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92 A
2023. 10. 14. 토요일 06:56~10:37, 3시간 41분 순성, 30분 휴식 포함, 8.6km 이동
강화도 여행의 제일 큰 목적은 강화산성 순성과 여러 곳에 산재한 돈대를 탐방하는 것이다.
먼저, 강화도 길목인 김포에서 수안산성과 문수산성으로 몸을 풀고 들어왔다.
둘째 날에는 전등사를 낀 삼랑성을 돈 후 눈에 띄는 돈대를 다 돌았다.
즐풍의 준비 부족으로 못 본 돈대는 언젠가 또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강화산성의 주출입구인 동문 · 서문 · 남문 · 북문은 어젯밤에 맛보기로 야경을 즐겼다.
내 개의 문을 본 것만으로도 강화산성의 중심은 살핀 셈이다.
강화산성 순성을 시작해야 하는 데,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다 말다 한다.
날씨가 흐린 만큼 사진도 어둡고 흐려 보정을 거쳤어도 부족한 느낌이다.
강화산성 종주 코스
강화산성을 종주할 때 주차장은 강화공설운동장이 가장 좋다.
주차부터 하고 서문방향으로 이동한다.
강화 석수문 石水門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하였던 수문이다. 조선 숙종 37년 711 강화산성의 내성을 쌓을 때
처음 설치하였다.
1900년 갑곶나루터의 통로로 사용하기 위하여 개천 어구로 옮겼다가 1977년 하수문下水門 자리로 옮겼으며,
1993년 상수문上 水門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던 것을 2015년 보수공사를 거쳐 정비하였다.
길이 18.2m, 높이 2.7m, 폭 4.7m이다.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3개이며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다.
Stone Watergate, Ganghwa
This granite watergate was constructed over Dongnakcheon Stream flowing the central part of the Ganghwa-eup area.
It was first built in 1711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Inner Wall of Ganghwa Fortress.
After being relocated several times, it was reconstructed and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in 1993
and was repaired in 2015. It has three arched gates, and the entire structure measures 18.2 m in length,
2.7 m in height, and 4.7 m in width.
(안내문)
강화산성 (江華山城)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 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출처_문화재청)
강화산성의 서문인 첨화루 밖으로 이동하며 순성을 시작한다.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인천광역시강화군 강화읍을 둘러싼 북쪽의 북산, 동쪽의 견자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진고개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형태는 산봉우리를 정점으로 능선과 계곡부가 연결되는데 지형에 따라 계곡부는 성 내측으로
오목하게 들어가고 성 외측으로 돌출된 부정형을 띠고 있다.
현재의 강화산성은 조선시대 강화부의 읍성으로 축성한 것으로 염하(鹽河)를 따라 축성된 외성(外城)과 구분되는
내성(內城), 즉 ‘강화읍성(江華邑城)’에 해당한다.
강화의 내성(內城)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구분되는데 현재 고려시대의 내성은 확인할 수 없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문헌기록을 통해 강화산성의 축성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을 피하기 위한
강화도로의 천도 이후 외성과 중성을 축조하였으나, 몽고와의 강화(講和) 조건으로 고종 46년(1259) 내성을 포함하여
외성을 훼성(毁城)하고 몽고와 화의(和議)하였다.
이러한 소략(疏略)한 기록만으로는 고려시대 내성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확인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의 『증보문헌 비고(增補文獻備考)』와 『여지도서(與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따르면 “내성
(강화산성(읍성))은 당초 조선 초기에 석축으로 쌓았는데 둘레 1,658 보이며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으로 훼손되었다
가 숙종 3년(1677) 전면을 석축하고 후면은 흙으로 개축하였다.
숙종 36년(1710) 다시 개축하여 둘레는 당초 보다 약간 물려쌓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강화산성은 고려
시대의 유지(遺址)는 확인할 수 없으며, 조선시대 들어와 석축으로 축조된 이래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1677년부터
개축 이후 1710년대에 이르기까지 개축작업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강화산성의 총연장은 지난 2000년 측량 결과 7,112m에 해당한다. 전체 성벽은 석축(石築)인데
약 40% 이상 남아있으나 여장은 모두 붕괴되었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곳을 통해 축성수법을 살펴보면 기본적
으로 계곡부는 협축식(夾築式), 능선부는 내탁식(內托式)으로 축조되어 있다.
