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_56
2021.5.21. (금) 오전에 한 시간 탐방
숙소가 있는 여수에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통영시에도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뿐만 아니라남해안 곳곳이 임진왜란 당시 해상전투의 격전지였다.
서른세 번 싸워 모두 이겼으니 남해안은 온통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였다.
특히 여수는 거북선 세 척을 만든 곳이고,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그렇기에 여수와 통영에 공교롭게도 이순신 장군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남해안 곳곳에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들어간 공원은 여러 군데 조회가 된다.
그만큼 우리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분으로 우리나라가 존속하는 한 존경과 추앙을 받을 영웅이시다.
1부에 이어 2부 역시 삼도수군 통제영에 대한 포스팅을 계속한다.
□ 의두헌
순종 5년(1805) 제153대 류호원 통제사 때 세운 작은 정자
□ 황간발
대나무 숲이 있었다는 곳의 작은 정자
□ 육의정
정조 18년(1794) 제148대 이득제 통제사 때 세운 작은 정자
육의전 내 편액에 걸린 한자
위 편액의 해석
의두헌과 육의 정
□ 통영의 명품
통영(統營)은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던 곳이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閑山島)에서 3년 6개월을 근무하였고,
조선과 일본 수군과의 대규모 전면전이었던 한산대첩도 바로 이곳에서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인 1604년에 통제영 건물들이 통영의 주산인 여황산 자락에 세워졌다.
그 중심건물인 세병관(洗兵館)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통제영 부속건물 가운데는 십이공방(十二工房)도 있었다.
여러 가지 공산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십이공방은 통영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 필요한 여러 물품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조달하기 위한 군수품 공장이었다.
선자방(扇子房), 입자방(笠子房), 총방(?房), 상자방(箱子房), 화원방(畵員房), 소목방(小木房), 야장방(冶匠房), 두석방(豆錫房),
동개방(筒箇房), 칠방(漆房), 화자방(靴子房), 안자방(鞍子房), 은방(銀房) 등등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공방에서 부채, 갓, 탕건, 동구리, 그림, 목가구, 장석, 화살 및 화살통, 나전칠기, 말안장, 금은장신구금은 장신구,신발 등을 만들어 내었다.
철저한 분업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나전칠기를 하나 만드는 과정을 보면 제일 먼저 소목방에서 백골(나무 뼈대)을 만들고, 하칠방으로 옮겨 가서 일차 옻칠을 한다.
그다음에는 나전(전복껍데기)을 붙이고, 상칠방에 가서 다시 옻칠을 하고, 두석방에 가서 장석을 단다.
분업화는 전문화를 의미하고, 전문화는 그 품질이 그만큼 고급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통제영 수군들을위한 군수품 용도였지만,
그 뒤에 영조·정조 대에 와서는 왕실과 일반에게 공급되는 민수품(民需品) 용도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 품질이 전국적으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앞에 통영 자가 들어가는 통영탕건통영 탕건, 통영갓,통영갓 소목, 통영 나전칠기 통영 나전칠기,
통영 장석등은 조선시대 값비싼 최고의 명품으로 통하였다.
이 통영명품의 명맥이 근대에까지 이어지면서 통영은 돈과 물류의 집산지가 되었다.
변두리 남쪽 해안가인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박경리를 비롯한 많은 문화예술인이 배출될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소급해 올라가면 통영명품의 계기는이순신과 통제영이 만든 셈이다.
- 2008. 4. 8일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
이제부터 12 공방을 차례로 둘러보게 된다.
□ 선자방
단오절에 임금이 하사하던 부채를 제작하였던 공방으로 부채의 형태에 따라 단선과 접선,
그리고 별건으로 구분하였다.
1894년 「통영지」에 진공품(진기한 공물) 중 부채가 800개로 기록되어 있어
통영에서 대규모로 부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총방·입자방
총방: 말총을 엮어 망건, 탕건, 유건 등을 만들던 곳
입자방: 흑립이나 벙거지, 사수가, 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
갓을 만드는 사진
총방·입자방
□ 페부방
자개를 붙여 나전 제품을 만들던 곳
□ 상자방
버들가지 등을 엮어 상자를 만들던 곳이나 현재는 염장(대발) 공방으로 사용한다.
통제영 12 공방은공방은 임진왜란 당시 각종 군수품을 자체 생산하여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각종 공방이 밀집하여
상호 분업 및 협업체계를 이루어 18세기에는 지방 공방중 규모가 가장 컸었다.
이러한 명맥은 현재까지 고스란히 이어져 통영은 서울을 제외한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의 국가무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통영관광개발공사 김영균 사장은
“통제영 12 공방은공방은 통영 문화예술의 근원으로 박경리, 윤이상 등 위대한 작가들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이다.
이번 기회에 통제영을 방문하는 관람객이 우리 전통 기술의 우수성과 역사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고 밝혔다.
