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_56
2021.5.21. 오전에 한 시간 반 동안 탐방
여수 세달살이가 벌써 절반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제법 여행한다고 했어도 매일 다닐 수 없어 실제 여행한 날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365개의 섬이 있다는 여수에서 숙소가 있는 돌산도는 제법 휘젓고 다녀 해안선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외 거문도, 오동도, 낭도, 화태도, 금오도가 다녀온 섬의 전부이다.
여수에 갈 곳은 많지만, 이번엔 지평을 넓혀 통영을 2박 3일 동안 다녀올 생각에 훌쩍 떠난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통영 시내에 있는 ‘삼도 수군 통제영’이다.’이다.
통영의 지명 유래는 삼도수군 통제영의 통제영에서 가운데 ‘제’ 자가 빠져 통영이 된 것이라 한다.
임진왜란이 수군의 중요성을 인식해 삼도수군을 하나로 통합하며 통영이라는 지명 하나를 새로 만든 셈이다.
□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
삼도수군 통제영은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해상 방어 총사령부이다.
선조 26년(1593)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겸임하게 하면서
삼도수군 통제영이 새로 생겼다.
이 삼도수군 통제영을 ‘통제영’으로 줄여 부르던 데에서 통영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최초의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의 한산진영이다.
지금의 통제영은 선조 36년(1603)에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세운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으나, 100여 동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안내문)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 고지도이다.
이 지도를 걸핏하면 보면 호랑이 한 마리가 앞발을 치켜들고 오른쪽 일본을 짓누르려는 듯 포효하는
만화를 보는 느낌이다.
삼도수군 통제영 입구에서 바라보는 망일루
도로에서 올라가는 입구 첫머리
□ 수항루(受降樓)
수항루는 원래는 통영성 남문 밖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통영항의 해안 매립으로 1986년 현제의 곳으로 이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의 승전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서 숙종 3년(1677년)에
제58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건립했으며 봄과 가을 군 점(수조) 때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해안매립으로 인해 선착장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려 1986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하였다. (안내문)
□ 망일루
광해군 3년(1611) 제10대 우치적 통제사가 세웠으며,
영조 45년(1769) 제128대 이국한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다.
일명 세병문이라고도 하며,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커다란 종이 있어 종루라고도 하였다.
소실된 것을 200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안내문)
□ 삼도수군통제사
통제사의 정식 명칭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충청·전라·경상 삼도 수군을 총괄하는
조선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통사, 통수, 통군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1593년(선조 26)부터 1895년(고종 32) 폐영 될 때까지 303년간 209대,
재임 14명으로 195명의 통제사를 배출하였다.
제1, 3대 통제사 이순신, 제2대 원균이다.
삼도수군통제사(종 2품)는 각 도의 수장인 관찰사(군권, 행정권, 사법권을 가진 종 2품)와
대등한 관계였으나 실제로는 그 이상의 권한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 전체 병력의 1/4 이상에 해당하는 조선 수군 80%가량의 삼도수군통제사를 통솔하는
막강한 군권, 사법권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통제영 운영을 위한 군액(세금) 징수, 통영곡(군량미) 운영, 소속 전선(배)을 이용한 물류업과
지역별 창고업, 상평통보 자체 제작과 사용, 12 공방 운영 등을 통한 든든한 제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안내문)
□ 좌청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건물로 대변좌청(待變左廳)이라고도 하며,
제54대 신여철 통제사가 1689년에 좌천과 우천으로 분청 했다고 한다. (안내문)
□ 지과문(止戈門)
제57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높이 1장 반(약 4.6m),
둘레 1만 1730자(약 3.6㎞),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平山城)을 쌓은 통제영의 출입문이다. (안내문)
□ 이순신과 삼도수군 통제영
삼도수군 통제영의 설립되기 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의 수군은 충청도 수군절도사(보령),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여수), 전라우도 수군절도사(해남),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동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거제) 등 진관 체제에 입각해 수군의 통수권이 분할되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대첩으로 무공을 쌓았다.
이듬해인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정조 19년(1795)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중 선조가 이순신대교 내린 교서에 따르면
“··· 그대를 기용하여 본직에 전라 충청 경상도의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노니 ...
수사 이하로 명령을 받들지 않는 자는 군법에 의해 시행하라....”고 하였다.
이 시기 삼도수군 통제영은 전쟁 상황 하의 행정으로서 처음 한산도에 설치되었으며
이후 통제사가 수사를 겸임하는 본영의 위치 등에 따라 거제 오아포, 전라좌수영 등지로 자주 옮겼다.
이곳 두룡포에 정착한 1604년 이전까지 종 2품 통제사는 정 3품 수사보다 상위직이며,
각 도의 지방행정의 최고위직인 관찰사와 같은 품계였다.
이순신을 이은 제4대 통제사 이시언 이후로는 경상 우수사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안내문)
삼도수군 통제영 조감도
담장 건너 12 공방 등 건물은 2부에서 보게 된다.
□ 산성청(山城廳)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하던 곳으로 숙종 44년(1718년)에 제83대 통제사 오중주(吳重周)가 건립하였으나
이후 소실된 것을 발굴 조사와 문헌을 참고하여 중건한 건물이다. (안내문)
□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과 통제사
조선 초기 삼남지방의 수군 제도는 경상좌도, 경상우도,경상우도, 전라좌도, 전라우도, 그리고 충청도에
각각 수군절도사를 두어 각 해역을 관찰해 왔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에 이들 각 수사들을 총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두어 전라좌수사에게 이를 겸임하게 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라 칭한 것이
통제사 제도의 시초였다.
