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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서울시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효령대군을 모신 청권사

by 즐풍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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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21. (화)  오후에 잠시 탐방

 

 

서울에 올 일이 있어 모처럼 우면산 등산을 하기 위해 방배역에 내리니 청권사가 눈에 띈다.

한글만 보면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찰 이름처럼 보여 궁금증을 유발한다.

청권사(淸權祠)의 祠 자를 보고 사찰이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 있다.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의 이름인 청권사는 50만 후손들의 정신적 요람이다.

그 후손들은 효령대군 몇 대손이라고 자랑하니 효령대군은 중시조로 추앙받는 셈이다. 

 

 

ㅁ 청권사(淸權祠)

청권사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모시는 사당(祠堂)의 이름이고, 50만 후손들의 종친회(宗親會) 명칭이며, 

효령대군의 위덕과 사상을 계승ㆍ선양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려는 사단법인(社團法人)의 명칭이기도 하다.

‘청권(淸權)’의 뜻은 옛날 중국 주(周) 나라의 우중(虞仲) 왕자가 아버지 태왕(太王)의 뜻을 헤아려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칭찬하면서 공자(孔子)가 청권이라고 하였는데,

효령대군께서 아버지이신 태종(太宗) 대왕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세종대왕께서는 나의 형이 곧 청권이라고 칭송하셨고,

정조(正祖) 대왕께서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하신 데서 연유한다.

효령대군의 사당과 묘소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로에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령대군의 생애와 업적과 사상을 연구하면,

5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대립과 갈등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출처_청권사 홈피)


ㅁ 효령대군 이보 묘역 (孝寧大君 李補 墓域)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1396∼1486)의 사당과 묘소이다.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補), 자는 선숙(善叔),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 읽기와 활쏘기를 좋아했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세조 10년(1464)에 원각사 창건을 감독하였고, 불교에 독실하여 승려들을 모아 불경을 강론하기도 했다.
사당에는 효령대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영조·정조 때에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출처_문화재청)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補), 동생 세종대왕의 이름은 도(祹)로 두 분 다 외자다.

이렇게 이름이 외자인 것은 전제군주 시대에는 왕의 이름을 백성 이름에 쓸 수 없는

피휘(避諱)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효령대군이나 세종대왕의 이름이 외자인 것은 백성의 고충을 줄이려 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왕의 이름 대부분이 어려운 것도 그만큼 쓸 기회를 안 주려고 한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하며 補자의 뜻을 찾아보니

곤룡포(衮龍袍)의 양어깨와 앞뒤에 다는 네 개의 수놓은 물건(物件)

관직(官職)에 임명(任命)한다는 뜻이 있다.

 

곤룡포는 왕이 집무시에 입근 정복이므로 왕자인 효령대군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맏형인 양녕대군이 세자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왕세자 자리를 폐위하자

효령대군은 아우 세종이 총명하고 덕이 많아 왕이 더 어울릴 것으로 생각했는지

여러 기행을 많이 하며 결국 왕위를 세종대왕에게 사양했다.

 

 

외삼문의 형식을 띤 정문을 통해 청권사에 들어선다.

 

천원지방을 표방한 연못 

 

모련재

 

악산 연주암에 보존되어 있는 효령대군 영정

 

 

ㅁ 효령대군 생애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조선 3대 왕인 태종대왕과 여흥 민씨인 원경왕후의 둘째로 1396년(태조 5)에 태어나셨으며,

휘(諱: 돌아간 높은 어른의 살았을 때의 이름)는 보(補), 자(字:본 이름 이외에 부르는 이름)는 선숙(善叔),

호(號)는 연강(蓮江)이 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온화 문명하고 효제충신(孝悌忠臣)의 자질을 갖추었고,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2세에 효령군으로 봉군 되시고, 좌찬성 정역공의 따님 이신 해주정 씨와 혼인하셨으며,

17세에 효령대군으로 진봉 되셨다.

효성이 지극하시어 부왕(태종대왕)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고,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이 성덕이 있음을 아시고 학문과 재덕을 숨기시면서 왕위를 겸손하게 사양하셨다.

조선왕조 개국 초기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입각한 왕권확립과 종교변혁기에 동요하는 백성들의 민심이반을

총화로 이끌기 위해 유ㆍ불 조화론을 주창하셨고, 나라의 안정과 왕정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시며,

불서의 국역과 사찰의 증개축 및 법기 조성 등의 불사와 보국안민과 태평성대를 위하는 위업에 전념하셨다.

우리나라 국보 2호인 ‘탑골공원의 10층석탑’의 건립과 보물 2호인 ‘보신각종’의 주조를 직접 감독하셨다.

옛 흥복사 터에 원각사를 짓게 되자 그 역사를 주관하셨으며, 연주암(관악산), 무위사(월출산), 백련사(만덕산),

회암사(양주) 등의 많은 사찰을 중건ㆍ중수하셨다.

문장에도 뛰어나 연화경(蓮華經),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등의 우리말 번역을 비롯하여

많은 호국불사를 주장하시고 불교발전에 지대하신 공적을 또한 남기셨다.

대군께서는 왕자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공명과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초탈하신 삶으로 한평생 충(忠),

효(孝), 덕(德), 우애(友愛), 겸손(謙遜), 검소(儉素), 화목(和睦) 등을 몸소 실천하시며 천수(天壽)를 누리셨다.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존경과 예우를 받으시며 사시다가,

1486년(성종 17년) 5월 11일 91세를 일기로 하세(下世)하셨으며, 시호(諡號)는 정효(靖孝) 공이시다.

1737년 영조대왕께서 묘하에 사당을 세우게 하시고, 1789년 정조대왕께 서는 사당의 현판을 하사하셨으며, 

1865년(고종 2년) 종묘(宗廟) 공신당(功臣堂)의 세종대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셨다.

                                                                                                                   (출처_청권사 홈피 편집)

 

 

 

 

효령대군 아래에는 한성판관을 지냈던 이사건(李思騫)과 부인 청송 심씨의 합장 묘가 있다.

 

 

 

 

 

 

효령대군의 묘역으로 올라왔다.

 

좌우로 문인석이 보인다.

 

 

 

아래쪽은 이사건의 묘지와 청권사가 보인다.

 

왼쪽 효령대군의 묘

 

오른쪽은 효령대군의 배위인 해주 정씨의 묘

 

 

 

 

 

뒤에서 보는 효령대군 묘역

 

 

 

내려가는 계단 

 

 

 

 

 

 

 

 

 

청권사 가는 길 

 

 

 

 

 

 

 

 

 

 

 

청권사는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다.

 

 

효령대군의 묘역인 청권사를 둘러보며 효령대군이 문중의 한 파를 형성한 것을 알았다.

그를 중시조로 한 후손이 50여 만 명에 이르고 청권사란 월간지를 읽으며 대학 재학 중인 

많은 후손이 장학금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종중에 재산이 많아 빌딩을 임대한 수익금으로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좋은 가문의 후손들은 60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혜택을 보는 왕가의 자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