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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국군의날에 둘러보는 청주 상당산성

by 즐풍 2023. 10. 2.

2023_153

 

 

 

2023. 10. 1. (일) 08:38~10:10, 1시간 32분 산행, 4.3km 이동

 

 

추석 연휴 기간 중 샌드위치 데이인 10월 2일이 임시 휴일로 지정되며 6일의 연휴가 생겼다.

목, 금, 토요일은 손자와 함께 어영부영 지나갔고, 둘만 남은 오늘은 가까운 청주로 떠났다.

청주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여러 곳을 둘러볼 생각에 집을 나선 것이다.

먼저 도착한 곳은 상당산성으로 공주의 당산성과 비교될 만큼 멋진 곳이다.

 

'23년 8월 말 청주시 인구 873천 명을 배후 도시로 둔 상당산성엔 제법 많은 사람이 운동 겸 산책을 나섰다.

상당산성을 자주 다닌 시민은 성 안쪽 길로 산책하고, 우리처럼 성벽길을 걷는 사람은 드물다.

산성이라고 하지만 산성 안 마을까지 도로가 뚫리며 산을 오르는 수고가 줄어들며 산책 코스로 변했다.

하여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산속의 상쾌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집어넣으며 심신의 안정을 얻는 곳이다.

 

 

 

 

 

청주 상당산성 (淸州 上黨山城)

 

상당산성은 서쪽과 북쪽으로는 금강 유역, 남쪽과 동쪽으로는 한강 유역으로 흐르는 물줄기에 이어지는

분수령에 축조된 산성이다.

서쪽 평지에 청주읍성과 정북동 토성이 있고, 주변에 여러 옛 산성들이 있다.

청주는 이처럼 평지의 도심지역과 그 외곽에 역사적으로 변화되어 온 방어 시설을 갖춘 독특한 유형의 도시

구조를 가진다. 이들 가운데 상당산성은 가장 위쪽에 자리한다.

1651(효종 2)년 해미海美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의 병영이 청주로 옮겨옴에 따라 청주읍성은 동시에

충청병영성의 역할을 하였다.

평지에 자리한 병영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상당산성을 크게 수리하여 병영의 배후산성으로 경영하였다.

임진왜란 때 수리를 시작했다가 중지된 상당산성을 1716년(숙종 42)부터 대대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하여

영조 때 완성하였다.

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조대왕의 태실이 있고, 바로 남쪽 건너편에 것대산 봉수가 있다.

 

1744년에 영휴靈休스님이 쓴 「상당산 성고금사적기」에는 이 성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이야기와 산성의

규모 • 시설의 변화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 구례의 운조루 (雲鳥樓)에 전해오는 「상당산성도」에는 산성의 시설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영조 때의 「여지도서」에 따르면 성벽 둘레가 포백척布帛尺 7,215자, 성벽 높이가 9자이다.

동문 • 서문 • 남문과 동북 • 서날 암문의 성문과 수문, 치성 3곳, 포루鋪樓 15곳, 여장 1,176堞, 연못 4곳과

우물 15곳, 동쪽• 서쪽• 북쪽의 장대將臺, 운주헌雲籌軒을 비롯한 관청과 창고 등이 있었다.

사찰로는 구룡사, 남악사, 장대사 등 산성 내에는  모두 300칸이 넘는 기와건물과 초가로 된 민가가 있었다.

이곳의 관리와 군사훈련인 성조城操 등은 병마우후兵馬虞侯가 맡았다.

그 휘하에 군관 30인, 수첩군관守堞軍官 250인, 승장僧將 1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속해 있으며,

군향미軍餉米 약 1만 5천 석, 콩 약 3천 석, 군수 장 軍需 醬 150석 등을 비축하고 있었다.

