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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강화 월곶진과 월곶돈대가 품은 연미정의 낙조

by 즐풍 2023. 11. 14.

2023_189

 

 

 

2023. 10. 13. 금요일 오후에 탐밤

 

 

강화도 갑곶돈대와 강화전쟁박물을 시작으로 월곶돈대와 연미정의 포스팅을 끝내는 데 21일 걸렸다.

중간중간 산행을 하며 더 시급한 산행기부터 작성하다 보니 뒤로 많이 밀렸다.

강화 여행 계획을 짜며 카카오 맵에서 보이는 진, 보, 돈대를 메모한 걸 다 돌았다.

광성보와 광성포대, 요진진과 월곶진까지 포함해 모두 25개를 돈 것이다.

강화도의 54개 돈대 중 흔적도 없이 사리진 것도 있고, 복원 과정에서 다른 곳에 세운 것도 있다.

월곶돈대에서 강화대교로 가는 중간에 염주돈대가 있으나 교동읍성을 보겠다고 포기했다.

즐풍의 준비 부족으로 못 본 곳은 언젠가 또 시간을 내 돌아볼 일이다.

 

 

월곶돈대를 찾아보니 먼저 반기는 건 월곶진의 문루인 조해루朝海樓이다

 

 

월곶진月串津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일대

 

월곶진은 강화 12진보 중 하나로, 해당 위치에는 월곶돈대와 강화외성의 일부 구간, 포구 앞에 있었던 문루

조해루朝海樓가 복원되어 있으며, 연미정과 황형장군의 옛 집터 기념비가 현존한다.

돈대의 위치는 한강 본류와 조강, 염하로 갈라져 각각 서울, 김포, 황해도 방향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에 있다.

『강화도지도江華島地圖』 제5폭에 묘사된 월곶진의 모습을 보면 돈대가 위치한 독립된 구릉 하단면,

즉 현재 황형장군 위령비가 있던 자리에 월곶진의 관청 건물이 배치되어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구릉 사면 최하단에는 담장을 둘러 관아의 경계를 표시하고, 일부 창고와 수문水門 등이 배치되었으며,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루인 조해루 바깥에는 포구浦口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보鎭堡의 인력 배치는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었는데, 18세기 중엽의 상황을 알려주는 『해동지도海東地圖』

강도江都 편에는 방군坊軍 11명, 군관軍官 20명, 토병土兵 103명 등 총 134명이 배속되었으며,

군향미軍餉米 226섬, 콩 52 섬을 비축하고 선박은 물을 공급하는 급수선 1척을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월곶진 주변은 북한과 인접하여 군사시설이 분포되어 있어 개발행위로 인한 유적의 훼손 우려는 적으나,

배후지를 이루는 마을에는 오래된 고택과 전돌, 기단석, 면석 등 다양한 건축부재가 널려 있어 이 일대에 월곶진

및 돈대와 관련된 유적이 있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출처_조선의 보장지처, 강화 그리고 진・보・돈대 Ⅱ)  

 

 

 

 

 

월곶진과 연결되는 성벽은 월곶돈대로 이어진다.

 

1510년 삼포에서 일어난 삼포왜란 때 일본 주동자 등을 처단한 황형 장군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다.

 

 

월곶돈대月串墩臺

 

월곶돈대는 월곶진의 관할 아래에 있던 돈대로, 강화도 북동쪽 학무산에서 해안 방향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어진 독립 능선에 위치해 있다. 조강과 염하가 갈라지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강화와 김포, 황해도 연백 일대가 모두 관찰되는 요충지이다. 하구 한가운데에는 토사의 퇴적으로

형성된 하중도河中島인 유도留島가 있다.

1999년 육군박물관 조사 당시 기록을 보면 전체 성벽 중 동벽 약 30m, 남벽 약 5m 길이의

구간이 훼손되었으나 그 이외 구간은 약 1.5m 내외 높이의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었으며,

문지는 홍예 구조의 아치와 문주석 등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2006년 전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벽의 전반적인 축조 방식은 육군박물관 조사 당시 평면실측도면에서 면석이 표현된 성벽

외벽과 달리 내벽은 성돌을 두른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편축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출입문은 높이가 성 내부 지표면보다 낮아,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면서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구조로 미루어 보아 최근 발굴 조사된 가리산돈대 문지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연미정燕尾亭이 있는데, 1976년 복원되었다.

포좌는 총 4개이며, 복원 이전 여장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으나, 여장 일부 흔적이 남아 있는

다른 돈대들의 경우를 볼 때 두툼한 돌을 쌓고 총안銃眼을 낸 현재의 복원 모습과는 달리 전돌이나

판석을 쌓고 회를 바른 구조였을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인 형태는 말각방형에 가깝다

                                                         (출처_조선의 보장지처, 강화 그리고 진・보・돈대 Ⅱ)  

 

 

2019년 태풍 링링으로 쓰러진 500년 된 느티나무 사진 

 

월곶돈대는 장방형의 원형 돈대이다.