통제사가 관할하던 본영을 삼도수군 통제영 또는 약칭하여 통제영이라 하였으며
최초의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한산 진영이었다.
그 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한산 진영과 더불어 전라좌수영마저 폐허가 되자
본영은 당시의 전세에 따라 옮겨 다니는 행 영체제를 이루었으며 임란 직후에는 자연히
전라좌수영이 통제영으로 되었다.
선조 34년(1601) 통제영이 남해안 중간 해역에 위치한 경상우수영으로 옮겨 설치되면서부터
통제사는 경상 우수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며 다음 해 다시 고성 춘원포로 옮겨지는 등 초기에는 한동안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다가 선조 39년(1603)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이곳 두룡포로 정했다.
객사 세병관을 비롯한 관아들을 세우기 시작하여 다음 해 선조 37년(1604) 본영을 창건함으로써
조선 수군 최대 관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후 숙종 4년(1678) 제57대 통제사 윤천뢰 때 영문 사방으로 통영성을 쌓아 더욱 그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 후기 약 300년 동안 왜적의 재침을 방비하는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였던 통제영은
제209대 통제사 홍남주를 끝으로 고종 32년(1903)각 도의 병영 및 수영과 함께 모두 폐영 되었다. (안내문)
□ 세병관(洗兵館)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93호로 지정되었는데, 이후 2002년 10월 14일에 국보 제305호로
'통영 세병관(統營 洗兵館)'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선조 38년(1605)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이다.
제35대 통제사 김응회가 1646년 증축한 것을 제194대 통제사 채동건이 1872년 개축했다.
정면 9칸, 측면 5칸 9량 구조 단층 팔작지붕으로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흘림기둥, 2익 공 양식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다.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세병관(洗兵館)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가 쓴 글씨이다. (안내문)
세병관 내부 중심
세병관 내부 측면
□ 본영군
통제사가 제반 의전을 치르던 중심 영역으로 통제영 영역 내에서 중심에 자리한다.
세병관은 통영시의 언덕 위에서 남해를 바라보며 있다.
그 거대한 규모에서 보여주는 위압과 권위는 이 건물이 승전에 대한 기념성과 군사적 기능이
동시에 추구되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구성을 살펴보면 전면에 내삼문인 지과문, 외삼문인 망일루가 있다.
백화당으로 통하는 협문 뜰 안에는 석인, 기삽석통이 있고, 좌측에는 백화당과 잉번청이 있다. (안내문)
□ 석인(石人)
숙종 27년(1701년) 제77대 통제사 류석추(柳星樞)가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것으로 추측한다.
세병관 앞의 장대석을 해체 과정에서 발굴되어 현재 위치에 설치하였다. (안내문)
세병관은 문을 열러 젖히면 사방이 뚫린 공간이 된다.
□ 기삽석통
세병관 앞뜰에 영기와 종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동정하는 커다란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으로 정조 10년(1786)
제142대 류진항 통제사가 세웠다.
원래는 세병관 뜰을 좌우 양편으로 2기가 있었으나 현재 세병관 앞뜰 담장 부근에 서쪽 1기만 남아 있다. (안내문)
시원시원한 내부
회랑은 아니로되 회랑 같은 느낌이다.
□ 통제사비군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이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관·민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이다.
표제도 송덕비·추사비·거사비·사적비·불망비·타루비·유애비·선정비 등으로 다양하다. (안내문)
세병관을 나와 다른 문을 통해 들어가는 공간이 있다.
□ 병고
선조 37년(1604) 제6대 이경준 통제사 때 통제영 설치와 함께 세워졌다.
통제영 병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현재 대포, 창, 검, 무기력을 전시하고 있다. (안내문)
□ 운주당
인조 23년(1645) 제21대 이완 통제사 때 경무당과 함께 창건하였다.
운주는 '운주유악지(運籌帷幄之)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것을 말함이니
즉 통제사가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안내문)
□ 경무당
인조 23년(1645) 이완 통제사 때 지은 통제사의 작은 집무실인데, 경무당이라 한 것은
이충무공의 뜻을 크게 우러러본다는 의미에서 연유한 것이다. (안내문)
□ 내아
통제사가 거처했다 곳으로 지방관처럼 안채에 해당한다.
안방, 대청, 건넛방, 부엌, 찬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내문)
□ 읍취헌
통제사가 풍경을 조명하며 휴식을 취하던 정자
□ 삼도수군 통제영 주요 건축물의 역사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세병관, 백화당 외 기초적 시설을 건축한 후 통제영의 건설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제7대 통제사 이운룡은 충렬사(충무공 추모 사당)를 건립했기, 제10대 통제사 우치적은 망일루를 세웠다.
운주당과 경무당(당시 명칭 호소각)은 인조 23년(1645) 제34대 통제사 이완에 의해 축조되었다.
세병관 앞의 지과문은 제35대 통제사 김응배에 의한 것이다.
제58대 통제사 윤천뢰는 통영성을 건축하였으며, 산 성청은 숙종 34년(1708) 제83대 통제사 이중주에 의해 축조되었다.
2002.10.14 국보 제305호로 지정된 세병관은 17세기 초에 건립된 목조 단층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 중 하나로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안내문)
□ 득한당
휴식을 얻는 곳이라는 뜻으로 통제사가 휴식을 취하던 곳
통영의 삼도수군 통제영은 한양 궁궐과 수원 화성을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의 지방 관아인 셈이다.
입장료 3,000원으로 제법 비싸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둘러보니 충분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있다.
각 건물마다 안내문이 자세하여 별도의 도움이 필요 없는 정도이다.
이 포스팅 역시 안내문으로 대신하는 편리함이 있다.
양이 많아 두 편으로 구분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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