1890년) 고종 27)에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마지막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1895년의 군사제도 개편에 따라 산성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안내문)

 

구례 운조루 소장한 상당산성도

 

 

상당산성 순성은 남문인 공남문 앞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역사기록


상당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이후의 기록은 다른 성곽에 비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이들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통하여 성벽의 개축 및 문루의 개보수에 대한 대략적인 시기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성벽이 처음 축성된 시기나 그 목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로 나뉘는데, 

크게 신라, 백제, 궁예의 축성설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백제의 축성설은 청주가 본래 백제의 상당현이었음을 알려주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의 낭비성 또는 낭성이 상당산성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다음 신라의 축성설은 7세기 후반 정주에 설치된 신라의 서원소경西原小京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대(661~681년)에 김유신의 아들인 원정이 서원술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통일 후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9년(689)에 서원경성을 축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상당산성에서 발견된 「사랑부속장지일」 명 기와에서 보이는 사랑부는 신라의 6부 중 하나로,

당시 왕경인이 서원소경에 이주해 온 사실과 상당산성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상당산성의 승장이었던 영휴가 1744년에 지은 아래의 상당산성 고금사적기(山城古今事蹟記 )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또한 930년에 왕건이 고창전투에서 후백제에게 승리한 후 천안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청주에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시기에 청주는 궁예와 왕건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산성의 조선 전기 상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즉, 상당산성은 청주의 율봉역 북쪽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7,773척이며

성안에 12개의 우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조 29년(15%)년에 충청도병미절도사로 부임한 원균이 상당산성을 수축하고 있다는 내용이

「선조실록」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 폐허로 있던 상당산성이 임진왜란 때 충청도지역의 방어와 관련하여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당성(古上黨城)은 율봉역의 북쪽 산에 있다. 

돌로 쌓았고 주위가 7,773척이며 성안에 12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숙종 42년(1716)에서 46년(1720)에 걸쳐 실시된 대대적인 성벽 개축공사에 대해서는 숙종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때 운주루와 구룡사를 비롯하여 동북암문과 영사 및 창장고, 연못 등이 조성되었다.

이후 체성 및 관련시설에 대한 수리,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영조와 고종 때에는 대대적인 개축이 실시되었다.

수문은 영조 23년(1747)에 처음 축조된 후 영조 41년(1765)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동문과 남문의 문루는 영조 35년(1759)에 보수되었으며, 서문은 영조 41년(1765)에 수문과 여장의 수축과 함께

개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장대와 포루의 축조, 남악사 건립, 문루와 여장, 연못의 개보수에 관한 많은 기사가 확인된다. 

영조 때(1757~1765) 편찬된 전국읍지인 여지도서에는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추게 된 당시 상당산성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남아 있다.

                                                                                                (출처_중원의 산성)

 

 

 

 

남문에서 시계 방양으로 돌며 남서지점의 꼭짓점인 치성에 도착한다.

 

 

 

뜨겁던 여름 기운이 물러가며 활엽수는 붉은빛이 띠기 시작한다.

 

 

 

서남암문을 나가면 남쪽 모서리의 치성 밑에 북한 무장간첩이 공작장비를 매설한 위치가 있다고 한다.

지난번에 이미 봤으니 오늘은 생략한다. 

 

 

상당산성 서남 암문

 

암문暗門은 성을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사잇문이다.

암문은 아군이 적군 몰래 출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축, 양식 등을 나를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상시에는 흙으로 문을 막아 통로를 폐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동북 암문과 서남 암문이 있다.

서남 암문은 '남암문' 또는 '남화문南和門)으로도 불렸으며, 남쪽으로 1.7km  떨어진 것대산 봉수대와 이어진다.

이곳은 남문 밖에 모여든 적의 뒤쪽으로 돌아가 포위하거나, 산성 남쪽으로 통하는 교통로 주변을 관찰하기

좋은 중요한 위치이다.

암문은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고, 문 안쪽에 빗장을 걸었던 네모난 구멍만 남아 있다.

암문 안쪽에는 침투하는 직을 수월하게 방어하기 위하여 좌우측에 벽을 쌓았다. 

 

Southwestern Secret Entrance -

Sangdangsanseong Fortress, Cheongiu

 

Sangdangsanseong Fortress had a total of five gates: three main gates (southern, eastern, and western)

and two secret entrances (northeastern and southwestern).

This is its southwestern secret entrance.

A secret entrance, called ammun in Korean, is an emergency passage allowing for the undetected

movement of forces, cattle, and food into and out of the fortress. During times of emergency,

secret entrances could be filled in with dirt and sealed.

The location chosen for this secret entrance was ideal for surveilling the area to the south of the fortress.