 

 

연미정 | 燕尾亭

 

연미정이 있는 월곶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흐르는 물길 모양이 제비꼬리燕尾 연미와 같다고 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이라 하였다.

연미정은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의 절경으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리고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 31년 1244에 구재학당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놓고 공부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 관계의 강화 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 20년(1744)에 중건되었으며, 조선 고종 28년(1891)에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Yeonmijeong Pavilion

 

Yeonmijeong Pavilion overlooks the mouth of the Imjingang and Hangang Rivers. Its name means "Pavilion of a Swallow's Tail" as the shape of the waterway around this pavilion resembles a swallow's tail.

It is unknown when Yeonmijeong was first built, but it is presumed to have been sometime during the Goryeo period (918-1392). In 1244, King Gojong (r. 1213-1259) gathered young scholars from Gaegyeong (present-day Kaesong, North Korea), the capital city, to this pavilion for summer study. The pavilion was destroyed during the Korean War and was reconstructed in 1976.

                                                                                              (안내문)

출입문 사이로 보이는 연미정

 

 

 

태풍 링링에 500년 된 느티나무는 쓰러졌지만, 아직 돈대 안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더 있다.

 

 

남과 북의 강이 하나 되어 흐르는 연미정

 

사방으로 탁 트인 연미정은 강화 8경에 꼽힐 만큼 남다른 절경을 자랑하며 달밤의 경치가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서울로 향하던 배가 모두 연미정 아래에 닻을 내렸다가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지며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연미정 앞바다는 남한의 한강과 북한의 임진강이 하나 되어 서해로 흐르는 만남의 장이자 사방이 탁 트인 시원한 풍경

으로 지척의 고향을 그리워만 할 수밖에 없는 실향민의 아픔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하다.

 

정자에서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섬 유도는 재미있고 훈훈한 일화를 품고 있다. 1996년 홍수 때 북한의 소 한 마리가 유도로 떠내려 왔는데 비무장지대라 남북 모두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날이 야위어가는 소를 보다 못한 남북이 극적으로 합의하여 우리 군이 구출하였고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후 '평화의 소'는 제주도 출신의 '통일염원의 소'와 부부의 연을 맺고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지금 남북의 주민들은 연미정 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남과 북에서 시작된 두 개의 강은 연미정 앞을 유유히 돌아 흘러 큰 바다로 함께 나아간다. 남북의 두 강물이 하나 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연미정에서 미래의 남북 주민들도 평화와 번영의 바다로 함께 나아가기를 꿈꾸어 본다.

                                                                                                          (안내문)

 

연미정 누각은 잘 지은 천막처럼 단순한 모양이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인 데다

실향민의 아픔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하다니 애잔한 느낌이 든다.

 

 

예전 군인 초소 뒤로 보이는 건 염하(鹽河)라고 한다.

하河는 강보다 커 바다처럼 보이는 강으로 중국에서 황하黃河가 유일하게 河 자가 붙은 강이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라 바다인지 강인지 구분 짓기 어렵다.

육지와 섬 사이를 흐르는 해협이란 말도 틀리지 않다. 하여 짭짤한 바닷물이 흐르는 큰 강이란 뜻이기도 하겠다. 

 

 

 

 

해가 서산에 기울며 햇빛 따라 돈대의 성곽도 누런 색을 띤다.

돈대 아래에는 수로를 내어 배수가 잘 되도록 했다.

 

 

 

즐풍 사진을 보면 정면 사진은 중심을 참 잘 잡는다.

 

쓰러진 느티나무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땅에 조형물을 새겼다.

 

 

이제 막 일몰이 시작되며 서쪽 하늘을 불게 물들인다.

 

 

 

 

얼른 서쪽 돈대 방향으로 뛰어가 폰으로 돈대의 여장인 총안으로 들어간 태양을 잡아본다.

 

이번엔 여장의 성카퀴(치첩) 사이로 보이는 일몰의 모습이다.

 

 

일몰 시각에 맞춰 온 월곶돈대의 풍경은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이렇게 돈대와 성문 사이로 아름다운 일몰의 풍경을 담을 수 있는 흔치 않은 행운을 누렸다.

 

 

 

성 박으로 빠져나온 누조漏槽는 작은 수로를 따라 강화도 바다로 빠진다.

 

저 돈대 뒤로 돌아가면 염하와 만나겠지만 철망이 쳐진 곳이라 갈 수 없다.

 

 

 

 

 

 

황현 장군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과 월곶진의 조해루를 함께 잡아 본다.

 

 

 

월곶돈대를 끝내고 밤에 교동으로 넘어가 교도읍성을 봐야 하기에 염주돈대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월곶돈대는 연미정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일몰이 시작될 무렵이라 전체적으로 붉고 노란 기운이 감도는 사진이다.

막판에 일몰 풍경까지 담을 수 있어 더 아름답게 보이는 연미정과 월곶돈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