지난 2000년 진행된 서문 인근의 성벽 기저부 확인조사 결과, 성벽의 기본적인 단면 구조는 성벽의 외면을 석축하고
내측으로는 토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평지에 축조된 부분에서는 외면 석축의 안쪽으로 흙을 두렵게 층을 이루게
다진 도축(搗築-흙을 얼마간 깔고 다지는 작업을 반복하였으나 판축처럼 얇고 수평으로 다진 것은 아닌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산지의 경사면 부분은 V 자 모양으로 삭토한 후 석축을 하여 파낸 부분은 할석으로 다진 특징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기본적인 단면 구조에 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외면 석축 부분의 하단에 기단을 두고 성벽을 들여쌓기 하여
그 위로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축조하며 면석(面石)을 처음부터 다듬어서 상하좌우로 맞물리게 축조하였다.
이와 같은 축조방법은 조선 초기의 읍성들에서 보이는 쐐기돌을 이용한 틈새 메우기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
강화산성의 주요 시설물로는 동문(望漢樓), 서문(瞻華樓), 남문(安波樓), 북문(鎭松樓)의 4대문과 4개소의 암문,
2개의 수문, 3개의 장대 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복원된 4대 문과 일부를 제외하곤 정확한 터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직 학술조사가 부족한 상태이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서문과 연결되는 석성은 100여 m에 불과해 언덕을 오르면 바로 토성으로 연결된다.
잠깐 마을을 만나며 방향이 헷갈리지만 산의 능선을 따라가며 이내 위치를 잡는다.
이곳은 계곡을 물을 빼기 위한 배수로인지 아니면 암문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잔디가 깔린 토성의 상태는 양호한 것이다.
토성이라고 하지만 간혹 돌로 낮게 성벽을 보강한 곳도 눈에 띈다.
무슨 용도로 콘크리트 담장을 쌓았는지 모른다. 길이 막혔으니 담장을 따라 이동한다.
편한 오솔길을 두고 성벽으로 걷다 보니 길이 끊기는 구간에 들어섰다.
이런 수풀을 스틱으로 이리저리 가르며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한다.
북문이 가까워지자 돌연 석성이 나타난다.
바깥쪽으로는 석성이라 지나온 구간보다 단단한 성벽이다.
아래쪽으로 파란 천막이 쳐진 곳은 북문인 진송루가 있는 곳이다.
복원 공사로 들어낸 석재에 일일이 번호를 매겨 복원할 때 순서대로 맞추게 된다.
북문인 진송루 주변은 성벽공사로 어수선하다.
북문에서 동문으로 이동하는 구간의 안쪽은 바라만 보고 이번에서 성 밖으로 돌게 된다.
성 안은 여장 부분만 볼 수 있지만 성 밖으로 돌면 성체까지 볼 수 있어 성곽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밖에서 보면 육중한 느낌이 만리장성을 보는 듯하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데 북장대 터에 다다르며 낮은 성벽을 이용해 성 안으로 들어선다.
북문에서 올라오는 방향
북문 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성벽 안쪽으로 경사가 져 은폐하기 좋다.
강화산성 북장대터 北將臺址
장대는 전쟁 시 군사 지휘에 용이한 곳에 설치한 장군의 지휘소이다.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을 수행했다.
강화산성은 1232년 고려시대 몽골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내성 중성•외성 중 강화 내성이다.
성안에 궁궐과 백사(百司)의 건물을 개성의 것과 비슷하게 건립하였다. 둘레 7.1km의 강화산성에는 남산과 북산에
각각 남장대와 북장대 그리고 서문 안에 서장대가 있었으나 모두 허물어진 것을 2010년 남장대만 복원하였다.
2011년에는 북장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안내문)
북장대를 복원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남산 위에 남장대만 복원했다.
북문에서 동문으로 내려가는 구간의 성벽은 다소 낮은 편이다.
강화 나들길은 어느 구간을 지나게 되는지 이곳으로 내려간다.
토성과 석성이 환경에 따라 자주 뒤바뀐다.
이곳 성벽 주변은 예초기로 풀을 베어내 정돈된 느낌을 준다.
북문 주변에 어렵게 수풀을 헤치며 걷던 곳도 이렇게 정리해 주면 좋을 텐데...
동문으로 연결되는 구간은 민가가 들어서며 성벽이 훼손되었다.
마을이 생기며 끊어진 구간에 동문을 복원했다.
동문 밖으로는 대로가 생기며 끊어졌고, 안쪽은 주택이 들어서며 끊겼다.
우리나라에서 경주만큼이나 역사적 유물, 그중에서도 관방유적은 강화도가 제일 많은 곳이다.
강화도 해안을 따라 진이며 보, 돈대까지 촘촘하게 연결된 지역이다.
또한 강화도의 성은 내성, 외성, 중성까지 그 규모도 놀라울 만큼 크다.
지난번 포스팅 삼랑성(정족산성)에 이어 이번 강화산성은 사진이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린다.
어젯밤에 본 강화산성 동 · 서 · 남 · 북문이 궁금하시면...
강화산성 2부가 궁금하면...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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