If the southern gate was under attack, troops stationed in the fortress could be sent out through this entrance

to surround the enemy from the rear.

The path outside this secret entrance also leads to Geotdaesan Beacon Station,

located 1.7km to the south, where warning beacons could be lit to alert the surrounding area of an attack,

The secret entrance originally had a door which no longer remains.

The door was fastened shut with a bar that would have been slotted into the square holes on either side

of the passageway.

On the inside of the fortress, the fortress walls curve toward the entrance to create a narrower space that

can be more easily defended.  (안내문)

 

 

 

 

아이를 데려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보기 좋다.

즐풍도 아이들 어릴 땐 많이 데리고 다녔는데, 커가면서 지들끼리 잘 논다.

 

 

 

상당산성은 조선의 숙종대에 한 번 보수 공사를 했다.

숙종 때 축성한 북한산성은 거의 전 구간에 여장이 있는데,

상당산성에서는 최근 공남문에 여장을 설치한 것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미호문이다.

이 미호문은 복원공사를 하며 안쪽으로 한참 들여 세웠다.

처음 있던 그 장소에 복원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렇지 못할 이유가 있나 보다.

 

 

 

 

 

점점 멀어져 가는 미호문 

 

청주시 외곽 

 

오송읍 방향

 

산성 순성은 등산보다 쉽고 산책보다는 힘이 더 들어 운동삼아 걷기 좋다.

상당산성은 성벽을 따라 성 안쪽에 또 다른 길이 있어 많은 사람이 햇빛을 피해 안쪽으로 걷는다.

 

하지가 지나며 해는 많이 기울어져 성길 따라 걷는 길도 응달이 진다.

 

 

 

 

 

 

상당산성 포루 터 1

 

포루에는 치성雉城이나 적 대해 위에 포를 배치하고 건물을 지은 군사시설이다.

이곳은 성벽 안쪽에서 밖을 향하여 화포를 발사하도록 되어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영조 20년(1744) 영휴 스님이 쓴 「상당산성 고금사적기」에 영조 1년(1725)에 포루 15곳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40년(176)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상당산성도」를 통해 포루 15개의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포루의 형태가 2~8칸 규모의 작은 기와지붕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포루 터 1은 공간이 협소하지만 높고 평탄하여 주변을 관찰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2002년 발굴 조사 결과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고, 조선 후기의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 치성: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하고, 전투 시 성벽으로 다가오는 적을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시설
  • 적대: 성벽에서 외부로 돌출된 시설물로, 특히 성문의 양측에 설치한다.                                                                                    
Site of Guard Pavilion No. 1 
Sangdangsanseong Fortress, Cheongju

A guard pavilion, called poru in Korean, is a roofed wooden structure built atop a bastion or gate guard post

and equipped with cannons to defend against the enemy.

According to the Chronicles of Sangdangsanseong Fortress written in 1744 by the Buddhist monk Yeonghyu,

15 guard pavilions were constructed in 1725.

In the Map of Sangdangsanseong Fortress, painted presumably in 1764, all 15 guard posts are depicted,

allowing their locations to be approximated.

Based on the depictions, they were relatively small buildings with tiled roofs.

The site of Guard Pavilion No. 1 is quite small, but its level surface and high elevation make it a suitable lookout point. The site was excavated in 2002, revealing the remains of a building and roof tile shards. (안내문)

 

 

 

성벽 위로 물이 스며들며 얼음 등으로 균열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시멘트로 발랐다.

원형을 크게 훼손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지붕처럼 큰 돌을 얹는 게 좋겠다.

 

 

 

 

상당산성 동북 암문  

 

암문은 성을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사잇문이다.

암문은 아군이 적군 몰래 출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축, 양식 등을 나를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상시에는 흙으로 문을 막아 통로를 폐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동북 암문과 서남 암문이 있다.

동북 암문은 동부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 이동할 수 있는 등로일 뿐만 아니라,

동문 밖 골짜기로 모여드는 적군의 뒤쪽으로 가서 포위할 수 있는 중요한 곳에 있다.

암문에는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문 안쪽에 빗장을 걸었던 네모난 구멍이 남아 있다.