[출처_통영관광개발공사]
왼쪽 상자방, 오른쪽 총방·입자방 같이 사용
□ 석수조
물을 저장하여 자개 등을 갈고닦으며 등이 작업을 하던 곳
□ 화원방
각종 지도 및 군사적 목적의 의장용 장식화를 그렸던 곳
□ 야방장
쇠를 녹여 화살촉, 칼 등의 병기 및 각종 철물을 주도하던 곳이다.
19세기 초에는 연하장, 도자랑 등으로 구성된 연하장이 별도로 있었다.
□ 잉번청
숙종 14년(1688) 제66대 이세선 통제사가 건립하였으며, 통제영 공방의 건물이나 물건 등을 지키는 사람이 근무하던 곳이다.
잉번청
잉번청
세병관 뒷모습
□ 공내헌
공방을 관리하던 공감의 집무실
백화당
□ 백화당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 사신 등의 손님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 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 염탐 같은 업무도 맡았으며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다.
세병관
□ 삼도수군 고지도
통영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 문화동, 태평동 일원에 있었던 수군 통제 사영으로 조선 후기 수군의 총본영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이끌고 왜구를 물리쳐 통제사를 제수받은 것이 시초이다.
초대 통제사였던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하였는데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전란 후 여러 곳을 옮겨 다녔는데, 거제도 오아포, 고성 춘원포, 등지를 거치다가
1601년 체찰사 이덕형의 장계로 1604년 통제사 이경준의 지휘 아래 고상현 두룡포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678년(선조 37) 윤천뢰 통제사 때에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였다.
이 지도는 1872년 제작된 경상도 지도첩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삼천진지도와 함께 따로 분리되어 있던 것이지만,
표현 양식, 내용 등을 볼 때 1872년 군현지도 제작사업 때 만들어진 것이다.
통영을 중심으로 주변의 거제·고성·사천·남해에 이르는 지역을 회화식으로 그렸다.
특히 조감도 식의 방법을 사용하여 지역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밀하게 그린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교한 솜씨로 보아 전문 화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통영에서는 화사 군관이 한 사람 배치되어 있었는데, 지도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도의 내용을 보면 우선 산천, 바다, 도서 들의 자연적인 지형을 산수화풍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조선 후기 회화식 지도에서 나타나는 방위의 혼란을 이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즉, 산의 봉우리를 지도 상단인 북쪽을 향하게 그리고 조감도 식으로 위에서 사선적으로 투시함으로써 일관된 방위각을 유지한다.
이와 더불어 축적에 있어서 중심부와 주변부에 차별적인 축적을 적용함으로써 중심 공간인 통영이 상당히 부각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도 강한 집중력을 유발한다.
통제사영이 있는 성곽 내부 공간은 다양한 관아 건물들을 상세히 그렸는데, 객사인 세병관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 안팎에는 지붕 모양을 빼곡하게 그려 넣음으로써 촌락의 밀도를 표현한다.
바다의 포구에는 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각종 전선과 거북선의 모습도 보이고, 미전이 들어선 해안에는 범선도 그려져 있다.
이 시기 통영이 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상업활동의 요지로 부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파수가 있는 해군에는 축문과 같은 것이 그려진 점도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통영의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잘 보여주는 지도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결승당
우후(통제사의 참모)가 생활(숙소)하던 곳
□ 응수헌
중영 안에 있었던 일명 응수전이라고도 하며, 정조 3년(1779) 제137대 서유대 통제사가 건립했다.
□ 중영청
통제사의 참모장 격인 우후의 군영으로 우후영이라고 한다.
통영세무서가 있던 자리로 무전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발굴 유구 와 문헌에 의해서 2011년 중건하였다.
□ 한산대첩 전투 군상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 전투 장면을 판옥선 위에 재구성한 수군 군상 조형물이다.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우국충정으로 전투에 임한 수군을 함께 구성하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나라를 지키고자 사투를 벌였던 수군들의 활약상을 함께 기리고자 하였다. (안내문)
삼도수군 통제영 탐방을 끝내고 동피랑 벽화마을을 가려고 주차장을 찾으니 잘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이동해 지하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오니 지상은 한산대첩 광장이다.
□ 판옥선
판옥선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이었다.
1555년 을묘왜변을 전후한 시점에 개발되었다.
이전 군선은 한 갑판 위에 노군과 전투원이 동시에 활동하여 전투에 애로가 있었다.
위쪽 갑판은 전투원을, 아래쪽 갑판에는 노군을 배치해 전투 효력을 높였다. (안내문)
이름도 없던 산촌에 불과한 통영에 삼도수군 통제영이 설치되며 비로소 통영이란 지명을 얻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기인한다.
여수와 통영을 탐방하며 이충무공에 대한 활약상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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