으로 뻗어내려

불끈 솟아올랐다가는 엎드리는 듯 줄기와 봉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늠름한 군사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는 모양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

사방의 산은 군인들이 모여 아침 조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지하에는 여러 갈래 물줄기가 교류하여

생기가 넘치는 명당자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으로 공작 장익형(孔雀張翼型)이면서,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 대좌형(將軍對座形)이다.

즉,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다정하게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모양이다.

한강 물은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들어 마치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러 내려가고 있다.

이와 같이 국립묘지가 위치한 공작봉(孔雀峰)은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인 갈형취상(渴形取象)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 현충지

 

1985년 10월 30일 준공된 현충지는 당초 이곳에 있던 웅덩이를 원래의 형태를 살려 넓이와 깊이를 조정하여

조성한 연못으로,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가장자리는 자연석으로 꾸며 경관미를 더해 주었다.

주변 사방에는 잔디와 각종 수목이 식재되어 있고 정자 3개 동, 벤치 각종 휴게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연못 안에는 비단잉어 등 물고기가 있어 경내에서 가장 수려하고 안락한 휴식처이다.

그리고 이 연못은 전 묘역 잔디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용수원이 되기도 한다.

 

□ 충혼 승천상

 

 

충혼 승천상은 국립서울현충원 측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에 있는 상으로, 현충지 근처에 있다.

이 상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위훈을 기리고 있으며,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이 유한한 인생을 무한한 영광과 안식에 이르게 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1992년 10월 10일 남산 미술원장 이일영 씨에 의해 제작·준공된 충혼 승천상은

바닥 화강석 원둘레석의 직경이 13m, 높이 15m로 된 동상이다.    [출처_국립서울현충원]

 

 

 

 

 

두 시간 조금 넘는 짧은 시간에 탐방한 국립서울현충원이다.

오늘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희생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분들이 잠드신 이곳을 방문하며 조국을 위해 새로운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