한편 동부 암문의 안쪽 옆면에 "강희 경자 오월 康熙 庚子 五月"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암문이

숙종 46년(1720)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암문을 만든 책임자인 서세량, 양덕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양덕부는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 때 정문을 열어 반란군에 가담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동북 양문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상당산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강희: 청나라에서 사용한 연호로, 1662년부터 1722년에 해당한다.

**이인좌의 난: 영조 4년(1728) 3월에 발생하였으며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당시 이인좌, 정희량을 포함한 소론이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이후 소론과 남인이 몰락하게 되었다. 

 

Northeastern Secret Entrance -

Sangdangsanseong Fortress, Cheongju

 

Sangdangsanseong Fortress had a total of five gates: three main gates (southern, eastern, and western)

and two secret entrances (northeastern and southwestern).

This is its northeastern secret entrance, which was completed in 1720.

A secret entrance, called ammun in Korean, is an emergency passage allowing for the undetected movement

of forces, cattle, and food into and out of the fortress.

During times of emergency, secret entrances could be filled in with dirt and sealed.

If the eastern gate was under attack, troops stationed in the fortress could be sent out through

this entrance to surround the enemy from the rear.

The path outside this secret entrance also allowed troops to move along the northeastern mountain ridge.

The secret entrance originally had a door which no longer remains.

The door was fastened shut with a bar that would have been slotted into the square holes

on either side of the passageway.

The secret entrance features several inscriptions connected to the history of the fortress,

including the date of the entrance s completion and the names of the supervisors who oversaw

its construction,

namely Seo Se-ryang and Yang Deok-bu.

Yang Deok-bu is known for having conspired with rebels during a local uprising in 1728

by opening the gate of Cheongjueupseong Walled Town.

                                                                                       (안내문)

 

 

 

 

 

 

드디어 진동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청주 상당산성 진동문 (鎭東門)

 

청주 상당산성의 성문은 3개소로, 북쪽을 제외한 남문(공남문)•동문(진동문)• 서문(미호문)이 있다.

이와 별도로 아군이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던 암문이 동북쪽과 서남쪽에 있다.

성의 동쪽 출입구인 전동문은 동남쪽 해발 350m 내외의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77~1978년까지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때 문루도 함께 복원되었다.

진동문은 통로 양쪽에 벽을 쌓고 그 위에 길고 평평한 돌을 올려 마치 통로가 'ㅁ' 자로 보이는 형태

(평거형 성문)로 축조되었다.

이런 형태의 성문은 평상시 통행이 많이 없는 성문에 주로 사용되었다. (안내문)

 

목우에게 진동문으로 오르자고 하니 그냥 산성을 끝내겠다고 한다.

어려운 산행이 아닌데도 오랜만에 나선 산책이 버거운가 보다.

진동문 너머에 있는 보화정도 생략한 채 산성마을로 내려간다.

 

산성마을에 있는 제법 큰 저수지

 

저수지에서 바라보는 공남문 방향

 

공남문으로 이동하며 보는 보화정은 복원공사를 위해 커다란 막을 씌웠다.

보수공사를 잘 끝내고 완벽한 모습을 다시 만나길 기대한다.

 

드디어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아왔다.

 

상당산성 남문인 공남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가을하늘답게 하늘은 푸르고 산책하기도 좋은 날씨다.

바삐 걷는다고 해도 땀이 살짝 드러나는 정도라 순성도 여유롭게 끝낸다.

 

트랭글을 작동했으나 공남문을 누각 안으로 통과하며 트랭글이 먹통이 되었다.

GPS를 수신하며 작동하는 트랭글은 큰 바위나 건물을 지날 때 통신이 끊기는 오류가 발생한다.

이런 곳을 지날 때마다 잘 작동하는지 자주 확인한다는 게 늘 까먹는다.

기억력 감소이거나 산행에 집중하거나 둘 중 하나다.

 

 

목우와 함께 걷고 싶어 순성 한 청주의 상당산성보다 공주 공산성이 더 멋지다고 한다.

그동안 목우화 함께한 3대 읍성은 물론 몇몇 산성까지 세월이 흐를수록 많아진다.

이렇게 함께하며 살펴본 산성이나 읍성의 기능보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멋스러움에 감탄한다.

워낙 외침이 많다 보니 해안가는 주로 읍성이 발달하고 내륙에는 산성이 많다.